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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스토리

2021장한상 대상 : 정영수

대상 :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 고문(싱가포르)


  “기본과 원칙으로 무장한 멋진 촌놈의 성공신화”


▲ 정영수 CJ 글로벌 경영 고문


정영수 CJ글로벌 경영고문(77)은 1970년대부터 글로벌 기업인의 삶을 살고 있다. 1977년부터 한국마벨 홍콩주재원 5년과 싱가포르 법인장 3년을 보낸 뒤 39세에 진맥스를 창업했다. 싱가포르에만 43년째 살고 있는 그는 한때 한국의 비디오-오디오 테이프를 동남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팔았다. 맨손으로 수출 1억불을 일궜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앞길을 개척했고, 계획한 목표의 90% 이상을 달성했다고 자평한다.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성공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체계적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습관화됐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아버지 말씀을 잘 듣자.”로 시작되는 가훈 12가지 항목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도리와 인격을 함양하고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이웃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 가훈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 1일 계획에서 시작해서 3일, 7일, 15일, 한 달, 6개월, 1년 계획 그리고 나서 3년, 5년, 10년, 20년 계획까지 꼼꼼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매 시간을 체크하고 계획을 점검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다만 계획만 세워놓고 반드시 실행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에 반드시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 대학시절 1년에 5%씩 스스로 성장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20년 후에는 100%성장으로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갖고 달려왔다. 이처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노력이 해외사업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 원동력이었다.

예를 들면 2015년 을미년에 세웠던 그의 목표가 ‘예속상교’와 ‘한난상훈’이었다. 봉사와 배려의 마음으로 ‘예의 있는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주자.’라는 뜻으로 목표를 세웠다. 이처럼 매일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부친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정고문이 집필한 책


정 고문은 평소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 정도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하고 실천한다. 이런 계획에 따라 현재 3권의 수필집을 출판했다. 정 고문은 2017년 월간 문학 8월호에 ‘노년의 샘’으로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다.『멋진 촌놈』(2012)과 『70찻잔』(2015), 『밖으로 밖으로 신나는 인생』(2018) 등 3권의 수필집을 펴냈다. 


자원해서 회계 및 재고 관리 업무를 터득해 ‘해외 진출의 꿈’ 성취

공무원 출신이었던 부친과 진주중앙시장에서 양품점을 하던 모친의 슬하에서 부유한 유년시절은 보냈다. 부친이 진주 중앙극장을 인수한 뒤 고 2때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극장 경영이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가세가 기울었다. 부친의 사업부진을 경험 했던 탓에 사업가보다는 엔지니어 또는 공무원의 꿈을 꿨다. 한국 외대 이태리학과에 진학했던 그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부관부에서 자원했다. 1968년 4월 월남으로 파병됐던 그는 현지에서 만났던 기술자들의 사업 현황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경영과 무역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69년 10월 귀국, 복학한 후 무역학과로 전과한 그는 본격적으로 무역을 공부했다. 

졸업 후 동신타이어 회사에 취업했으나, 향후 전자 분야가 유망할 것으로 생각하고 1972년에 구로공단 소재 한국마벨이라는 회사로 옮겼다. 재일교포 출신 김용태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마벨은 TV, 전자계산기, 스피커 등을 제조하는 등 6개 계열사를 갖고 있었으며 국내 수출 18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규모에 걸맞게 한국마벨의 무역부에는 40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해외 근무를 희망하는 꿈을 꾸며 무역실무 회화를 배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별을 보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해외에서 바이어의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든지 받아서 의사소통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야간 근무도 자청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입사 2년 만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1974년 무역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홍콩 주재원을 희망하고 상공부 국제 협력과에서 주관한 알리앙뜨 시험을 봤다. A3 시험지에 영작을 쓰는 과제였다. 평소 글을 쓰는 소질이 있었던 정 고문은 수월하게 영작을 쓴 답안지를 제출, 쉽게 시험을 통과했다. 1977년 홍콩 주재원으로 나가기 전에 회사에 요청을 해서 경리 업무를 별도로 공부했다.



경리부의 텃새가 심했지만, 굴하지 않고 부기 및 결산 공부를 5개월 정도 마친 뒤 대차대조표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또한 홍콩 주재원 생활을 할 때도 소위 노가다 업무로 알려진 창고 업무도 3개월 동안 자원해서 근무했다. 재고관리 업무와   수입·지출 업무를 배웠던 정 고문은 해외 영업하는 과정에서 괄목한 실적을 냈다. 홍콩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늘 1등을 차지했다. 



진주사나이, 진맥스(JINMAX)로 싱가포르에 진출하다

1981년 싱가포르 법인장으로 옮겨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등을 다니며 주문을 받고 납품하는 등 본격적으로 국제무역을 했다. 당시 정 고문이 취급한 전자제품 및 부품은 B2B사업이었다. 한국의 소비재 제품이 알려지지 않았던   싱가포르에서 B2C사업을 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본사에 타 회사의 제품을 선별하여 무역을 대행하는 사업을 해보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본사의 자사 제품만 취급하라는 지시에 창업에 대한 꿈을 갖게 됐다. 


아내의 격려에 힘입어 39세였던 정 고문은 1984년 8월 31일에 자본금 43만 싱가포르 달러로 진맥스(JINMAX)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진맥스는 ‘진주(JIN) 출신인 그가 큰 사업 및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Maximize에서 MAX를 따와서 작명했다. 창업할 때부터 한국 마벨과의 업종이 겹치지 않는 한국제품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그해 10월에 한국전람회에서 비디오/오디오 테이프라는 아이템을 발견했다. 새한미디어의 대학 후배가 해외 영업을 책임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잘되면 영업권을 뺏길 수 있는 대리점이 아닌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으로 동남아 독점판매권 계약을 따냈다. 


<JINMAX 회사 창업 포즈>


상사 주재원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정 고문은 창업 2년 동안 한국의 인지도가 미미하던 시절에 한국산 제품만을 취급했기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에 비디오테이프를 수입할 경우 수량만 4만개에 금액은 8만 불 정도였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현지 판매는 외상이 많은 탓에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인근 나라에 시장개척이 필수였다. 그는 육로로 말레이시아를 샅샅이 뒤지면서 판로개척에 앞장을 섰다. 그는 빨간색 스텔라의 뒷좌석에 테이프 2천개를 가득 싣고 매주 금요일마다 말레이시아로 가서 조호르바루, 바투파하트, 모아, 말라카, 셀랑고르, 쿠알라룸푸르, 이포, 페낭 등 각 도시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을 직접 방문하여 판매했다. 소량판매 이지만 좀 더 좋은 가격으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어 회사 재정에 큰 도움이 됐다. 1985년에만 53번에 걸쳐 주말마다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으며 최고 백화점인 파빌리온 KL백화점에 거래가 성사되어 대량판매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도로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대형 사고를 당할 뻔 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졸면 죽는다’는 각오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

해외에서 ‘졸면 죽는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불철주야로 뛰어다녔다. 당시 일본 브랜드는 시장 점유율 95%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진맥스 라는 브랜드로 비디오 테이프를 판매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일본산 비디오 테이프는 개당 3불 50센트였고 진맥스는 3달러였다. 가격 경쟁력은 있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첫째는 일본산 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생회사가 마케팅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둘째, 일본 등 선발주자들이 가격담합을 하는 바람에 진맥스는 부도 위기에 봉착했다. 

정 고문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등 메가 이벤트를 앞두고 싱가포르 시내버스 등에 대대적인 광고를 쏟아 부었다. 그는 창업 1년 반 만에 홍콩 주재원 생활에서 모은 돈과 융자 30만 불 등 55만 달러를 다 날렸다. 야반도주의 유혹을 이겨내면서 3개월간 불멸의 밤을 보냈다. 생존하기 위해 마케팅 돌파구를 찾던 중 싱가포르의 180개 비디오 렌탈 업체를 직접 공략하기로 했다. B2B에서 B2C로 마케팅 방향을 튼 것이다. 수소문 끝에 월 비디오 테이프 3만개를 소비하는 큰 손을 만났다. 

이 화교 사업가가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는 심리를 이용, 비행기 표는 진맥스가 부담하고 호텔비용은 새한미디어가 분담하는 조건으로 한국에 초청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창희 세한미디어 회장은 샘플로 영화 람보 테이프 수만 개를 복사해줬다. 이창희 회장의 적극적인 후원과 싱가포르 화교 사업가 덕분에 그의 진맥스는 재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새한미디어의 제품 품질이 좋아진 탓에 일본산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됐다. 게다가 1986년 일본 엔화가치가 평가 절하 되면서 1987년부터는 진맥스의 제품이 없어서 팔 수 없을 정도로 대호황을 누렸다. 



 1980년대 후반 노동운동과 임금상승으로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었을 때 싱가포르와 태국, 말레이시아에서 테이프를 조립하여 유럽으로 수출할 기회를 얻었다. 이 때 원료도 팔고 완제품도 판매하면서 월 수백만 개(OEM)를 수출했다. 자체 브랜드로 오디오/비디오 테이프를 동남아는 물론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 선진국에 수출하여 시장을 개척하고 실적을 쌓으면서 싱가포르 마그네틱 부분에서 수출기업 1위와 로컬 국내시장 공급 1위를 달성했다. 대한민국정부로부터 1991년 수출산업포장을 수상했다. 1984년에 시작하여 1991년도 매출 1억불(비디오·오디오 테이프와 원료-팬케이크)을 달성했다. 정 고문이 이 기간 동안 전 세계를 발품을 팔면서 뛴 결과, 지구 150바퀴인 300만 마일을 상회했다. 


<제21회 진주시민상 시상식 수상>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87년 파키스탄에 비디오 테이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카라치에서 라호르를 거쳐 이슬라마바드로 가서 32인승 비행기로 갈아타고 히말라야 K2 가까운 비자왈로 향하던 도중, 칠흑 같은 밤에 몰아치는 천둥과 폭풍으로 1시간 정도 요동을 치는 바람에 극도의 불안감으로 탈진했던 적도 있다. 2013년 5월 미얀마 양곤에서 수도 네피도로 가는 16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를 탔는데, 이륙 후 1시간이 지나 엔진에 불이 붙으면서 죽을 고비도 넘겼다. 


정 고문의 성공비결은 철저한 현지화로 신뢰구축 및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테스트 위주로 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며 자체 브랜드로 신문과 버스 광고를 꾸준히 게재하여 인지도를 견인했으며 해외시장 개척에 올인한 결과, 제조업체와 가격, 디자인 등 긴밀한 협조 및 지원을 이끌어냈던 것이 주효했다.


싱가포르 동포사회와 현지 경제인들이 인정한 대표 한국인

정 고문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는 살아가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번 맺은 인연은 오랫동안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이 때문에 메일 또는 전화를 활용해서 꾸준히 안부를 전한다. 특히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연주 또는 노래, 좋은 글귀를 담은 영상을 카톡 등 SNS을 통하여 매일 한 시간 가량 지인들에게 보내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는 만남을 3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우연의 만남, 둘째는 선택적 만남, 셋째는 운명적인 만남이다. 그는 우연의 만남을 필연적 만남으로 만들기를 좋아하면서 생활의 활력소로 삼고 있다. 예컨대 교포경영인회와 구평회, 단오회 등 다양한 친목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물론, 사우회와 초,중,고등 동창 모임은 물론, 대학교 동창회 모임에도 가급적 참석하려고 애를 쓴다.



그의 글로벌 인맥에는 싱가포르에서 사업 및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지인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희로애락을 나누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997년에 10명의 회원으로 교포경영인회를 만들어 매달 둘째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만나서 친교를 나누고 있다. 구평회는 정 고문이 평화통일자문회의 싱가포르 지회장을 할 때 전 세계 9기 협회 회장과 지회장 18명이 국가에 봉사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결성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발기대회를 갖은 뒤 3년차부터 지금까지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매년 10박 일정으로 세계 여행을 하면서 평화통일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이외에 단오회는 2008년 진주 중고등학교 선후배 12명이 고향 발전에 기여하자는 취지에서 단오날에 첫 모임을 가진 것을 계기로 친목모임을 갖고 있다.

이밖에 정 고문은 폭넓은 해외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184년의 역사를 지닌 싱가포르 국제상공회의소(SICC) 이사에 한국인 최초로 선출됐으며 싱가포르 1만 7천개 기업이 가입한 ‘싱가포르 경제인연합회(SBF)’ 대외협력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에게 그가 구축한 다양한 경제계 인맥을 활용,  도움을 줬다. 또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수상과 고촉통 전 수상을 비롯, 리센룽 총리와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왔다. 베트남 쯔엉떤상 주석과 태국 탁신 전총리 가족, 잉락 친나왓 총리, 미얀마 떼인 세인 대통령,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전 총리,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 등을 만났다.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2009)


이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공로로 2013년 베트남 정부로부터 수교문화훈장을 받았다. 또한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싱가포르 한인회장과 싱가포르 한국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싱가포르 한인회는 자발적으로 동포들이 낸 기부금 1백60만 싱가포르 달러(SGD)를 모금하고 은행대출 등으로 2백 80만 SGD을 마련, 한인회관을 구입해 2008년 3월 1일에 입주했다. 


프리스텝 개별지도부 레슨 광경


특히 싱가포르에서 한인관련 단체 10개의 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소중한 인적 네트워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기록물을 중시했다. 예컨대 1992년 싱가포르 한인회가 창립될 때 한인회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자는 취지에서 계간지 『한누리』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2005년 격월간지로, 2008년에는 월간지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다. 


“내 조국을 사랑하고 내 나라가 먼저인 교육철학”

아들 1명과 딸 2명을 낳아서 길렀던 정 고문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대한 어려움과 기회가 동시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이 지능이 높고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주위 환경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면서 성장하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기 때문에 부모의 세심하고도 지극한 관심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싱가포르로 이사를 온 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영어와 중국어(만달린어)를,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게 했다. 그는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내지 않고 싱가포르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유는 국제학교에 비해 싱가포르학교에서는 영어를 비롯하여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일본어 등 다양한 제2외국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녀교육을 시키는데도 보이지 않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한글을 익히기 위해 집에서 매일 성경 읽기를 빠지지 않고 진행했다. 한글공부를 위해서 한인사회에서 매주 토요일에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보냈다. 비록 토요일 하루였지만 국어와 산수, 사회 등 우리 교과과정에 따른 과목을 한국어로 가르치기 때문에 해외에서 자녀교육을 해야 하는 한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또한 가정에서는 장난감을 통해 한글놀이와 학습을 병행하도록 했다. 여름 및 겨울 방학 때는 자녀들을 무조건 한국으로 보내 2~3개월은 고향 친척집에서 생활하도록 유도했다. 자녀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한국문화와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방학동안 만이라도 우리말을 듣고 말하고 읽고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국교육 및 문화프로그램을 가져와서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모국어를 잘하지 못하면서 외국어를 제아무리 잘한다면 한국인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다중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면 그의 마음이 미어졌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다가 싱가포르 학교로 복귀해 시험을 치루면 성적이 뚝 떨어져서 속상해하는 모습을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 정영수 CJ 글로벌 경영 고문의 가족사진

한동안 아이들이 뒤쳐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힘들어한다는 점을 눈 여겨 보고 주2회 영어와 중국어 개인지도를 시켰다. 영어와 중국어의 성적이 우수하지 않으면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중 언어를 배우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고집을 피워서 모국 방문을 계속해서 보냈다. 자녀들이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도 정부에서 동포 대학생들을 초청하여 국토순례 및 산업시찰 등 조국의 발전상을 알리는 프로그램에는 빠지지 않고 세 자녀를 보냈다. 그 결과 장녀와 차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연세대와 서울대를 보냈다. 큰 딸 수잔 정은 연세대 방송국 아나운서와 아리랑TV를 거쳐 싱가포르 CNA의 간판 앵커를 지냈으며 4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걸로 유명하다. 둘째와 셋째도 한글공부를 위해 국제교육진흥원에서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로 강의하는 4개월 과정을 수료했다. 이들은 1995년 8월에 미국 사립 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계속해서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고 3학년은 물론 대학 1학년 때도 한국에서 와서 서울대 및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 수업을 받았다. 자녀들이 한국어 학습을 꾸준히 한 결과 모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장녀는 싱가포르 호텔 그룹의 며느리로 아들은 한국 대그룹의 사위가 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정고문이 자녀들을 보이지 않게 한민족 정체성을 심어준 훈육의 결과이다. 주위에서 자녀교육을 번듯하게 잘 시켰다는 찬사를 받을 때에 그의 교육철학이 옳았다는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조직관리의 귀재로 마이다스 손으로 불려

정 고문은 2009년부터 CJ글로벌 경영 고문을 맡으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CJ그룹 회장을 대신하여 분신처럼 다닐 때가 많다. 그는 어떤 직책을 맡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정열을 쏟는다. 그는 45세가 되던 1993년 1월에 제5대 싱가포르 한인회의 수장이 되어 ‘사업은 봉사’라는 표어로 열심히 활동했다.

 

▲ 2014년 CJ그룹 장학금 수여식

정 고문은 1989년 싱가포르 한인회 부회장(5년)과 회장(8년)을 맡고 1996년 싱가포르 한국학교 재단이사장(5년) 등 18년 동안을 싱가포르 교민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Tanjong Pagar’에 한인회관을 건립한 것도 8년간 한인회장을 하면서 만들어낸 업적 중 하나다. 매주 토요일에 한글만 가르치던 주말학교를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Lim Ah Woo Road에 있는 단독주택을 구입, 한국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한 것도 그가 기억하는 한인회장으로서의 보람이다.


그는 싱가포르와 동남아 지역에서 만큼은 ‘조직의 귀재’ 또는 ‘마이다스 손’으로 통한다. 그의 조직관리는 자신보다 1살이라도 많으면 무조건 선배 대접을 깍듯이 한다. 반면 1살이라도 적으면 후배 대접을 잘해준다. 이 때문에 그는 후배들 사이에서 정확하지만 닮고 싶은 선배로 통한다. 그의 조직관리는 국내 기업들이 동남아지역으로 진출할 때 등대의 역할은 물론, 기업과 교민들의 지위향상과 함께 한인사회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보이지 않게 해결하는 그의 영향력 때문에 붙여진 애칭이다.

그는 한인회장을 맡으면서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 2개월마다 한인골프대회를  개최했고, 정월에는 부모효도잔치, 5월에는 주부백일장, 학생사생대회를 잇달아 개최했다. 또한 매년 두 번씩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교양강연회를 열었으며 체력단련을 위하여 체육대회와 야유회, 거북이마라톤대회 등 매달 행사를 개최했다. 이밖에 연말 총회에는 송년회를 겸하여 한국에서 유명 연예인을 초청, 푸짐한 행운권 추첨과 더불어 즐거운 송년의 밤을 보냈다. 

그가 모임의 회장을 맡으면 다양한 행사를 기획, 추진하는 바람에 활력을 찾았다. 예컨대 오랫동안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던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을 2006년에 맡았던 정 고문은 회칙을 개정하고 직원을 채용하여 회원들을 위한 행사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자선행사를 잇달아 개최했다. 또한 싱가포르 유관 경제단체 기업인과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한국의 문화예술과 한국기업을 소개하는 만찬행사를 기획,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을 마련, 활력을 되찾았다.

그는 어떤 모임을 운영하든, 비록 소액이지만 장학금과 기부금을 매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2년 싱가포르 한국장학회를 설립하여 유학 온 한국학생과 현지 학생 그리고 베트남 학생들까지 장학금을 줬다. 한민족 인재육성을 위해 1억원의 장학금을 내놓았으며 일본 고베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포들을 위해 성금 1만5천불을 기부했다. 그는 “장학금은 그냥 ‘돈’이 아니라 누군가의 미래를 열어주는 ‘열쇠’이고 누군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마술”이라며 차세대 교육 및 장학 사업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조직관리 비결은 자주 모임을 갖는다. 조직원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협조도 잘 이루어지면 결집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뛰면서 생각하는 인간형으로 유명하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그는 70대 중반에 들어섰지만, 지금까지 한번 인연을 맺은 지인들이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변함없이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즉, 우연의 만남을 필연적 만남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그의 모토는 지식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Knowledge more than others)하고 노력도 다른 사람보다 많이(Affort more than others), 기대는 다른 사람보다 작게(Expect less than others) 갖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