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기 장한상 해수부장관상 수상자 김장열 회장
김장열 씨그린 그룹 회장(태국)
어렸을 때 꿈 – 사업가:국제적 인증을 받는 회사롤 발전하는 꿈
대구에서 벽돌공장과 건축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아주 엄격한 교육과 돈 문제로 인해 엄청난 핍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자랐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 부를 일구고자하는 열망을 키우며 사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우연히 TV를 시청하던 중 바다를 항해하는 상선의 모습을 보면서 고향과 부모의 슬하를 떠나 꿈을 키울수있는 대학을 찾기 시작하면서 항해사와 해운 경영에 대한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76년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립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진학한 그는 학비 및 기숙사비 등 제반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받았다.
4년간 해군 ROTC과정을 의무적으로 이수한 그는 졸업식 다음날 해군 소위로 전역했으며 2년간은 상선에 근무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대한해운의 자회사인 ㈜한국선무에 입사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26만톤급 규모의 유조선 3등 항해사로 사회 첫걸음을 시작하면서 석탄을 실어나르는 벌크선박 등에서 의무승선기간 2년을 채운 후 승선생활을 마무리한다. 1982년에 결혼 후 육상 근무로 전환해 거제도 대우조선에 입사하여 원유 시추선 시험운항을 하며 근무하던중 평소 해운경영에 대한 꿈을 키우던 그는 당시 국내에서 최대 용선 중개회사인 ㈜한국유니버샬에 입사하게 된다.
씨그린그룹이 입주한 빌딩 측면 전경
전세계 해운 용선시장의 네트워크에 뛰어들어 약5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선전문가로서의 입지를 키우며 개인적 신용을 쌓아나가던 중 용선업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1987년 태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부인과 4살 난 외아들과 함께 태국으로 진출한 이후 아들을 초중고 과정의 국제학교에 보내면서 10여년 동안 한국어 교육을 병행했다. 아들은 미국 보스턴 소재 노스 이스턴(North Eastern)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 Cass Business School 대학원을 이수한 뒤 ABN AMRO은행 서울사무소에서 1년간 근무했다. 싱가포르에서 5년간 IMC그룹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씨그린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김 회장은 태국에서 해운업계의 리더로 성장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종합해운 및 물류회사로 키워나가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
용선해운회사에서 용선 업무 배워 태국해운시장이 블루 오션으로 확신, 사표 내
평소 해운 경영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그가 한국해양대 11기 이용기 회장이 경영하는 ㈜한국유니버샬해운으로 전직했던 것이 향후 해운경영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유니버샬 해운은 1980년 호주의 유니차터그룹과 합작으로
창업된 회사로 선박대리점업 등 해운중개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회사였다. 김회장은 이 회사에서 5년간 근무하는 동안 당시 현대상선의 용선업무를 House Broker에 준하는 수준으로 처리하며 용선업무를 집중적으로 습득했다. 당시에는 이메일 또는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시차 때문에 다른 나라와 업무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텔렉스(Telex)와 국제전화에 의존하면서 전세계 주요 해운국가들의 해외인맥들과 두터운 신용을 쌓아나가며 해운시장을 네트워킹했다. 특히 김 회장이 터득한 용선(傭船:chatering)업은 전 세계를 운항하는 선박을 빌려서 안정적인 화물을 수송하는 것을 대행해주고 화주에게 받은 운임에서 선주에게 용선료를 주고 차액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한국해양대 후배 기수들이 방콕을 방문할 때 찍은 사진
이 업무를 수행하려면 선주와 화주 등 여러 조건을 최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협상 능력과 국제적인 신용을 바탕으로 팩스, 텔렉스, 전화를 이용하여 빈틈없는 용선계약을 맺어야만 성사됐다. 이 때문에 영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됐다. 그는 대학교 선배였던 오너에게 중개 업무를 넘어 용선 업무의 진출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용선 사업은 중개업무보다 “리스크가 훨씬 크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거절당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의 눈에는 용선업이 블루오션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동안 터득한 용선업에 대한 노하우와 해외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진출가능한 전세계의 용선시장을 둘러보던 중 태국이 가장 매력이 있는 시장이라고 판단하여 1987년에 태국으로 진출하면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용선업의 불모지 태국에서 회사 창업해, 33년째 선두
해외 해운시장정보를 예의주시하면서 눈여겨 본 국가가 태국이었다. 태국은 바다와 접해 있는 면적이 1/3정도이지만 수출입 항구의 대부분이 강을 따라 입출항을 해야 하는 바람에 수심이 낮아서 항만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의 국제항으로는 방콕항과 코시창 항 등에 불과했다. 게다가 선원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해운업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았다. 또한 태국의 GDP 절반이상을 농수산업과 관광산업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운업의 중요성을 깨닫는 전문가가 거의 없었다. 또한 가족중심의 산업구조인 탓에 가족들과 오랜 기간 떨어져 생활하는 선원직업을 선호하지 않는 풍토가 형성됐다.
그는 태국 왕실에서 운영하는 태국 굴지의 시멘트회사인 시암시멘트 그룹의 메니저와 용선계약업무를 추진하면서 태국 용선업의 수준을 확실히 알게 됐다. 태국에서 용선업이 블루오션의 시장이라고 확신한 그는 태국의 그룹 몇 개를 선정, 태국의 용선업 현황과 향후 발전 계획과 전문가의 필요성에 대한 자료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국에서 소형 선박을 한 척 소유하며 해운회사를 운영하던 업체의 사장이 그를 찾아왔다. 의기투합해서 용선 업무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즉시 파트너계약을 맺고 1987년 8월에 회사에 사표를 낸 뒤 2개월 지나서 가족과 함께 태국 방콕으로 이주했다.
싱가포르 출신 회사가 용선 업무 독점…무료 서비스로 자리잡아
당시에 태국에는 싱가포르인이 운영하던 회사가 용선 업무를 독점하고 있었다. 태국 화주들의 대부분이 용선 분야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용선 업체가 해운 계약을 무리하게 맺고 불법적인 횡포를 일삼아도 화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김 회장은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화주들을 대상으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국제 해상법에 근거하여 합법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노력에 감동을 받은 화주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그동안 쌓았던 선주와 브로커들의 국제적인 해운네트워크를 활용, 태국의 용선 시장을 빠르게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태국에 진출해있던 일본 종합상사의 관계자들도 화물을 들고 와서 배를 찾아달라고 그에게 매달렸다. 오히려 이들이 발 벗고 나서서 태국 화주들에게 김 회장을 소개해준 덕분에 낯선 이국땅에서 빠른 시간 내 일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태국 진출 2년만에 파트너십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태국파트너와의 관계를 매듭짓고 1989년에 씨그린 운송을 창업했다. 현재 태국의 최대 재벌인 차로엔 폭판도 그룹(이하 CP그룹)은 닭, 새우 등 가축업 및 수산물양식업의 최대기업으로 당시에 사료 원료를 미국으로부터 CIF조건으로 전량 수입하고 있었으나, 김 회장과의 운송계약으로 FOB조건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태국 최대의 농산물 수출업체인 순화셍그룹(SoonHwaSeng Group)의 쌀과 타피오카 등 수출물량도 FOB조건으로 수출하던 것을 김 회장과의 운송계약으로 CIF조건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태국에서 한국으로 운송되는 복합사료원료인 타피오카팰릿을 연간 약 1백만 톤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는 태국산 타피오카와 쌀 등을 장기 운송하는 용선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선주가 화주에게 발행해야 하는 선하증권(Bill of Lading)을 태국은행들이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외 선주들의 선하증권을 빌려와서 대리점입장으로 발행하는 비정상적인 관행을 보고 답답해 하며 태국내 모든 은행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국제적 신용도를 제시하여 설득한 후 국제적인 신뢰를 승인받고 태국 해운사중에 최초로 선하증권을 발행하는 해운회사가 되었다. 30대 초반에 창업한 씨그린 해운은 한국과 일본, 중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아프리카, 인도, 유럽 등의 파트너들과 오랫동안 긴밀하게 네트워크를 활용,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줬다.
철저한 신용 관리로 33년째 선두 지켜
김 회장이 낯선 태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태국 화주들과의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국제적 해운파트너들과 장기간 맺어온 신뢰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급신용을 지키기 위해 선주에게 용선료를 지급해야할 날짜보다 오히려 빨리 송금하고 화주에게는 화물을 좀 더 경쟁력있는 운임으로 안전하고 빠르게 운송해주며 브로커들에게 정확하게 리베이트를 지급했다. 또한 합리적이고 경쟁력있는 용선료를 제안하고 서비스와 사후관리까지 철저하게 해주었고, 용선 관련 문제점들을 무상으로 해결해주며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선박대리점 및 용선업 분야에서 선두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예컨대 태국 최대 닭 사육 및 새우 농장에서 쓰이는 사료가 미국산 밀을 CIF(화물을 본선까지 적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과 위험부담 이외에 해상 운임과 보험료까지 수출 화주가 부담하는 조건)방식으로 수입 계약되었던 것을, 운송 선박 투입조건으로 FOB(화물의 수송에 필요한 선복 수배와 해상운임, 보험료를 수입업자가 부담하는 조건)방식의 수입계약으로 성사시켰다.
이 조건으로 태국 업체는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산 밀을 수입하게 됐다. 이렇게 덕을 본 이들 기업들은 한국에서 수입하는 남해 화학의 비료 수입을 김 회장의 회사에 운송 및 하역항 지정, 선박대리점의 업무까지 맡겼다. 이밖에 1990년 초 한국사료협회가 태국산 타피오카팰릿을 수입할 때 연간 약1백만 톤 이상의 물량을 김 회장의 회사가 운송할 수 있도록 배정했다.
특히 1997년 7월 태국에서 IMF 금융위기가 최초로 발생했을 때 씨그린은 외화 수입의 환차익으로 외환위기를 오히려 좋은 기회로 만들어 한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으며 태국의 용선 상당수를 확보, 일감이 넘쳐났다.
끈끈한 인맥과 철저한 사업계획으로 신임을 얻게 된 씨그린은 태국의 모든 항구에 기항하는 해외 벌크화물선주들의 선박대리점으로 지정받고, 연간 100척 이상의 선박 입출항 수속 및 하역작업을 제공하며 바지선으로 소량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사업도 따냈다.
바지선에서 화물을 배에 싣는 장면
태국에서 사업기반을 확보한 김 회장은 1992년에 동서화학과 합작으로 아시아 라브를 설립, 당시 스포츠화의 최대 생산국인 태국에서 전량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신발의 바닥깔창인 라텍스인솔을 제조하여 나이키와 아디다스, 리복에 납품하며 수입대체품으로 시장을 석권했다. 현재는 합작회사의 운영권을 사정상 태국 파트너에 넘겼다.
1998년에는 에버 스플렌디드사를 설립, 태국 창마이 소재 벌꿀농장에서 채취한 생로얄제리를 냉동건조공법으로 연간 2백만 캡슐을 생산,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2005년에는 한국의 STX해운과 합작으로 유니그린 에이전시를 설립, 한국~중국~홍콩~태국을 잇는 컨테이너 화물을 수송하는 정기선을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 SK OIL에서 생산한 선박윤활유를 국내 총판매법인 한유에너지와 49:51% 합작으로 태국에 판매법인을 설립, 현지 해운사 선박에 해상윤활유를 공급,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 2017년 태국 부동산 및 금융자산 투자 및 관리를 위해 J&J에셋을 설립, 호스텔과 부띠크호텔, 금융상품, 보험, 투자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또 서울에 씨그린빌딩을 구입하는 등 빌딩 임대업에도 진출했다.
24대 태국한인회장 맡아, 쓰나미 구호 앞장서 푸미폰 국왕훈장 받아
2005년 1월 1일부터 태국한인회 제24대 회장의 임기가 개시되는 김장열 회장은 당일날 푸켓에서 쓰나미 해일이 덮쳐 사망한 한국인들의 장례식을 치르며 회장에 취임했다. 왜냐하면 2004년 12월 26일 현지시간 오전 7시 59분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 해안의 40km 지점에서 발생한 9.3 초대형 해저 지진으로 발생, 태국의 푸켓지방에서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태국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태국에 사업을 하거나 살고 있는 한인들을 규합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구호 성금 및 물품(약 6억원상당에 달하는)을 탁신 시나왓 당시 총리와 정부기관 등에 전달했다.
그해 12월 1일에는 방콕 도심 수쿰빗 18번가에 방콕 한인 1세대들이 1977년도에 독자적으로 마련한 한인회관을 한국전통양식에 맞게 리모델링하여 한국문화회관으로 재개관했다. 여기에 소요된 비용은 한인들의 모금과 재외동포재단에서 지원한 특별지원금 3만7천불로 충당했다.
재임기간 동안 한인문화회관에서 태국어 강습과 영어 강습, 꽃꽂이 강좌 컴퓨터 강좌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와 함께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자녀 돕기 자선골프대회를 개최, 장학성금을 기탁했다. 설명절과 추석절에는 한인회 처음으로 떡과 과일 등을 교민들에게 베풀며 한인회가 진정한 봉사단체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봉사활동과 쓰나미재해시 구호활동에 대한 감사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2006년 12월에 개최한 한국인의 날 행사 때 태국 왕실로부터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위급(디렉쿠나폰급)의 푸미폰국왕 훈장을 받았다.
태국왕실로부터 국왕의 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해태그룹의 박건배회장과 태국의 타피오카를 복합 사료의 원료로 수입한 효림실업 임종인 회장에 이어 그가 세 번째였다. 이와 함께 태국 불우이웃돕기와 소년소녀 가장돕기 장학금 지원, 태권도 부흥을 위해 후원한 공로로 태국왕실로부터 다년간 감사장을 받았다.
특히 방콕한국국제학교에도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태국한인회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인회장에 출마하면서 미화 7만불의 한인회 운영기금을 공탁했다. 또한, 김 회장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태국 지회장을 맡고 있을 때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중국을 거쳐 태국으로 밀입국을 할 경우 태국이민청에서 관리하는 열악한 수용소에서 일정기간 체류하게 되는데, 그때 그는 한인회가 종교단체와 연대하여 환경이 좋은 거처를 마련하여 탈북민들이 좀 더 안락한 거처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음식과 생활용품도 장기간 지원했다.
가족의식으로 똘똘 뭉친 현지화 ... 사원 복지에 역점
용선업을 해보겠다고 태국으로 진출한 외국기업들이 많았으나,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유는 태국의 시장규모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태국의 기업들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탓에 쉽게 거래선을 바꾸려 하지 않는 관행 때문이다.
태국인들은 아열대 기후의 영향을 받은 탓에 행동이 느리고 좀 게으른 편이지만 의리는 강하기 때문에 한번 거래를 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용선업에 대한 실력과 정보만으로 태국 시장을 진출해보겠다고 도전한 기업들도 오랫동안 김 회장과 맺은 끈끈한 인맥을 뚫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전 직원을 태국인으로 현지화 했다. 김 회장이 일년에 몇 개월씩 해외 업무차 장기 출장을 나가더라도 직원들이 맡겨 놓은 업무를 효율적이고 숙련되게 처리하는 등의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창립 33년째를 맞고 있는 회사는 ‘직원이 가족’임을 뜻하는 패밀리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월급 외에도 경조사 비용은 물론, 가족의 장례식 비용도 회사가 부담해주고 있다. 영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고급 인력에게는 고액의 임금은 물론,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김 회장의 경영 철학도 종업원 개개인들이 회사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동안에는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틈틈이 글을 써서 수필가 등단…태권도 공인 4단
김 회장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태권도 수련을 했던 탓에 공인 4단증을 받았다.
대학 시절에는 태권반장으로 후배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했다. 또 다른 취미는 글쓰기다.
유조선 항해사로 취업되어 버뮤다 해역에서 첫 승선 길에 오르던 때에 타고 가던 낡은 소형보트가 열대성 폭풍우를 만나 생사를 오가는 위기 상황에서 기적처럼 살아났던 때를 비롯하여, 태국에 진출하여 사업을 개시할 때 겪었던 기적 체험 등을 글로 쓴 것이 중견 문예지인 ‘국제문예’에서 공모한 수필 부문에 뽑혀 2010년 6월 수필가로 등단했다. 또한 태국에 살면서 겪었던 에피소드 등을 글로 써서 격 월간지인 국제문예지에 기고했다.
6기 장한상 해수부장관상 수상자 김장열 회장
김장열 씨그린 그룹 회장(태국)
어렸을 때 꿈 – 사업가:국제적 인증을 받는 회사롤 발전하는 꿈
대구에서 벽돌공장과 건축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아주 엄격한 교육과 돈 문제로 인해 엄청난 핍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자랐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 부를 일구고자하는 열망을 키우며 사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우연히 TV를 시청하던 중 바다를 항해하는 상선의 모습을 보면서 고향과 부모의 슬하를 떠나 꿈을 키울수있는 대학을 찾기 시작하면서 항해사와 해운 경영에 대한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76년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립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진학한 그는 학비 및 기숙사비 등 제반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받았다.
4년간 해군 ROTC과정을 의무적으로 이수한 그는 졸업식 다음날 해군 소위로 전역했으며 2년간은 상선에 근무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대한해운의 자회사인 ㈜한국선무에 입사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26만톤급 규모의 유조선 3등 항해사로 사회 첫걸음을 시작하면서 석탄을 실어나르는 벌크선박 등에서 의무승선기간 2년을 채운 후 승선생활을 마무리한다. 1982년에 결혼 후 육상 근무로 전환해 거제도 대우조선에 입사하여 원유 시추선 시험운항을 하며 근무하던중 평소 해운경영에 대한 꿈을 키우던 그는 당시 국내에서 최대 용선 중개회사인 ㈜한국유니버샬에 입사하게 된다.
씨그린그룹이 입주한 빌딩 측면 전경
전세계 해운 용선시장의 네트워크에 뛰어들어 약5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선전문가로서의 입지를 키우며 개인적 신용을 쌓아나가던 중 용선업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1987년 태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부인과 4살 난 외아들과 함께 태국으로 진출한 이후 아들을 초중고 과정의 국제학교에 보내면서 10여년 동안 한국어 교육을 병행했다. 아들은 미국 보스턴 소재 노스 이스턴(North Eastern)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 Cass Business School 대학원을 이수한 뒤 ABN AMRO은행 서울사무소에서 1년간 근무했다. 싱가포르에서 5년간 IMC그룹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씨그린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김 회장은 태국에서 해운업계의 리더로 성장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종합해운 및 물류회사로 키워나가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
용선해운회사에서 용선 업무 배워 태국해운시장이 블루 오션으로 확신, 사표 내
평소 해운 경영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그가 한국해양대 11기 이용기 회장이 경영하는 ㈜한국유니버샬해운으로 전직했던 것이 향후 해운경영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유니버샬 해운은 1980년 호주의 유니차터그룹과 합작으로
창업된 회사로 선박대리점업 등 해운중개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회사였다. 김회장은 이 회사에서 5년간 근무하는 동안 당시 현대상선의 용선업무를 House Broker에 준하는 수준으로 처리하며 용선업무를 집중적으로 습득했다. 당시에는 이메일 또는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시차 때문에 다른 나라와 업무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텔렉스(Telex)와 국제전화에 의존하면서 전세계 주요 해운국가들의 해외인맥들과 두터운 신용을 쌓아나가며 해운시장을 네트워킹했다. 특히 김 회장이 터득한 용선(傭船:chatering)업은 전 세계를 운항하는 선박을 빌려서 안정적인 화물을 수송하는 것을 대행해주고 화주에게 받은 운임에서 선주에게 용선료를 주고 차액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한국해양대 후배 기수들이 방콕을 방문할 때 찍은 사진
이 업무를 수행하려면 선주와 화주 등 여러 조건을 최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협상 능력과 국제적인 신용을 바탕으로 팩스, 텔렉스, 전화를 이용하여 빈틈없는 용선계약을 맺어야만 성사됐다. 이 때문에 영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됐다. 그는 대학교 선배였던 오너에게 중개 업무를 넘어 용선 업무의 진출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용선 사업은 중개업무보다 “리스크가 훨씬 크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거절당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의 눈에는 용선업이 블루오션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동안 터득한 용선업에 대한 노하우와 해외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진출가능한 전세계의 용선시장을 둘러보던 중 태국이 가장 매력이 있는 시장이라고 판단하여 1987년에 태국으로 진출하면서 제2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용선업의 불모지 태국에서 회사 창업해, 33년째 선두
해외 해운시장정보를 예의주시하면서 눈여겨 본 국가가 태국이었다. 태국은 바다와 접해 있는 면적이 1/3정도이지만 수출입 항구의 대부분이 강을 따라 입출항을 해야 하는 바람에 수심이 낮아서 항만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의 국제항으로는 방콕항과 코시창 항 등에 불과했다. 게다가 선원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해운업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았다. 또한 태국의 GDP 절반이상을 농수산업과 관광산업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운업의 중요성을 깨닫는 전문가가 거의 없었다. 또한 가족중심의 산업구조인 탓에 가족들과 오랜 기간 떨어져 생활하는 선원직업을 선호하지 않는 풍토가 형성됐다.
그는 태국 왕실에서 운영하는 태국 굴지의 시멘트회사인 시암시멘트 그룹의 메니저와 용선계약업무를 추진하면서 태국 용선업의 수준을 확실히 알게 됐다. 태국에서 용선업이 블루오션의 시장이라고 확신한 그는 태국의 그룹 몇 개를 선정, 태국의 용선업 현황과 향후 발전 계획과 전문가의 필요성에 대한 자료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국에서 소형 선박을 한 척 소유하며 해운회사를 운영하던 업체의 사장이 그를 찾아왔다. 의기투합해서 용선 업무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즉시 파트너계약을 맺고 1987년 8월에 회사에 사표를 낸 뒤 2개월 지나서 가족과 함께 태국 방콕으로 이주했다.
싱가포르 출신 회사가 용선 업무 독점…무료 서비스로 자리잡아
당시에 태국에는 싱가포르인이 운영하던 회사가 용선 업무를 독점하고 있었다. 태국 화주들의 대부분이 용선 분야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용선 업체가 해운 계약을 무리하게 맺고 불법적인 횡포를 일삼아도 화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김 회장은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화주들을 대상으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국제 해상법에 근거하여 합법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노력에 감동을 받은 화주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그동안 쌓았던 선주와 브로커들의 국제적인 해운네트워크를 활용, 태국의 용선 시장을 빠르게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태국에 진출해있던 일본 종합상사의 관계자들도 화물을 들고 와서 배를 찾아달라고 그에게 매달렸다. 오히려 이들이 발 벗고 나서서 태국 화주들에게 김 회장을 소개해준 덕분에 낯선 이국땅에서 빠른 시간 내 일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태국 진출 2년만에 파트너십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태국파트너와의 관계를 매듭짓고 1989년에 씨그린 운송을 창업했다. 현재 태국의 최대 재벌인 차로엔 폭판도 그룹(이하 CP그룹)은 닭, 새우 등 가축업 및 수산물양식업의 최대기업으로 당시에 사료 원료를 미국으로부터 CIF조건으로 전량 수입하고 있었으나, 김 회장과의 운송계약으로 FOB조건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태국 최대의 농산물 수출업체인 순화셍그룹(SoonHwaSeng Group)의 쌀과 타피오카 등 수출물량도 FOB조건으로 수출하던 것을 김 회장과의 운송계약으로 CIF조건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태국에서 한국으로 운송되는 복합사료원료인 타피오카팰릿을 연간 약 1백만 톤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는 태국산 타피오카와 쌀 등을 장기 운송하는 용선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선주가 화주에게 발행해야 하는 선하증권(Bill of Lading)을 태국은행들이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외 선주들의 선하증권을 빌려와서 대리점입장으로 발행하는 비정상적인 관행을 보고 답답해 하며 태국내 모든 은행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국제적 신용도를 제시하여 설득한 후 국제적인 신뢰를 승인받고 태국 해운사중에 최초로 선하증권을 발행하는 해운회사가 되었다. 30대 초반에 창업한 씨그린 해운은 한국과 일본, 중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아프리카, 인도, 유럽 등의 파트너들과 오랫동안 긴밀하게 네트워크를 활용,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줬다.
철저한 신용 관리로 33년째 선두 지켜
김 회장이 낯선 태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태국 화주들과의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국제적 해운파트너들과 장기간 맺어온 신뢰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급신용을 지키기 위해 선주에게 용선료를 지급해야할 날짜보다 오히려 빨리 송금하고 화주에게는 화물을 좀 더 경쟁력있는 운임으로 안전하고 빠르게 운송해주며 브로커들에게 정확하게 리베이트를 지급했다. 또한 합리적이고 경쟁력있는 용선료를 제안하고 서비스와 사후관리까지 철저하게 해주었고, 용선 관련 문제점들을 무상으로 해결해주며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선박대리점 및 용선업 분야에서 선두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예컨대 태국 최대 닭 사육 및 새우 농장에서 쓰이는 사료가 미국산 밀을 CIF(화물을 본선까지 적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비용과 위험부담 이외에 해상 운임과 보험료까지 수출 화주가 부담하는 조건)방식으로 수입 계약되었던 것을, 운송 선박 투입조건으로 FOB(화물의 수송에 필요한 선복 수배와 해상운임, 보험료를 수입업자가 부담하는 조건)방식의 수입계약으로 성사시켰다.
이 조건으로 태국 업체는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산 밀을 수입하게 됐다. 이렇게 덕을 본 이들 기업들은 한국에서 수입하는 남해 화학의 비료 수입을 김 회장의 회사에 운송 및 하역항 지정, 선박대리점의 업무까지 맡겼다. 이밖에 1990년 초 한국사료협회가 태국산 타피오카팰릿을 수입할 때 연간 약1백만 톤 이상의 물량을 김 회장의 회사가 운송할 수 있도록 배정했다.
특히 1997년 7월 태국에서 IMF 금융위기가 최초로 발생했을 때 씨그린은 외화 수입의 환차익으로 외환위기를 오히려 좋은 기회로 만들어 한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으며 태국의 용선 상당수를 확보, 일감이 넘쳐났다.
끈끈한 인맥과 철저한 사업계획으로 신임을 얻게 된 씨그린은 태국의 모든 항구에 기항하는 해외 벌크화물선주들의 선박대리점으로 지정받고, 연간 100척 이상의 선박 입출항 수속 및 하역작업을 제공하며 바지선으로 소량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사업도 따냈다.
바지선에서 화물을 배에 싣는 장면
태국에서 사업기반을 확보한 김 회장은 1992년에 동서화학과 합작으로 아시아 라브를 설립, 당시 스포츠화의 최대 생산국인 태국에서 전량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신발의 바닥깔창인 라텍스인솔을 제조하여 나이키와 아디다스, 리복에 납품하며 수입대체품으로 시장을 석권했다. 현재는 합작회사의 운영권을 사정상 태국 파트너에 넘겼다.
1998년에는 에버 스플렌디드사를 설립, 태국 창마이 소재 벌꿀농장에서 채취한 생로얄제리를 냉동건조공법으로 연간 2백만 캡슐을 생산,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2005년에는 한국의 STX해운과 합작으로 유니그린 에이전시를 설립, 한국~중국~홍콩~태국을 잇는 컨테이너 화물을 수송하는 정기선을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 SK OIL에서 생산한 선박윤활유를 국내 총판매법인 한유에너지와 49:51% 합작으로 태국에 판매법인을 설립, 현지 해운사 선박에 해상윤활유를 공급,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 2017년 태국 부동산 및 금융자산 투자 및 관리를 위해 J&J에셋을 설립, 호스텔과 부띠크호텔, 금융상품, 보험, 투자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또 서울에 씨그린빌딩을 구입하는 등 빌딩 임대업에도 진출했다.
24대 태국한인회장 맡아, 쓰나미 구호 앞장서 푸미폰 국왕훈장 받아
2005년 1월 1일부터 태국한인회 제24대 회장의 임기가 개시되는 김장열 회장은 당일날 푸켓에서 쓰나미 해일이 덮쳐 사망한 한국인들의 장례식을 치르며 회장에 취임했다. 왜냐하면 2004년 12월 26일 현지시간 오전 7시 59분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서부 해안의 40km 지점에서 발생한 9.3 초대형 해저 지진으로 발생, 태국의 푸켓지방에서 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태국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태국에 사업을 하거나 살고 있는 한인들을 규합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구호 성금 및 물품(약 6억원상당에 달하는)을 탁신 시나왓 당시 총리와 정부기관 등에 전달했다.
그해 12월 1일에는 방콕 도심 수쿰빗 18번가에 방콕 한인 1세대들이 1977년도에 독자적으로 마련한 한인회관을 한국전통양식에 맞게 리모델링하여 한국문화회관으로 재개관했다. 여기에 소요된 비용은 한인들의 모금과 재외동포재단에서 지원한 특별지원금 3만7천불로 충당했다.
재임기간 동안 한인문화회관에서 태국어 강습과 영어 강습, 꽃꽂이 강좌 컴퓨터 강좌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와 함께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자녀 돕기 자선골프대회를 개최, 장학성금을 기탁했다. 설명절과 추석절에는 한인회 처음으로 떡과 과일 등을 교민들에게 베풀며 한인회가 진정한 봉사단체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봉사활동과 쓰나미재해시 구호활동에 대한 감사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2006년 12월에 개최한 한국인의 날 행사 때 태국 왕실로부터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위급(디렉쿠나폰급)의 푸미폰국왕 훈장을 받았다.
태국왕실로부터 국왕의 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해태그룹의 박건배회장과 태국의 타피오카를 복합 사료의 원료로 수입한 효림실업 임종인 회장에 이어 그가 세 번째였다. 이와 함께 태국 불우이웃돕기와 소년소녀 가장돕기 장학금 지원, 태권도 부흥을 위해 후원한 공로로 태국왕실로부터 다년간 감사장을 받았다.
특히 방콕한국국제학교에도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태국한인회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인회장에 출마하면서 미화 7만불의 한인회 운영기금을 공탁했다. 또한, 김 회장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태국 지회장을 맡고 있을 때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이 중국을 거쳐 태국으로 밀입국을 할 경우 태국이민청에서 관리하는 열악한 수용소에서 일정기간 체류하게 되는데, 그때 그는 한인회가 종교단체와 연대하여 환경이 좋은 거처를 마련하여 탈북민들이 좀 더 안락한 거처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음식과 생활용품도 장기간 지원했다.
가족의식으로 똘똘 뭉친 현지화 ... 사원 복지에 역점
용선업을 해보겠다고 태국으로 진출한 외국기업들이 많았으나,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유는 태국의 시장규모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태국의 기업들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탓에 쉽게 거래선을 바꾸려 하지 않는 관행 때문이다.
태국인들은 아열대 기후의 영향을 받은 탓에 행동이 느리고 좀 게으른 편이지만 의리는 강하기 때문에 한번 거래를 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용선업에 대한 실력과 정보만으로 태국 시장을 진출해보겠다고 도전한 기업들도 오랫동안 김 회장과 맺은 끈끈한 인맥을 뚫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전 직원을 태국인으로 현지화 했다. 김 회장이 일년에 몇 개월씩 해외 업무차 장기 출장을 나가더라도 직원들이 맡겨 놓은 업무를 효율적이고 숙련되게 처리하는 등의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창립 33년째를 맞고 있는 회사는 ‘직원이 가족’임을 뜻하는 패밀리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월급 외에도 경조사 비용은 물론, 가족의 장례식 비용도 회사가 부담해주고 있다. 영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고급 인력에게는 고액의 임금은 물론,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김 회장의 경영 철학도 종업원 개개인들이 회사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동안에는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틈틈이 글을 써서 수필가 등단…태권도 공인 4단
김 회장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태권도 수련을 했던 탓에 공인 4단증을 받았다.
대학 시절에는 태권반장으로 후배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했다. 또 다른 취미는 글쓰기다.
유조선 항해사로 취업되어 버뮤다 해역에서 첫 승선 길에 오르던 때에 타고 가던 낡은 소형보트가 열대성 폭풍우를 만나 생사를 오가는 위기 상황에서 기적처럼 살아났던 때를 비롯하여, 태국에 진출하여 사업을 개시할 때 겪었던 기적 체험 등을 글로 쓴 것이 중견 문예지인 ‘국제문예’에서 공모한 수필 부문에 뽑혀 2010년 6월 수필가로 등단했다. 또한 태국에 살면서 겪었던 에피소드 등을 글로 써서 격 월간지인 국제문예지에 기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