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장재중 수상자
2022년 창업성공스토리
장재중 유니그룹 회장
다국적으로 구성된 글로벌 가족, 한민족 정체성 함양 앞장
장재중 유니그룹 회장은 세계무대로 활동하는 ‘글로벌 가족’이다. 부모님은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조부님을 따라 아버지는 경북 영덕, 어머니는 평북 정주에서 이주 후 만주 봉천에서 1941년 결혼했다. 중일 전쟁 중 누나는 내몽고 땅에서 출생했다. 8.15광복 후 집안은 서울 신촌으로 이주했지만 6.25전쟁 중 형이 죽고 부산으로 피난한 뒤 그가 태어났다. 33년 전인 1984년에 필리핀으로 이주, 정착한 장 회장은 필리핀에 태어난 아들이 캐나다 국적의 교포 아내를 만나서 미국 국적을 갖는 3명의 자녀를 낳아 다국적 가정을 형성했다. 다만 자신을 포함한 자녀와 손자들이 비록 이국땅에 살고 있지만 이방인의 삶이 아니라 한민족의 정체성을 갖추고 살기를 희망한다. 장 회장은 자녀들이 다국적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한민족 공동체’ 정신을 잃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했다. 특히 필리핀에 태어난 자녀들이 현지에 동화되어 한국인의 문화 등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는 막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생활과 한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한국말을 사용하며, 어린이 TV프로그램인 ‘뽀뽀뽀’ 등을 녹화하여 보여줬다. 비록 세계무대에 살고 있지만 한국의 문화와 예의를 가르치는 환경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만학으로 한의사가 된 아버지, 가난의 굴레 못 벗어나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4살에 부산서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이 빈곤했다. 당시 겨울 주식은 중부시장에서 버려진 무청을 모아다가 겨울 내내 햇빛에 말린 시래기가 대부분 이었다. 그는 배재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필동에서 산동네 사는 집까지 물지게로 물을 공급해 주면서 돈을 벌었다. 신문배달을 병행하면서 버는 돈으로 태권도를 배웠으며 고졸 때는 공인 3단을 땄다. 공부를 잘했던 탓에 고등학교 때는 잘 사는 친구 집에 기숙하면서 가정교사를 했다. 53세에 한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6년간 대학을 다녔고 경희대한의대 제1기 졸업생이 되어 59세에 한의사가 됐다. 한의사가 된 지 1년도 못되어 뇌졸중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정 살림은 고스란히 어머니한테 돌아갔다. 장남인 그는 어머니의 노고를 덜어드리기 위해서 대학 4년 내내 장학금과 숙식을 해결해 주는 국립 한국해양대학교에 진학, 해기사가 되어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6개월간 이란-이라크 전쟁 경험... 육상 근무 전환
1971년에 해양대를 졸업한 그는 20세에 (주)대한선박의 해기사가 되어 세계 50개국을 상선을 타고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조국 대한민국 땅과는 전혀 달랐고 외국인들과의 생활은 정말 새로웠다. 그러나 1980년에 발발한 이란-이라크 6년 전쟁이 장 회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가 승선한 배가 이란 코람샤 항구에 입항한 뒤 며칠이 지났을 때 아랍강 양안에서 이란과 이라크 군인들이 야포를 쏘아대면서 양쪽의 도시가 불바다로 변했다.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의 6년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한 것이다. 다행히 강 중앙에 닻을 내린 외국 상선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다. 제네바협정 때문에 그의 상선에 대해서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전 선원들은 배를 포기하고 육상으로 도망가자고 강권했지만, 그는 “차관으로 건조된 선박이니까 국가재산을 절대 포기 하지 말라.”라는 회사의 지시를 지키느라 식량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일 소름끼치는 포격 소리를 듣고 견뎌야 했다.
실전과 같은 상황에서 6개월 만에 하역을 마치고 인명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페르시아만을 빠져나왔다. 당시엔 핸드폰 같은 통신 장비도 없었고 소식도 전달이 잘 안되었던 시기이기에, 장 회장의 생사를 모르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안절부절 못했던 시기였다. 아내는 결사적으로 승선하는 일에 반대했다. 결국 선상생활을 접고 삼미해운에서 육상 근무를 시작했다.
안락한 생활보다 이국에서 도전적인 삶을 구가하다
최연소 선장 경력을 경험한 장 회장은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던 그는 당시 선박회사로는 규모가 제일 큰 삼미해운 싱가폴 주재원을 마치고 1984년 본사 운항과장으로 영전했다. 본사의 변화가 없는 생활을 보내던 그의 눈에 샐러리맨의 노후가 그려졌다. 50세가 되면 상무로 승진할 것이고 고작해야 서너 평의 사무실에서 노후를 마쳐야 하는 미래가 왠지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다. 내가 경험하고 보아왔던 세계는 넓었고 한번 해볼 만했다. 이러한 생각에 잡혀 있을 때 필리핀 내 프랑스 선박회사인 씨우드쉬핑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새로운 세계에서 도전하겠다고 다짐하고 마닐라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안정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게 두려웠지만, 아내의 동의를 얻어 과감하게 도전했다.
장 회장이 1984년 7월에 마닐라로 이주할 때 필리핀 정국은 작고한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등에 항거하는 국민들의 데모가 빈번하였고, 체포 구금과 민간인 살해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다만 경제는 좋았던 탓에 프랑스 필리핀 법인의 2인자로 채용됐던 장 회장은 회사 기금으로 선박을 장기 용선하여 처음으로 필리핀~동남아․ 지중해 /유럽 정기선을 비롯, 필리핀~호주 등 정기항로를 개척했다. 회사 오너는 프랑스에 있었고, 장 회장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하고 싶은 분야에 투자하면서 회사 경영을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회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운영을 어떻게 하는지 등 회사 경영 전반에 걸쳐 노하우 등을 고용된 남의 회사에서 남의 돈으로 실제 해보며 배웠다. 장 회장은 어디를 가도 그 사업체는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며 알아가려고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남보다 많았다
민중혁명의 성공으로 정국 혼란 가속 중 창업
1986년 2월 민중 쿠데타의 성공으로 마르코스가 퇴진하기 전까지 필리핀 정국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대혼란이 초래됐다. 미국정부는 1985년 12월에 필리핀 국가위험사태로 필리핀 거주 미국인들은 전부 필리핀을 철수하라는 국가 명령을 하달했다. 미 대사관과 클라크 공군기지, 수빅 해군기지 등을 통해 철수했다. 미국인이 철수하니 유럽인들도 따라 철수하게 되었고, 그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하던 사업체 또는 부동산 등을 헐값에 현지인에게 넘기고 필리핀을 떠났다.
장 회장이 근무하던 잘 나가던 프랑스 회사도 하루아침에 폐쇄됐다. 외국계 해운회사들은 모두 철수했다. 하지만 장 회장은 함께 일하던 필리핀 직원 몇 명을 고용하여 유니십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부색으로 차별 받는 미국 또는 유럽엔 가고 싶지 않았던 장 회장은, 동남아에서 한국인은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여겼다. 민중혁명이 성공하고 새로운 정부에 코리 아키노 여자 대통령이 추대되고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국제 관계, 특히 경제는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겁 없이 창업을 했지만 처음에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많이 떨었다. 하지만 곧 안정이 회복되고 경제가 다시 돌면서, 외국 선주들은 도망가지 않고 필리핀에 남아 있는 장 회장의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 이처럼 위기가 있으면 기회가 주어진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와 기다림의 훈련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만약 겁을 먹고 멀리 도망가 창업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유니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인등기 이름 빌려준 현지인, 총으로 협박, 강제출국 시도 무위
유니십의 사업은 짧은 시간 동안 급성장했다. 어수선한 정국 때문에 값이 뚝 떨어진 부동산도 구입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회사를 창업할 때 지분은 없지만 법인 명의를 빌려준 중국계 필리핀 파트너가 자신의 처남을 장 회장의 회사 경리로 취직을 부탁, 채용했다. 이를 기점으로 회사 내부 사정을 알게된 중국인 파트너가 총을 든 군인 2명을 회사로 보내 장 회장을 강제 출국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트너가 내 회사를 자기가 60% 대주주이니 강제로 인수하겠다며 당장 필리핀을 떠나라고 협박했다. 생존에 대한 무서움이 들었다. 파트너는 혁명정부 이전부터 원목을 수출하는 큰 사업가였으나 욕심이 끝이 없었다. 장 회장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비굴할 정도로 사정을 했고 기독교인인 중국인 부인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냉담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결국 구입한 부동산은 물론 은행 통장과 사무실 등을 강탈당하고 유니십의 차명지분과 사용했던 전화번호, 책상만 갖고 나와 별도 사무실을 차리고 다시 조그맣게 시작하였다.
회사를 강탈당한 뒤 장 회장은 배반감에 매일 술을 마시고 일 중독에 빠져 살았던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저런 악종을 안 데려가느냐.”라고 울부짖으면서 기도했다. 평상시 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던 그는 이때 절실하게 간구했다.
재산 강탈한 파트너 죽은 사건 목도 후 하나님의 실존 깨달아
초심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던 중 필리핀 파트너가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 사고가 마치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같이 느껴져 놀랍고 무서웠다. 그 이후 절대 남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파트너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부인과 처남과 화해한 뒤 지금도 친구로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그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야자열매 안에 있는 하얀 과육(일명 코프라)을 무역하면서 부터이다. 코프라는 야자유의 원료다. 장 회장은 해운업을 하면서 무역업을 1988년부터 10년간 한국의 동산유지와 동서식품 등에 코프라를 독점적으로 납품했다. 코프라를 확보하기 위해 필리핀 전역을 돌면서 화교 필리핀의 지방 유력자들한테서 구매했다. 그가 엄청난 코프라를 구매하는 빅바이어가 되면서 가는 곳마다 칙사 대접을 받았다. 연 수출 규모가 2천만 달러였다. 그는 배를 용선, 항로에 투입하면서 회사가 급격히 발전했다. 비록 현재 코프라 사업은 하지 않지만 그때 맺었던 현지인 사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외에서 자리를 잡는 방법은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자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운-물류업에서 IT 스타트업과 영화감독, 사회사업가 변신
해운 선박대리점과 용선운항사인 유니십을 창업할 때만 해도 “1년을 잘 버틸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 37년 동안 필리핀의 해운 물동량 15%를 처리하는 종합해운물류 유니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유니그룹의 계열사는 아티코트란스(종합물류회사), 제이티카고핸들링(항만하역회사)와 카르카엑스(필리핀전국트럭운송업), 피소페이(페이먼트게이트), 씨버시티(강상증감현실제조회사)와 비지투어(필리핀 국내여행업) 등 11개 계열사와 나환자 등 소외된 이웃의 재활을 돕는 NGO재단법인 소록유니재단, 민다나오에 망고라디오 기독교방송국 등이 있다. 사업 초기에는 일반 벌크화물의 운송이 주종이었으나 지금은 국제간 컨테이너 운송과 해운 선박회사와 무역회사, 항만하역업 그리고 IT Tech 회사들로 다양한 분야를 개척했다.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스타트 업체를 발굴, 육성하고 있으며 영화감독으로 지금은 소록단편영화제로 필리핀에서 영화제작자들을 응원하고 있다. 그는 2004년 한센병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천국의 요람> 영화를 제작, 뉴욕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다.
장 회장은 필리핀에 사는 현지인들이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한때 자신도 외국 투자자로 필리핀 현지인을 고용자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유니그룹의 주주는 필리핀 직원들이며 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그는 계열사의 주식을 20~40% 이하만 갖고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배정해주었다. 예전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봉급을 줬지만, 지금은 그들이 장 회장에게 봉급과 배당금을 주는 방향으로 바꿨다. 유니그룹 직원들은 장 회장을 회사의 최고경영자보다 자신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가장의 역할을 해주는 ‘따따이(아버지)’라고 부른다.
한센인의 대부 천대성 목사 만나 필리핀 한센인 사역 나서
1993년 태국 방콕에 출장을 갔다가 마닐라로 돌아오는 공항 대합실에서 우연히 부산 음성 나환자 마을인 상애원을 운영하는 고 천대성 목사를 만났다. 어렸을 때 한센인 관련 괴상한 소문을 듣고 자랐던 탓에 선입견이 좋지 않았던 장 회장은 필리핀 국립나병원에서 만난 한센인의 삶을 만나면서 본인의 삶을 돌아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의 비참한 삶을 대하며 내가 번돈이라고 함부로 그 동안 나 자신의 향락을 위하여 쓴 것들에 대한 미안한 감이 들고, 이들을 통하여 진정으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1996년에 사마리아 한센인 재활센터 건축을 마치고 개소한 뒤 20년간 약 80명의 음성 한센인들의 재활을 위해 의식주를 제공했다. 그는 2002년에 소록유니재단을 설립, 한국형 한센인 공동체인 음성 나환자 정착촌을 모방하여 한센인의 이주 및 정착, 직업 및 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 법인은 15,000평 토지에 소록유니 정착촌 마을을 건립하여 한센인을 이주시키고 집과 일거리를 마련해 준 뒤 5년 후에는 완전 자립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좋은 결실을 맺었다. 이 법인은 '소외된 이웃이 없는 필리핀'을 만들자는 비전으로. 한센인 외에 노숙자는 물론, 소수종족까지로 지원범위를 넓혔다.
소록유니재단은 단기 긴급구호 프로젝트로 쉼터와 음식, 의료지원을 하거나, 한센인 및 노숙자, 실향민 가족, 불우 어린이와 원주민을 위해 자립교육과 기회균등화를 지원하며, 재활치료와 수혜자들의 수준에 맞는 사회적 기능과 독립성을 함양하는 역량 강화 및 삶의 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4가지 핵심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다.
소록유니재단의 지원금 70%, 필리핀인들이 동참
소록유니재단은 필리핀 정부의 위탁을 받아서 연 8,000명의 수혜자를 돌보는 필리핀 1급 NGO 단체로 인정받고 있다. 법인의 운영비는 초기 유니그룹의 수익 가운데 십일조로 조달했다. 나중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사역으로 지원금 때문에 회사 경영에 지장을 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필리핀 기업과 사람들이 약 70% 지원금에 동참하고 있다.
장 회장은 한국의 한센인 자립마을 성공 케이스를 벤치마킹하여 필리핀 케손주 신안토니오시 3만 평 부지를 구입. 한센인 100세대 규모의 자립마을을 건설, 운영했다. 또한 마닐라에 소록유니재단 명의의 5층 건물을 건축, 한센인의 2세들이 커피숍과 빨래방 등을 경영함으로써 독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밖에 영화제와 자선골프 대회를 개최, 후원금을 모금함으로써 경비를 충당했다.
소록유니재단은 10년 동안 매주 노숙자 약 300~500명을 대상으로 급식, 의료지원 그리고 이발봉사를 했다. 장회장은 지난 15년동안 노숙자들의 이발을 직접하는 지금은 일류 이발사가 되었다. 또한 직원들과 함께 매주 800개의 햄버거를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 밖에 필리핀에서 카지노를 하다가 재산을 탕진한 불법체류자 200명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귀국 프로젝트를 마닐라 새생명교회와 함께 하였다.
이익 분배의 1/3법칙을 실행, 사람을 얻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며 장로인 장 회장은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임할 수 있는 사업장을 만들고 직원들이 회사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업 초기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이익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직원들이 그를 먹여 살린다는 사고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창안한 이익 분배 1/3법칙을 실행하고 있다. 세금을 뗀 순수익에서 1/3 주주배당금과 1/3 전 직원 보너스로, 1/3 차기 운영자금을 축적하는 등 수 십 년째 실천하고 있다. 직원들이 다니고 싶은 직장문화를 만드는데 힘쓰고, 직원 한사람 한사람이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야 모든 직원들이 열정을 가지고 일에 임할 수가 있다.
65세 되던 해에 필리핀 IT 테크 젊은이들을 만나서 IT 회사 5개를 창업했다. 스타트업을 육성하면서 20~30대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대신 그들에게 돈을 버는 방법과 돈을 버는 목적, 회사 운영법을 가르치고 자립때까지 자금 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고 있다.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자긍심 고취
1986년 필리핀 한인회에 총무로 인연을 맺어서 이사와 회장 그리고 이사장직을 마치는데 26년이 걸렸다. 그는 한인회장 때 '좋은 이웃인 한국인' 이란 표어를 내걸고 스티커를 제작하여 모든 유흥업소와 공공장소에 부착했다. 이는 한국인이 필리핀에 좋은 이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야 안전을 지킬수 있다고 생각하여 지속적으로 펼친 캠페인이다. 2003년에 한인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한 해 교민 30여명 이상이 피살당하면서 필리핀의 이미지가 아주 나빠졌기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선박해운회사를 경영하면서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인 사업가들과 모임을 가졌다. 하나는 필리핀 한국상공회의소와 세계한인무역협회 필리핀 지부 운영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필리핀 지부 회장을 역임한 뒤 필리핀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연임했다. 그는 830여 개 회원사가 가입한 한인상공회의소의 수장을 맡아서 필리핀 정부의 관리와 국회의원들과 협의를 통해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노동환경 및 기업 운영에 대한 법과 시행령을 개선하는 데 앞장을 섰다. 한국 출신 기업인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개선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필리핀 한국국제학교 설립에 이사장으로 참여했으며 교민 2세들에게 한국어 교육과 문화를 알려주는 등 한국인 정체성 함양에 앞장섰다. 모든 한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 나서서 봉사하는 데 신경을 썼다.
은퇴하지 않고 3대 삶의 목표 성취에 앞장서겠다 다짐
장 회장은 70세가 넘었지만 열정은 아직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설정한 삶의 목표는 첫째, 일자리 창출과 둘째, 복음 전파와 셋째, 소외된 이웃사랑을 나누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은퇴를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일의 양을 줄여가되 계속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약 400명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에 근무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에 열심을 다한다. 아침 8시에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근무를 시작한다. 비지니스 선교를 지향한다. 소외된 이웃사랑도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는 최근 조국의 청년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우선 밖으로 나가지 못한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가 70살 넘게 해외에서 살아보본 경험은 ‘조국의 청년들이 해외 어느 나라에 갖다 놓아도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의 외모, 받은 교육, 끈기와 노력이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본다. 눈을 세계로 돌려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 어느 나라에 진출한다면 그 외국땅 외국인 기업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유일한 한국인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한국 땅에선 같은 젊은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경쟁하는게 너무 심하고, 그는 몇백만 명 중에 한명에 불과하다. 그 단적인 사례가 손홍민 축구 선수다. 그는 유럽의 축구장에서도 똑같이 90분간 축구장에서 뛰고 있지만, 수입은 한국과 100배 차이가 날 정도로 많이 받고 있다. 왜 일까? 손홍민은 단지 플레이 하는 장소만 바꾸었을 뿐이라고 한다. 장 회장은 결코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2022년 장재중 수상자
2022년 창업성공스토리
장재중 유니그룹 회장
다국적으로 구성된 글로벌 가족, 한민족 정체성 함양 앞장
장재중 유니그룹 회장은 세계무대로 활동하는 ‘글로벌 가족’이다. 부모님은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조부님을 따라 아버지는 경북 영덕, 어머니는 평북 정주에서 이주 후 만주 봉천에서 1941년 결혼했다. 중일 전쟁 중 누나는 내몽고 땅에서 출생했다. 8.15광복 후 집안은 서울 신촌으로 이주했지만 6.25전쟁 중 형이 죽고 부산으로 피난한 뒤 그가 태어났다. 33년 전인 1984년에 필리핀으로 이주, 정착한 장 회장은 필리핀에 태어난 아들이 캐나다 국적의 교포 아내를 만나서 미국 국적을 갖는 3명의 자녀를 낳아 다국적 가정을 형성했다. 다만 자신을 포함한 자녀와 손자들이 비록 이국땅에 살고 있지만 이방인의 삶이 아니라 한민족의 정체성을 갖추고 살기를 희망한다. 장 회장은 자녀들이 다국적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한민족 공동체’ 정신을 잃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했다. 특히 필리핀에 태어난 자녀들이 현지에 동화되어 한국인의 문화 등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는 막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생활과 한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한국말을 사용하며, 어린이 TV프로그램인 ‘뽀뽀뽀’ 등을 녹화하여 보여줬다. 비록 세계무대에 살고 있지만 한국의 문화와 예의를 가르치는 환경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만학으로 한의사가 된 아버지, 가난의 굴레 못 벗어나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4살에 부산서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이 빈곤했다. 당시 겨울 주식은 중부시장에서 버려진 무청을 모아다가 겨울 내내 햇빛에 말린 시래기가 대부분 이었다. 그는 배재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필동에서 산동네 사는 집까지 물지게로 물을 공급해 주면서 돈을 벌었다. 신문배달을 병행하면서 버는 돈으로 태권도를 배웠으며 고졸 때는 공인 3단을 땄다. 공부를 잘했던 탓에 고등학교 때는 잘 사는 친구 집에 기숙하면서 가정교사를 했다. 53세에 한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6년간 대학을 다녔고 경희대한의대 제1기 졸업생이 되어 59세에 한의사가 됐다. 한의사가 된 지 1년도 못되어 뇌졸중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정 살림은 고스란히 어머니한테 돌아갔다. 장남인 그는 어머니의 노고를 덜어드리기 위해서 대학 4년 내내 장학금과 숙식을 해결해 주는 국립 한국해양대학교에 진학, 해기사가 되어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6개월간 이란-이라크 전쟁 경험... 육상 근무 전환
1971년에 해양대를 졸업한 그는 20세에 (주)대한선박의 해기사가 되어 세계 50개국을 상선을 타고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조국 대한민국 땅과는 전혀 달랐고 외국인들과의 생활은 정말 새로웠다. 그러나 1980년에 발발한 이란-이라크 6년 전쟁이 장 회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가 승선한 배가 이란 코람샤 항구에 입항한 뒤 며칠이 지났을 때 아랍강 양안에서 이란과 이라크 군인들이 야포를 쏘아대면서 양쪽의 도시가 불바다로 변했다.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의 6년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한 것이다. 다행히 강 중앙에 닻을 내린 외국 상선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다. 제네바협정 때문에 그의 상선에 대해서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전 선원들은 배를 포기하고 육상으로 도망가자고 강권했지만, 그는 “차관으로 건조된 선박이니까 국가재산을 절대 포기 하지 말라.”라는 회사의 지시를 지키느라 식량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일 소름끼치는 포격 소리를 듣고 견뎌야 했다.
실전과 같은 상황에서 6개월 만에 하역을 마치고 인명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페르시아만을 빠져나왔다. 당시엔 핸드폰 같은 통신 장비도 없었고 소식도 전달이 잘 안되었던 시기이기에, 장 회장의 생사를 모르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안절부절 못했던 시기였다. 아내는 결사적으로 승선하는 일에 반대했다. 결국 선상생활을 접고 삼미해운에서 육상 근무를 시작했다.
안락한 생활보다 이국에서 도전적인 삶을 구가하다
최연소 선장 경력을 경험한 장 회장은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던 그는 당시 선박회사로는 규모가 제일 큰 삼미해운 싱가폴 주재원을 마치고 1984년 본사 운항과장으로 영전했다. 본사의 변화가 없는 생활을 보내던 그의 눈에 샐러리맨의 노후가 그려졌다. 50세가 되면 상무로 승진할 것이고 고작해야 서너 평의 사무실에서 노후를 마쳐야 하는 미래가 왠지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다. 내가 경험하고 보아왔던 세계는 넓었고 한번 해볼 만했다. 이러한 생각에 잡혀 있을 때 필리핀 내 프랑스 선박회사인 씨우드쉬핑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새로운 세계에서 도전하겠다고 다짐하고 마닐라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안정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게 두려웠지만, 아내의 동의를 얻어 과감하게 도전했다.
장 회장이 1984년 7월에 마닐라로 이주할 때 필리핀 정국은 작고한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등에 항거하는 국민들의 데모가 빈번하였고, 체포 구금과 민간인 살해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다만 경제는 좋았던 탓에 프랑스 필리핀 법인의 2인자로 채용됐던 장 회장은 회사 기금으로 선박을 장기 용선하여 처음으로 필리핀~동남아․ 지중해 /유럽 정기선을 비롯, 필리핀~호주 등 정기항로를 개척했다. 회사 오너는 프랑스에 있었고, 장 회장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하고 싶은 분야에 투자하면서 회사 경영을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회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운영을 어떻게 하는지 등 회사 경영 전반에 걸쳐 노하우 등을 고용된 남의 회사에서 남의 돈으로 실제 해보며 배웠다. 장 회장은 어디를 가도 그 사업체는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며 알아가려고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남보다 많았다
민중혁명의 성공으로 정국 혼란 가속 중 창업
1986년 2월 민중 쿠데타의 성공으로 마르코스가 퇴진하기 전까지 필리핀 정국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대혼란이 초래됐다. 미국정부는 1985년 12월에 필리핀 국가위험사태로 필리핀 거주 미국인들은 전부 필리핀을 철수하라는 국가 명령을 하달했다. 미 대사관과 클라크 공군기지, 수빅 해군기지 등을 통해 철수했다. 미국인이 철수하니 유럽인들도 따라 철수하게 되었고, 그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하던 사업체 또는 부동산 등을 헐값에 현지인에게 넘기고 필리핀을 떠났다.
장 회장이 근무하던 잘 나가던 프랑스 회사도 하루아침에 폐쇄됐다. 외국계 해운회사들은 모두 철수했다. 하지만 장 회장은 함께 일하던 필리핀 직원 몇 명을 고용하여 유니십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부색으로 차별 받는 미국 또는 유럽엔 가고 싶지 않았던 장 회장은, 동남아에서 한국인은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여겼다. 민중혁명이 성공하고 새로운 정부에 코리 아키노 여자 대통령이 추대되고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국제 관계, 특히 경제는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겁 없이 창업을 했지만 처음에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많이 떨었다. 하지만 곧 안정이 회복되고 경제가 다시 돌면서, 외국 선주들은 도망가지 않고 필리핀에 남아 있는 장 회장의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 이처럼 위기가 있으면 기회가 주어진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와 기다림의 훈련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만약 겁을 먹고 멀리 도망가 창업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유니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인등기 이름 빌려준 현지인, 총으로 협박, 강제출국 시도 무위
유니십의 사업은 짧은 시간 동안 급성장했다. 어수선한 정국 때문에 값이 뚝 떨어진 부동산도 구입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회사를 창업할 때 지분은 없지만 법인 명의를 빌려준 중국계 필리핀 파트너가 자신의 처남을 장 회장의 회사 경리로 취직을 부탁, 채용했다. 이를 기점으로 회사 내부 사정을 알게된 중국인 파트너가 총을 든 군인 2명을 회사로 보내 장 회장을 강제 출국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트너가 내 회사를 자기가 60% 대주주이니 강제로 인수하겠다며 당장 필리핀을 떠나라고 협박했다. 생존에 대한 무서움이 들었다. 파트너는 혁명정부 이전부터 원목을 수출하는 큰 사업가였으나 욕심이 끝이 없었다. 장 회장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비굴할 정도로 사정을 했고 기독교인인 중국인 부인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냉담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결국 구입한 부동산은 물론 은행 통장과 사무실 등을 강탈당하고 유니십의 차명지분과 사용했던 전화번호, 책상만 갖고 나와 별도 사무실을 차리고 다시 조그맣게 시작하였다.
회사를 강탈당한 뒤 장 회장은 배반감에 매일 술을 마시고 일 중독에 빠져 살았던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저런 악종을 안 데려가느냐.”라고 울부짖으면서 기도했다. 평상시 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던 그는 이때 절실하게 간구했다.
재산 강탈한 파트너 죽은 사건 목도 후 하나님의 실존 깨달아
초심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던 중 필리핀 파트너가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 사고가 마치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같이 느껴져 놀랍고 무서웠다. 그 이후 절대 남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파트너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부인과 처남과 화해한 뒤 지금도 친구로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그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야자열매 안에 있는 하얀 과육(일명 코프라)을 무역하면서 부터이다. 코프라는 야자유의 원료다. 장 회장은 해운업을 하면서 무역업을 1988년부터 10년간 한국의 동산유지와 동서식품 등에 코프라를 독점적으로 납품했다. 코프라를 확보하기 위해 필리핀 전역을 돌면서 화교 필리핀의 지방 유력자들한테서 구매했다. 그가 엄청난 코프라를 구매하는 빅바이어가 되면서 가는 곳마다 칙사 대접을 받았다. 연 수출 규모가 2천만 달러였다. 그는 배를 용선, 항로에 투입하면서 회사가 급격히 발전했다. 비록 현재 코프라 사업은 하지 않지만 그때 맺었던 현지인 사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외에서 자리를 잡는 방법은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자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운-물류업에서 IT 스타트업과 영화감독, 사회사업가 변신
해운 선박대리점과 용선운항사인 유니십을 창업할 때만 해도 “1년을 잘 버틸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 37년 동안 필리핀의 해운 물동량 15%를 처리하는 종합해운물류 유니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유니그룹의 계열사는 아티코트란스(종합물류회사), 제이티카고핸들링(항만하역회사)와 카르카엑스(필리핀전국트럭운송업), 피소페이(페이먼트게이트), 씨버시티(강상증감현실제조회사)와 비지투어(필리핀 국내여행업) 등 11개 계열사와 나환자 등 소외된 이웃의 재활을 돕는 NGO재단법인 소록유니재단, 민다나오에 망고라디오 기독교방송국 등이 있다. 사업 초기에는 일반 벌크화물의 운송이 주종이었으나 지금은 국제간 컨테이너 운송과 해운 선박회사와 무역회사, 항만하역업 그리고 IT Tech 회사들로 다양한 분야를 개척했다.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스타트 업체를 발굴, 육성하고 있으며 영화감독으로 지금은 소록단편영화제로 필리핀에서 영화제작자들을 응원하고 있다. 그는 2004년 한센병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천국의 요람> 영화를 제작, 뉴욕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다.
장 회장은 필리핀에 사는 현지인들이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한때 자신도 외국 투자자로 필리핀 현지인을 고용자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유니그룹의 주주는 필리핀 직원들이며 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그는 계열사의 주식을 20~40% 이하만 갖고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배정해주었다. 예전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봉급을 줬지만, 지금은 그들이 장 회장에게 봉급과 배당금을 주는 방향으로 바꿨다. 유니그룹 직원들은 장 회장을 회사의 최고경영자보다 자신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가장의 역할을 해주는 ‘따따이(아버지)’라고 부른다.
한센인의 대부 천대성 목사 만나 필리핀 한센인 사역 나서
1993년 태국 방콕에 출장을 갔다가 마닐라로 돌아오는 공항 대합실에서 우연히 부산 음성 나환자 마을인 상애원을 운영하는 고 천대성 목사를 만났다. 어렸을 때 한센인 관련 괴상한 소문을 듣고 자랐던 탓에 선입견이 좋지 않았던 장 회장은 필리핀 국립나병원에서 만난 한센인의 삶을 만나면서 본인의 삶을 돌아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의 비참한 삶을 대하며 내가 번돈이라고 함부로 그 동안 나 자신의 향락을 위하여 쓴 것들에 대한 미안한 감이 들고, 이들을 통하여 진정으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1996년에 사마리아 한센인 재활센터 건축을 마치고 개소한 뒤 20년간 약 80명의 음성 한센인들의 재활을 위해 의식주를 제공했다. 그는 2002년에 소록유니재단을 설립, 한국형 한센인 공동체인 음성 나환자 정착촌을 모방하여 한센인의 이주 및 정착, 직업 및 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 법인은 15,000평 토지에 소록유니 정착촌 마을을 건립하여 한센인을 이주시키고 집과 일거리를 마련해 준 뒤 5년 후에는 완전 자립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좋은 결실을 맺었다. 이 법인은 '소외된 이웃이 없는 필리핀'을 만들자는 비전으로. 한센인 외에 노숙자는 물론, 소수종족까지로 지원범위를 넓혔다.
소록유니재단은 단기 긴급구호 프로젝트로 쉼터와 음식, 의료지원을 하거나, 한센인 및 노숙자, 실향민 가족, 불우 어린이와 원주민을 위해 자립교육과 기회균등화를 지원하며, 재활치료와 수혜자들의 수준에 맞는 사회적 기능과 독립성을 함양하는 역량 강화 및 삶의 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4가지 핵심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다.
소록유니재단의 지원금 70%, 필리핀인들이 동참
소록유니재단은 필리핀 정부의 위탁을 받아서 연 8,000명의 수혜자를 돌보는 필리핀 1급 NGO 단체로 인정받고 있다. 법인의 운영비는 초기 유니그룹의 수익 가운데 십일조로 조달했다. 나중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사역으로 지원금 때문에 회사 경영에 지장을 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필리핀 기업과 사람들이 약 70% 지원금에 동참하고 있다.
장 회장은 한국의 한센인 자립마을 성공 케이스를 벤치마킹하여 필리핀 케손주 신안토니오시 3만 평 부지를 구입. 한센인 100세대 규모의 자립마을을 건설, 운영했다. 또한 마닐라에 소록유니재단 명의의 5층 건물을 건축, 한센인의 2세들이 커피숍과 빨래방 등을 경영함으로써 독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밖에 영화제와 자선골프 대회를 개최, 후원금을 모금함으로써 경비를 충당했다.
소록유니재단은 10년 동안 매주 노숙자 약 300~500명을 대상으로 급식, 의료지원 그리고 이발봉사를 했다. 장회장은 지난 15년동안 노숙자들의 이발을 직접하는 지금은 일류 이발사가 되었다. 또한 직원들과 함께 매주 800개의 햄버거를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 밖에 필리핀에서 카지노를 하다가 재산을 탕진한 불법체류자 200명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귀국 프로젝트를 마닐라 새생명교회와 함께 하였다.
이익 분배의 1/3법칙을 실행, 사람을 얻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며 장로인 장 회장은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임할 수 있는 사업장을 만들고 직원들이 회사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업 초기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이익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직원들이 그를 먹여 살린다는 사고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창안한 이익 분배 1/3법칙을 실행하고 있다. 세금을 뗀 순수익에서 1/3 주주배당금과 1/3 전 직원 보너스로, 1/3 차기 운영자금을 축적하는 등 수 십 년째 실천하고 있다. 직원들이 다니고 싶은 직장문화를 만드는데 힘쓰고, 직원 한사람 한사람이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야 모든 직원들이 열정을 가지고 일에 임할 수가 있다.
65세 되던 해에 필리핀 IT 테크 젊은이들을 만나서 IT 회사 5개를 창업했다. 스타트업을 육성하면서 20~30대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대신 그들에게 돈을 버는 방법과 돈을 버는 목적, 회사 운영법을 가르치고 자립때까지 자금 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고 있다.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자긍심 고취
1986년 필리핀 한인회에 총무로 인연을 맺어서 이사와 회장 그리고 이사장직을 마치는데 26년이 걸렸다. 그는 한인회장 때 '좋은 이웃인 한국인' 이란 표어를 내걸고 스티커를 제작하여 모든 유흥업소와 공공장소에 부착했다. 이는 한국인이 필리핀에 좋은 이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야 안전을 지킬수 있다고 생각하여 지속적으로 펼친 캠페인이다. 2003년에 한인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한 해 교민 30여명 이상이 피살당하면서 필리핀의 이미지가 아주 나빠졌기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선박해운회사를 경영하면서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인 사업가들과 모임을 가졌다. 하나는 필리핀 한국상공회의소와 세계한인무역협회 필리핀 지부 운영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필리핀 지부 회장을 역임한 뒤 필리핀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연임했다. 그는 830여 개 회원사가 가입한 한인상공회의소의 수장을 맡아서 필리핀 정부의 관리와 국회의원들과 협의를 통해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노동환경 및 기업 운영에 대한 법과 시행령을 개선하는 데 앞장을 섰다. 한국 출신 기업인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개선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필리핀 한국국제학교 설립에 이사장으로 참여했으며 교민 2세들에게 한국어 교육과 문화를 알려주는 등 한국인 정체성 함양에 앞장섰다. 모든 한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 나서서 봉사하는 데 신경을 썼다.
은퇴하지 않고 3대 삶의 목표 성취에 앞장서겠다 다짐
장 회장은 70세가 넘었지만 열정은 아직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설정한 삶의 목표는 첫째, 일자리 창출과 둘째, 복음 전파와 셋째, 소외된 이웃사랑을 나누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은퇴를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일의 양을 줄여가되 계속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약 400명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에 근무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에 열심을 다한다. 아침 8시에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근무를 시작한다. 비지니스 선교를 지향한다. 소외된 이웃사랑도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는 최근 조국의 청년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우선 밖으로 나가지 못한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가 70살 넘게 해외에서 살아보본 경험은 ‘조국의 청년들이 해외 어느 나라에 갖다 놓아도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의 외모, 받은 교육, 끈기와 노력이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본다. 눈을 세계로 돌려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 어느 나라에 진출한다면 그 외국땅 외국인 기업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유일한 한국인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한국 땅에선 같은 젊은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경쟁하는게 너무 심하고, 그는 몇백만 명 중에 한명에 불과하다. 그 단적인 사례가 손홍민 축구 선수다. 그는 유럽의 축구장에서도 똑같이 90분간 축구장에서 뛰고 있지만, 수입은 한국과 100배 차이가 날 정도로 많이 받고 있다. 왜 일까? 손홍민은 단지 플레이 하는 장소만 바꾸었을 뿐이라고 한다. 장 회장은 결코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