국회의장상 : 김명홍 세이카쿠샤(成學社)그룹 회장(일본)
제사 등 전통문화를 접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져
김명홍 회장(68세)은 1954년 2월 4일 일본 오사카시 키타구 우메다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났다. 오사카시 키타구는 재일교포 출신 상공인의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그가 철이 들 때부터는 주변에 많은 동포 친구,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자각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을 통해 형성됐다.
부모님은 타국에 살더라도 자식들에게 자신들의 뿌리가 제주임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의 부모(김창오, 오무송)는 1930년에 일본으로 이주, 오사카에 정착했다. 부친은 해방 전 오사카에서 작은 영세 공장을 운영했는데, 대동아 전쟁으로 공장이 소실됐다. 해방 이후에는 오사카역전 암시장에서 여성의류 도매상 「오오타야 상점」을 창업, 꽤 번창하게 운영했다.
그는 아들 넷, 딸 둘의 여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 때 민단 하계학교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제주의 친지들도 만나고 서귀포도 찾았다.
이렇게 조상과 고향을 찾으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 게다가 타국에서 매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던 가풍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국의 전통문화에 익숙하게 됐다.
1960년에 종친들이 뜻을 모아서 나라현에 ‘재일광산김씨 친족회의’ 공동묘지를 조성했으며, 그의 부모님도 이곳에 안장했다. 그는 매년 종친회의 벌초 행사는 물론, 제사 및 각종 행사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이러한 모국의 전통과 문화를 접한 그는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간직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갖게 됐다.
재일광산김씨 제사 및 종친회 행사 | 재일광산김씨 제사 및 종친회 행사 2 |
차별과 역경을 딛고 스타강사로 발돋움
1972년 리츠메이칸 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한 김명홍 회장은 재학 4학년 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입시학원 강사 활동을 했다.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았던 그는 대학 졸업 즈음 석유파동으로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일자리 찾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육만큼 인간에게 고귀한 직업은 없다.” 라는 부친의 가르침도 교육 관련 사업을 창업하고 평생을 바쳐오게 한 계기였다. 그는 졸업 후에도 학원 근무를 계속하다가 28세인 1982년,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 카이세이 교육 세미나를 설립했다. 1987년에는 ‘주식회사 세이가쿠샤(成學)’라는 사명으로 법인화를 거쳐, 2008년 자스닥 증권거래소(현:도쿄 증권거래소 JASDAQ 시장)에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상장시켰다.
대학졸업 증서
인기 강사의 반열에 올랐던 그가 자연스럽게 학원 경영자의 길을 걷게 됐던 것이다. 다만 그가 학원경영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실력으로 평가를 받았던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보습학원의 경우 선생이 어느 나라 국적인가,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따지지 않고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면 좋은 선생으로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은 재일한국인으로서 자란 환경이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분노와 모순을 느꼈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길을 열어가기로 결심하고 매일 성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즉, 많은 재일 동포들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려는 자세와 주변을 즐겁게 하는 화술을 공통된 자질로 갖추고 있다. 이는 재일 동포 중 연예계에서 활약하는 동포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이가쿠샤 그룹은 주로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습지원 활동,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세이가쿠샤는 주식회사 아프리스, 시스템 관련 회사인 주식회사 나스피아를 중심으로 6개사가 있다. 2003년에 강사파견과 광고 기획 및 제작을 하는 ㈜아프리스사를 설립했다. 2019년에는 디지털 및 이러닝 교재를 기획, 제작하는 ㈜나스피아를 매수했다. 이에 앞서 2015년에는 인가유치원인 카이세이 차일드케어를 설립해 2020년 현재 세이가쿠샤 그룹은 정사원 약 700명과 시간 강사 약 6,000명으로 총 6,700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매출액은 2020년 기준으로 1,293억 원을 올렸다.
개별지도-집단 지도 브랜드로 일본 학원 입시 시장 석권
그는 1990년에 ‘개별지도학원 프리스텝’ 운영을 개시했으며, 2001년에는 ‘개별지도학원 카이세이 교육세미나인 프리스텝’의 FC사업도 추진했다.
학생 수 및 교실 수에 있어서 개별지도 부문이 집단지도 부문보다 우수한 실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수도권에서는 개별지도학원 프리스텝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김명홍 회장은 상장 이후 14년 정도 지났지만, 간사이 지역과 일본의 수도권인 도쿄에서 개별지도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따라 신규 교실 개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다만 직영에 의한 교실 운영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일부 프랜차이즈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일본에는 전체 학원 수(영업소 포함)가 대략 4만개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도 저출산 고령화가 20년 이상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등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원의 경영환경은 악화일로에 처해 있다. 하지만 김명홍 회장이 안정적으로 학원경영을 유지하는 비결은 학생 및 학부모의 요구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가쿠샤처럼 주식시장에 상장된 학원 관련 기업은 17개사가 있지만 그의 학원경영비결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개성과 요구에 맞춘 학습지도방식을 통하여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이다. 이러한 경영방식에 대해서 지역에서 지지를 얻고 난 뒤 점차 교실수가 늘어나면서 현재 300개 정도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프리스텝 개별지도부 레슨 광경
반면 그는 일본 내의 심각한 유치원 부족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고자 2015년부터 유치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재 일반 유치원 8개원과 소규모 유치원 9개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유치원은 기본적으로 주식회사 세이가쿠샤 하나의 사업으로서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오사카에는 해외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카이세이 아카데미 일본어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 김 회장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쓴 책을 잇달아 출판했다. 「기사회생의 가정교육」이라는 책은 그동안 강연회 참가자를 위한 자료들을 소책자로 정리한 것이다. 시판된 저서는 1권이며 소책자는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기사회생 가정교육 | 학원교육으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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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베트남에 취업건설팅 및 유치원 개설...해외진출 나서
김 회장이 최근 설립한 아프리스 국제교육그룹은 국제사업을 전담하고 있다.
2018년에는 한국에 세이가쿠샤 코리아(주)를 설립, 커리어 컨설팅을 전담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베트남에 유치원 운영 및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는 세이가쿠샤 베트남 유한책임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에는 세이가쿠샤 코리아를 설립, 취업컨설팅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졸업 후 원하는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본에 취업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일본기업에 취업을 희망하는 25개 대학과 협약서를 체결, 일본어 교육 및 비즈니스 일본어와 매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운영하는 k-move스쿨에서 일본 취업분야 교육을 위탁받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전경련 K-move2021 온라인 강의
최근에는 “모국 대학생들의 일본 취업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교육생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회사에 취업한 한국학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는 쇼와화공주식회사와 힐튼 호텔을 꼽을 수 있다. 세이가쿠샤코리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으로부터 2022년 IMI공로상을 받았다.
IMI 전경련 공로상
또한 베트남 다낭에도 유치원 한 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국적 또는 민족에 관계없이 풍성한 인권의식을 바탕으로 교육활동에 매진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상호신뢰조성 및 경제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재일교포 청소년 관심 가져...지역 및 학교교육 개혁 나서
학원 강사 출신인 탓에 그는 재일교포의 교육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11월에 오사카 카이세이(開成)학원이 운영하는 사립 고등학교의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교육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장에 취임할 때까지 학교 명칭은 원래 「고노하나가쿠인고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1929년 창립된 유서 깊은 학교였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탓에 2000년부터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재적학생 수가 매년 감소했다.
그는 이사장 취임 후 학교의 체질개선에 착수하여 학생들의 요구에 맞게 교육의 내용을 충실히 함과 동시에 교육환경 정비에 노력해 왔다. 교직원의 평균연령을 낮추고 정규 코스의 다양화를 모색했다. 스포츠 교육에도 주력하여 학생들이 가진 스포츠분야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끌어내기 위한 체제를 구축해 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 이사장 취임 후 학교경영은 수지면에서도 안정적인 추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한민족으로서 정체성을 함양하는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리츠메이칸 대학 입학 후, 재일 한국인 학생들로 구성된 한국문화연구회에 가입하면서부터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그가 상부 조직인 한국학생동맹에 참여하면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됐다. 특히 조선학교 폐쇄령에 맞서 오사카와 효고현에서 시작된 한신교육투쟁에 참여하면서 뒤늦게 한국어을 배웠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 역사 뿐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운동에 동참하면서 민족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직선위원을 지냈던 그는 동포사회 자녀들의 정체성 함양을 위해 오랫동안 문교부장을 역임했다. 이어 감찰위원장, 부단장(2012년부터 현재)을 지낸 그는 “교육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청소년의 육성을 위해 노력했다. 재일한국장학회 고문과 학교법인 리츠메이칸의 평의원(2014년~), 일반 사단법인 일본청소년육성협회 이사(2008~현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 고문(2013년~현재), 세계한인무역협회 오사카지회 이사(2011~현재)를 맡고 있다. 김 회장은 특히 제주도와 광산김씨 등 자신의 조상과 모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 광산김씨 종친회 고문을 2007년부터 현재까지 맡고 있으며, 2014년부터 지금까지 제주특별자치도민협회 고문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광산김씨 공로상 1 | 광산김씨 공로상 2 |
‘남에게 베풀면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 복이 미친다.’는 말을 실천
김 회장은 우리나라와 일본 속담에 있는 ‘積善之家必有餘慶:남에게 베풀면 자신에게는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그 복이 미친다.’라는 말을 믿고 있다. 남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의 결과가 가족 및 친족, 나아가 사회에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끊임없이 베푸는 삶을 견지하고 있다. 2010년에는 학교법인 고노하나학원에 1천만엔을 기부했다. 특히 학교 등 젊은 세대들을 위한 기부에 적극적이다. 백두학원 교사 신축에 60만엔을 기부하고 <재일한국인 역사> 저서에 40만엔을 기부했다. 또 나라현 헤구리에 있는 광산김씨 공원 묘지가 태풍으로 피해를 입자, 수복공사기금으로 100만엔을 기부했으며, 한국 민단 및 재일한국장학회에는 10년간 약 1000만엔을 기부했다.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의 목소리”에 30만엔을, 교토국제고등학교 고시엔(고교야구) 출전에 15만엔을 각각 기부했다.
또한 제주도 광산김씨 종친회가 기념지를 발행할 때도 50만엔을 기부했다. 광산김씨 문간공파 귀림공종중회(貴林公宗中會) 족보 제작을 위한 자금으로도 50만엔을 기부했다.
2019 한국민단
국회의장상 : 김명홍 세이카쿠샤(成學社)그룹 회장(일본)
제사 등 전통문화를 접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져
김명홍 회장(68세)은 1954년 2월 4일 일본 오사카시 키타구 우메다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났다. 오사카시 키타구는 재일교포 출신 상공인의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그가 철이 들 때부터는 주변에 많은 동포 친구,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자각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을 통해 형성됐다.
부모님은 타국에 살더라도 자식들에게 자신들의 뿌리가 제주임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의 부모(김창오, 오무송)는 1930년에 일본으로 이주, 오사카에 정착했다. 부친은 해방 전 오사카에서 작은 영세 공장을 운영했는데, 대동아 전쟁으로 공장이 소실됐다. 해방 이후에는 오사카역전 암시장에서 여성의류 도매상 「오오타야 상점」을 창업, 꽤 번창하게 운영했다.
그는 아들 넷, 딸 둘의 여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 때 민단 하계학교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제주의 친지들도 만나고 서귀포도 찾았다.
이렇게 조상과 고향을 찾으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 게다가 타국에서 매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던 가풍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국의 전통문화에 익숙하게 됐다.
1960년에 종친들이 뜻을 모아서 나라현에 ‘재일광산김씨 친족회의’ 공동묘지를 조성했으며, 그의 부모님도 이곳에 안장했다. 그는 매년 종친회의 벌초 행사는 물론, 제사 및 각종 행사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이러한 모국의 전통과 문화를 접한 그는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간직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효심을 갖게 됐다.
차별과 역경을 딛고 스타강사로 발돋움
1972년 리츠메이칸 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한 김명홍 회장은 재학 4학년 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입시학원 강사 활동을 했다.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았던 그는 대학 졸업 즈음 석유파동으로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일자리 찾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육만큼 인간에게 고귀한 직업은 없다.” 라는 부친의 가르침도 교육 관련 사업을 창업하고 평생을 바쳐오게 한 계기였다. 그는 졸업 후에도 학원 근무를 계속하다가 28세인 1982년,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 카이세이 교육 세미나를 설립했다. 1987년에는 ‘주식회사 세이가쿠샤(成學)’라는 사명으로 법인화를 거쳐, 2008년 자스닥 증권거래소(현:도쿄 증권거래소 JASDAQ 시장)에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상장시켰다.
대학졸업 증서
인기 강사의 반열에 올랐던 그가 자연스럽게 학원 경영자의 길을 걷게 됐던 것이다. 다만 그가 학원경영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실력으로 평가를 받았던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보습학원의 경우 선생이 어느 나라 국적인가,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따지지 않고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면 좋은 선생으로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은 재일한국인으로서 자란 환경이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분노와 모순을 느꼈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 길을 열어가기로 결심하고 매일 성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즉, 많은 재일 동포들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려는 자세와 주변을 즐겁게 하는 화술을 공통된 자질로 갖추고 있다. 이는 재일 동포 중 연예계에서 활약하는 동포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이가쿠샤 그룹은 주로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습지원 활동,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세이가쿠샤는 주식회사 아프리스, 시스템 관련 회사인 주식회사 나스피아를 중심으로 6개사가 있다. 2003년에 강사파견과 광고 기획 및 제작을 하는 ㈜아프리스사를 설립했다. 2019년에는 디지털 및 이러닝 교재를 기획, 제작하는 ㈜나스피아를 매수했다. 이에 앞서 2015년에는 인가유치원인 카이세이 차일드케어를 설립해 2020년 현재 세이가쿠샤 그룹은 정사원 약 700명과 시간 강사 약 6,000명으로 총 6,700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매출액은 2020년 기준으로 1,293억 원을 올렸다.
개별지도-집단 지도 브랜드로 일본 학원 입시 시장 석권
그는 1990년에 ‘개별지도학원 프리스텝’ 운영을 개시했으며, 2001년에는 ‘개별지도학원 카이세이 교육세미나인 프리스텝’의 FC사업도 추진했다.
학생 수 및 교실 수에 있어서 개별지도 부문이 집단지도 부문보다 우수한 실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수도권에서는 개별지도학원 프리스텝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김명홍 회장은 상장 이후 14년 정도 지났지만, 간사이 지역과 일본의 수도권인 도쿄에서 개별지도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따라 신규 교실 개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다만 직영에 의한 교실 운영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일부 프랜차이즈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일본에는 전체 학원 수(영업소 포함)가 대략 4만개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도 저출산 고령화가 20년 이상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등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원의 경영환경은 악화일로에 처해 있다. 하지만 김명홍 회장이 안정적으로 학원경영을 유지하는 비결은 학생 및 학부모의 요구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가쿠샤처럼 주식시장에 상장된 학원 관련 기업은 17개사가 있지만 그의 학원경영비결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개성과 요구에 맞춘 학습지도방식을 통하여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이다. 이러한 경영방식에 대해서 지역에서 지지를 얻고 난 뒤 점차 교실수가 늘어나면서 현재 300개 정도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프리스텝 개별지도부 레슨 광경
반면 그는 일본 내의 심각한 유치원 부족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고자 2015년부터 유치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재 일반 유치원 8개원과 소규모 유치원 9개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유치원은 기본적으로 주식회사 세이가쿠샤 하나의 사업으로서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오사카에는 해외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카이세이 아카데미 일본어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 김 회장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쓴 책을 잇달아 출판했다. 「기사회생의 가정교육」이라는 책은 그동안 강연회 참가자를 위한 자료들을 소책자로 정리한 것이다. 시판된 저서는 1권이며 소책자는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한국, 베트남에 취업건설팅 및 유치원 개설...해외진출 나서
김 회장이 최근 설립한 아프리스 국제교육그룹은 국제사업을 전담하고 있다.
2018년에는 한국에 세이가쿠샤 코리아(주)를 설립, 커리어 컨설팅을 전담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베트남에 유치원 운영 및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는 세이가쿠샤 베트남 유한책임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에는 세이가쿠샤 코리아를 설립, 취업컨설팅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졸업 후 원하는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본에 취업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일본기업에 취업을 희망하는 25개 대학과 협약서를 체결, 일본어 교육 및 비즈니스 일본어와 매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운영하는 k-move스쿨에서 일본 취업분야 교육을 위탁받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전경련 K-move2021 온라인 강의
최근에는 “모국 대학생들의 일본 취업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교육생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회사에 취업한 한국학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는 쇼와화공주식회사와 힐튼 호텔을 꼽을 수 있다. 세이가쿠샤코리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으로부터 2022년 IMI공로상을 받았다.
IMI 전경련 공로상
또한 베트남 다낭에도 유치원 한 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국적 또는 민족에 관계없이 풍성한 인권의식을 바탕으로 교육활동에 매진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상호신뢰조성 및 경제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재일교포 청소년 관심 가져...지역 및 학교교육 개혁 나서
학원 강사 출신인 탓에 그는 재일교포의 교육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11월에 오사카 카이세이(開成)학원이 운영하는 사립 고등학교의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교육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장에 취임할 때까지 학교 명칭은 원래 「고노하나가쿠인고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1929년 창립된 유서 깊은 학교였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탓에 2000년부터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재적학생 수가 매년 감소했다.
그는 이사장 취임 후 학교의 체질개선에 착수하여 학생들의 요구에 맞게 교육의 내용을 충실히 함과 동시에 교육환경 정비에 노력해 왔다. 교직원의 평균연령을 낮추고 정규 코스의 다양화를 모색했다. 스포츠 교육에도 주력하여 학생들이 가진 스포츠분야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끌어내기 위한 체제를 구축해 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 이사장 취임 후 학교경영은 수지면에서도 안정적인 추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한민족으로서 정체성을 함양하는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리츠메이칸 대학 입학 후, 재일 한국인 학생들로 구성된 한국문화연구회에 가입하면서부터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그가 상부 조직인 한국학생동맹에 참여하면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됐다. 특히 조선학교 폐쇄령에 맞서 오사카와 효고현에서 시작된 한신교육투쟁에 참여하면서 뒤늦게 한국어을 배웠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 역사 뿐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운동에 동참하면서 민족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직선위원을 지냈던 그는 동포사회 자녀들의 정체성 함양을 위해 오랫동안 문교부장을 역임했다. 이어 감찰위원장, 부단장(2012년부터 현재)을 지낸 그는 “교육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청소년의 육성을 위해 노력했다. 재일한국장학회 고문과 학교법인 리츠메이칸의 평의원(2014년~), 일반 사단법인 일본청소년육성협회 이사(2008~현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 고문(2013년~현재), 세계한인무역협회 오사카지회 이사(2011~현재)를 맡고 있다. 김 회장은 특히 제주도와 광산김씨 등 자신의 조상과 모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 광산김씨 종친회 고문을 2007년부터 현재까지 맡고 있으며, 2014년부터 지금까지 제주특별자치도민협회 고문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남에게 베풀면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 복이 미친다.’는 말을 실천
김 회장은 우리나라와 일본 속담에 있는 ‘積善之家必有餘慶:남에게 베풀면 자신에게는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그 복이 미친다.’라는 말을 믿고 있다. 남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의 결과가 가족 및 친족, 나아가 사회에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끊임없이 베푸는 삶을 견지하고 있다. 2010년에는 학교법인 고노하나학원에 1천만엔을 기부했다. 특히 학교 등 젊은 세대들을 위한 기부에 적극적이다. 백두학원 교사 신축에 60만엔을 기부하고 <재일한국인 역사> 저서에 40만엔을 기부했다. 또 나라현 헤구리에 있는 광산김씨 공원 묘지가 태풍으로 피해를 입자, 수복공사기금으로 100만엔을 기부했으며, 한국 민단 및 재일한국장학회에는 10년간 약 1000만엔을 기부했다.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의 목소리”에 30만엔을, 교토국제고등학교 고시엔(고교야구) 출전에 15만엔을 각각 기부했다.
또한 제주도 광산김씨 종친회가 기념지를 발행할 때도 50만엔을 기부했다. 광산김씨 문간공파 귀림공종중회(貴林公宗中會) 족보 제작을 위한 자금으로도 50만엔을 기부했다.
2019 한국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