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최경주 수상자
2022년 창업성공스토리
최경주 프로골퍼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는 교훈
‘코리아 탱크’로 유명한 최경주 이사장은 1970년 완도에서 미역 양식과 농사를 짓는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까지 아버지를 도와 갯벌에서 물고기를 담아 왔고, 밭에 거둬 놓은 콩도 챙겨오고, 소여물도 베어 왔다. 이처럼 아버지를 도와 산과 바다를 돌아다녔던 것이 탄탄한 하체근육을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경주 프로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대회가 있든 없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연습장에서 지독한 연습을 한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퍼팅 연습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노력이 쌓여 한국 남자골프 개척자로, 미국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며 걸어온 길은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렇게 최경주 프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남자골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고 강조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 모자란 점을 알면 자신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적인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살을 에는 듯한 바닷바람에 맨손으로 바닷물 속의 미역을 따던 아버지의 근면함과 성실성에서 강인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공부는 내 길이 아니고 운동으로 승부를 걸자고 결심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최경주 이사장은 등록금 면제를 받기 위해 역도부에 들어갔다. 이왕 역도를 선택했으니, 큰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었다. 연습을 많이 해도 생각만큼 실력이 늘어나지 않았다. 그의 체형이 역도를 하기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그만두게 되었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소홀했던 공부를 단시간에 따라잡는 것 또한 어려움이 있었다. 영어 수업에 참석하여 교과서를 편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최 이사장은 “공부는 내 길이 아니다. 운동으로 승부를 걸겠다."라며 다짐했다.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1988년 완도수산고에 입학한 첫날 선생님은 ‘역도를 해봤거나 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라고 했다. 선생님은 앞으로 나온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더니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역도팀으로, 최경주 포함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골프팀으로 배정했다. 17살에 최경주는 처음으로 ‘골프’라는 단어를 접했다. 이날부터 그는 ‘꿩 사육장’처럼 생긴 연습장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물망까지 볼을 치는 사람은 ‘볼 정리 열외’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뜬 최경주는 방망이를 휘둘렀다. 생애 첫 티샷을 날렸는데 볼이 그물망을 훌쩍 넘겼다. 골프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제대로 레슨도 받지 않고 폐타이어를 땅에 파묻어놓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당시 완도에서 배를 타고 신지명사십리 해수욕장에 가서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벙커 연습을 했다.
“골프하고 싶어 완도수산고 자퇴... 서울로 골프 유학”
진로를 골프로 정하려고 하니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워낙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등골을 빼먹으려 그러느냐라는 핀잔을 수없이 들었다. 일찌감치 최경주 프로의 재능을 알아 본 당시 골프연습장 추강래 사장과 완도대성병원 전이양 원장이 광주 골프장으로 데려가 라운딩을 했다. 당시 완도는 소도시이지만 일본으로 미역 등을 수출하는 CEO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골프를 치는 분들이 많았다. 골프채를 닦아주는 알바를 하면서 미래를 위한 자금을 모았다. 우연히 서울 한서고등학교 김재천 이사장의 권유로 골프 유학을 가게 됐다. 서울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금방 우승할 것 같았던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취사병을 자원했다. 골프연습을 하기 위해 시간을 좀 더 확보하고 싶어서였다.
1993년 PGA프로 대회 테스트를 받던 마지막 날에 목사님의 중매로 내조의 여왕 아내(김현정)를 만나 프로포즈를 해서 1996년 결혼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는 최 이사장의 발을 붙잡고 기도를 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교회에 나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아내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모든 일은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한다. 아내는 그가 잘할 때는 겸손을, 경기가 잘 안풀릴 때는 ‘잘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아내가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 등을 모니터링해 주면서 코칭을 해준 탓에 최 이사장은 운동선수 중에 달변가로 소문이 났다. 그는 “내 인생에서 아내는 로또 같은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하늘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를 준다
그는 1995년 팬텀과 1996년 코리아오픈에서 우승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7년 월드컵 선수로 미국에가서 연습환경에 놀랐다. 특히 잔디가 정말 좋아서, 연습하는 내내 잔디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반면에 외국 선수들은 잔디를 팍팍 파며 공을 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골프 환경이 좋은 미국 PGA에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학연, 지연, 인맥도 하나 없는 더 큰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도전, 성공하고 싶었다. 그의 미국행에 대해 주변에서는 걱정하며 반대를 했지만 아내는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그리하여 첫 번째 관문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퀄리파잉 스쿨(Qualifying School: PGA자격 획득 방법 중 하나)에 도전하기로 한다. 식단조절, 시차 적응, 영어 공부 등 꾸준히 준비했다. 식단조절을 할 때 어떤 음식을 먹어야 체력이 유지되는지 실험했다. 이때 찾은 그의 보양식은 아몬드와 캐슈넛, 사과, 피망, 블루베리, 딸기 호두를 섞어 만든 즙을 마시는 것이다. 이처럼 식단조절과 시차 적응, 영어 공부 등 자신에게 맞는 루틴을 만들었다. 도전하는 가운데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IMG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에이전트가 이정한 성균관대학교 교수이다. 그렇게 준비하여 그는 미국 PGA에 한 발 다가서기 위해 1998년 10월 캘리포니아 라노에서 개최된 Q스쿨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터프한 러프와 코스 길이, 한국보다 빠른 그린 스피드를 적응하지 못해 예선 1차전에서 탈락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다. 전략을 수정하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유럽이나 아시아로 우회, 진출하기로 하면서 체력, 마음, 영혼을 가다듬었다. 1999년 기린 오픈 골프대회에 출전했다. 짧게 기도를 한 뒤, 마지막 홀에서 버팅을 하려는 순간 공에서 홀까지 호미로 파놓은 것처럼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선대로 몸을 맡겼더니 연장전에 들어가서 우승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1억 4천만 원의 상금을 현금으로 받았다.
의외의 곳에서 PGA 문이 열리다
기린 오픈에 이어 2주 뒤 일본 우베 고산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일본 투어 상금 랭킹 10위 안에 들면 미국 PGA투어 Q스쿨 최종전에 가는 혜택이 있었다. 1998년 8월 말 상금 랭킹 10위를 확보했으나 Q스쿨로 가기 위한 티켓은 3장 중 1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9위 랭커가 결혼 때문에 티켓을 포기하면서 최 이사장이 최종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미PGA투어 도전하는 시기가 IMF 여파로 경기침체였는데, 최 이사장이 ‘길러주신 아버지’로 모시는 피홍배 (주)삼정 회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1999년 11월 22일 Q스쿨 최종 6라운드에서 8언더파 공동 34위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PGA투어에 진출하게 됐다. PGA투어 멤버십을 가진 선수들에게는 시설이용이 전부 무료이다. 식비를 포함 기타비용은 후불 정산이며 평상시 코스 사용료가 무려 280달러나 되지만, 언제든 무료인데다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1년에 10회 정도 개인 손님을 무료로 초대, 라운딩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최 이사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가 반갑게 인사를 해도 엉뚱하게 대꾸하며 비웃는 선수는 물론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고, 그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 Q스쿨의 문턱을 통과하고 난 뒤 승승장구할 것 같았지만, 2000년 소니오픈 등 연달아 세 대회에서 컷 탈락했다. 그해 상반기에 14개 대회를 출전했지만 컷을 통과해 최종 라운드까지 치른 대회는 6개뿐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그해 9월 에어캐나다 챔피언십 등 공동 8위로 오르면서 남자 프로 골퍼에게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Top 10을 기록했다. 그러나 자만했던 탓일까. 이후 5개 대회에서 줄줄이 컷 탈락했다. 현실은 냉정했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매일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찾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를 털어놓고 상의할 사람도 없으니 답답했다. 그렇게 몸부림을 쳤어도 2000년 상금랭킹 134위로 끝나면서 지옥의 레이스 Q스쿨에 다시 도전했다. 그는 Q스쿨 5라운드까지 48위를 기록했다. 최종 6라운드에서 17번 홀까지 4타를 줄인 덕분에 겨우 30위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남은 마지막 홀에서 무조건 파를 해야만 했다. 오른쪽은 물이고 왼쪽은 깊은 러프로 까다로운 홀이었다. 마지막 퍼팅이 Q스쿨 통과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짧은 기도를 하고 눈을 뜨니 공에서 컵까지 하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퍼팅 성공이 극적으로 31위로 올라서면서 통과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
최경주 이사장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후 훈련을 접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함께 운동하고 저녁을 먹었다. 그는 “부모와 자식은 얼굴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도 만나 뵙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부모로서 모든 것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에게도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서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한다. 2003년에는 큰 아들 호준에게 캐디를 맡겼다. 아이들이 자라서 서로 캐디를 하겠다고 다투기도 했다. 나이순으로 호준이가 가방을 메고 딸 신영이가 타월을 들고 막내 강준이는 물병을 들게 했다.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경우 아이들이 “아빠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돼.”하고 위로를 해줬다. 경기가 없을 땐 아이들과 스키와 낚시를 다니면서 확실하게 놀아주고 있다. 장남 호준군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해병대에 입대, 제대했다. 둘째 아들 최강준은 2019년 미국 주니어골프협회(AJGA) 올스타 남자부 최종라운드에서 6언더파 65타로 정상에 올랐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임을 증명했다.
끝없는 연습을 통해 신(神)을 감동시킨 KJ
최 이사장은 수많은 도전을 하면서 정상에 오르기 쉽지 않은 이유가 욕심에 비롯된 집착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만 우승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기엔 어려웠다. 골프는 팔과 클럽이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공을 쳐야 한다. 하지만 욕심이 생기고, 관중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다 보니 샷 과정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한국에선 잘나가는 골퍼였지만, 미국에서는 무명 신인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는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기보다는 한국인의 자긍심과 긍지를 갖는 태도로 갖고자 했다. 골프 가방에 태극마크를 달았고, 늘 조국을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 결과, 경기력이 좋아지면서 2002년 5월 6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잉글리시턴 골프장에서 열린 PGA투어 컴팩 클래식(총상금 450만 달러)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서 최초 우승컵을 안았다. 100여 년이 넘는 PGA 역사상 한국인으로 처음 투어 대회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후 2011년까지 PGA 8승을 달성했다. 특히 그는 PGA선수 14년 동안 역대 선수 평가 20위에 올랐다. 이를 두고 외신에서는 ‘신이 타이거 우즈를 선택했다면 KJ(최경주의 애칭)는 신을 감동시켰다.’라고 썼다.
수도승과 같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적 선수 명성 지켜
세계적인 선수들이 한순간 자기관리를 하지 못해 나락(那落)으로 떨어진 사례를 숱하게 접했던 최경주 이사장은 수도승처럼 자신을 철저히 관리했다. 최 이사장은 자질과 실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대회가 없을 때 하루에 3,000~4,000개의 연습 볼을 친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타고나도 연습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기술만 있다고 정상급 골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미칠 만큼 몰두하고, 그러기 위해서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골프에 몰입한다. 니콜라우스는 최경주 프로를 “품격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진정한 프로 골퍼”라고 치켜세웠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하루 담배 3갑을 피우던 습관을 버리고 술은 일절 마시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주 사소한 스캔들도 없다. 매사에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컨트롤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물 간 선수가 아니냐’는 주위의 우려를 씻고 2021년 한국인 최초로 50세 이상 선수들이 출전하는 시니어 투어인 미국 프로 골프(PGA) 챔피언스 투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0년 4개월 만에 우승을 한 것이다.
그의 좌우명은 “실패를 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이며 따라서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3년을 맞이해 새해 PGA 투어에서 아들 뻘인 젊은 선수들과 기량을 겨룬다. 쉽지 않지만 젊은 친구들과 함께 경기를 하는 것은 행복하다. 어려움이 오히려 간절히 우승을 바라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 선수로 키워준 후원자 기억... 골프 꿈나무 양성으로 보답
최경주 이사장은 자신이 어렸을 때의 재능을 알아봐 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최경주 프로’가 된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백도 없고 연줄도 없던 그가 완도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서울로, 연습생에서 프로로 진입할 때,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기적의 후원자들의 덕분이었다. 그의 성공은 자신을 아무런 대가 없이 후원했던 한서고 김재천 이사장과 피홍배 회장의 후원, 하용조 목사의 코칭, 호소카와 가즈히코의 양보, 해외 교민 팬의 응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들 후원자가 없으면 오늘의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후원자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은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미래를 꿈꿀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힘으로 꿈을 이뤄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2007년 비영리 민간단체인 사)최경주 복지회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의 설립이념은 정직과 기회, 리더십, 우정 등이다. 재단은 14년 동안 골프 꿈나무 315명과 장학 꿈나무 총 417명을 지원해왔다. 한국 선수와 현지 교민 자녀들이 미국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3개의 주니어 챔피언십을 개최하고 있다. 3월에 AJGA-메디힐 텍사스 주니어 챔피언십, 7월 AJGA 시애틀 주니어 챔피언십, 8월 AJGA-SKT 텍사스 주니어 챔피언십 등을 공동 개최하고 있다.
자연재해 및 재난 사고로 고통 받은 이들에게 특별지원 전개
철저하게 우승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날을 반추해 보면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최 이사장은 주변을 돌아보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챙기며 살고 있다. 고인이 된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의 제안으로 2012년에 <코리안 탱크, 최경주> 자서전을 출판, 인세를 최경주재단에 기부하여 꿈의 둥지건립(Build Dream Nest)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다. 또한 재난재해 및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가 있을 때 챙기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여겼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폭발사고 유가족한테 지원금을 전달한 이후 2011년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그 해 일본 쓰나미 피해자들과 미국 동남부를 강타한 태풍 피해자 가족을 돕기 위해 2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동안 재난재해 등으로 곤경에 처한 피해지역이 세계 어느 곳이든 간에 찾아가서 성금을 기탁했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 자서전 펴내... ‘희망’ 전도사 활약
최경주 이사장은 2012년 ‘코리안 탱크, 최경주’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했다. 당초에는 영화제작을 염두에 뒀는데 너무 이른 것 같아 책을 먼저 집필했다. 그는 신앙 간증을 잘 하는 스포츠맨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역경에서 이겨냈다.”라는 내용의 신앙 간증을 하며 교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최경주 선수는 2013년에 아시아-태평양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는 한국 남자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플로리다주 폰테베드라비치 미국 프로 골프 투어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World Golf Hall of Fame) 입회자로 대기하고 있다. 이 전당에는 박세리와 박인비 선수가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됐다. 그러나 남자의 입회 조건은 여자보다 까다롭다. 10년 이상 투어 멤버 활동은 물론 50세로 나이 제한이 있다. 게다가 남자는 정해진 우승 횟수와 메이저대회 우승 트로피 숫자를 채워야 한다. 52세에 불과한 최경주 선수가 꾸준히 활약하여 승수를 쌓는다면, 한국 남자 선수로서 첫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다.
2022년 최경주 수상자
2022년 창업성공스토리
최경주 프로골퍼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는 교훈
‘코리아 탱크’로 유명한 최경주 이사장은 1970년 완도에서 미역 양식과 농사를 짓는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까지 아버지를 도와 갯벌에서 물고기를 담아 왔고, 밭에 거둬 놓은 콩도 챙겨오고, 소여물도 베어 왔다. 이처럼 아버지를 도와 산과 바다를 돌아다녔던 것이 탄탄한 하체근육을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경주 프로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대회가 있든 없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연습장에서 지독한 연습을 한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퍼팅 연습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노력이 쌓여 한국 남자골프 개척자로, 미국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며 걸어온 길은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렇게 최경주 프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남자골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고 강조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 모자란 점을 알면 자신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적인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살을 에는 듯한 바닷바람에 맨손으로 바닷물 속의 미역을 따던 아버지의 근면함과 성실성에서 강인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공부는 내 길이 아니고 운동으로 승부를 걸자고 결심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최경주 이사장은 등록금 면제를 받기 위해 역도부에 들어갔다. 이왕 역도를 선택했으니, 큰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었다. 연습을 많이 해도 생각만큼 실력이 늘어나지 않았다. 그의 체형이 역도를 하기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그만두게 되었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소홀했던 공부를 단시간에 따라잡는 것 또한 어려움이 있었다. 영어 수업에 참석하여 교과서를 편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최 이사장은 “공부는 내 길이 아니다. 운동으로 승부를 걸겠다."라며 다짐했다.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1988년 완도수산고에 입학한 첫날 선생님은 ‘역도를 해봤거나 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라고 했다. 선생님은 앞으로 나온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더니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역도팀으로, 최경주 포함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골프팀으로 배정했다. 17살에 최경주는 처음으로 ‘골프’라는 단어를 접했다. 이날부터 그는 ‘꿩 사육장’처럼 생긴 연습장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물망까지 볼을 치는 사람은 ‘볼 정리 열외’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뜬 최경주는 방망이를 휘둘렀다. 생애 첫 티샷을 날렸는데 볼이 그물망을 훌쩍 넘겼다. 골프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제대로 레슨도 받지 않고 폐타이어를 땅에 파묻어놓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당시 완도에서 배를 타고 신지명사십리 해수욕장에 가서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벙커 연습을 했다.
“골프하고 싶어 완도수산고 자퇴... 서울로 골프 유학”
진로를 골프로 정하려고 하니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워낙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등골을 빼먹으려 그러느냐라는 핀잔을 수없이 들었다. 일찌감치 최경주 프로의 재능을 알아 본 당시 골프연습장 추강래 사장과 완도대성병원 전이양 원장이 광주 골프장으로 데려가 라운딩을 했다. 당시 완도는 소도시이지만 일본으로 미역 등을 수출하는 CEO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골프를 치는 분들이 많았다. 골프채를 닦아주는 알바를 하면서 미래를 위한 자금을 모았다. 우연히 서울 한서고등학교 김재천 이사장의 권유로 골프 유학을 가게 됐다. 서울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금방 우승할 것 같았던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취사병을 자원했다. 골프연습을 하기 위해 시간을 좀 더 확보하고 싶어서였다.
1993년 PGA프로 대회 테스트를 받던 마지막 날에 목사님의 중매로 내조의 여왕 아내(김현정)를 만나 프로포즈를 해서 1996년 결혼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는 최 이사장의 발을 붙잡고 기도를 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교회에 나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아내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모든 일은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한다. 아내는 그가 잘할 때는 겸손을, 경기가 잘 안풀릴 때는 ‘잘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아내가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 등을 모니터링해 주면서 코칭을 해준 탓에 최 이사장은 운동선수 중에 달변가로 소문이 났다. 그는 “내 인생에서 아내는 로또 같은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하늘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를 준다
그는 1995년 팬텀과 1996년 코리아오픈에서 우승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7년 월드컵 선수로 미국에가서 연습환경에 놀랐다. 특히 잔디가 정말 좋아서, 연습하는 내내 잔디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반면에 외국 선수들은 잔디를 팍팍 파며 공을 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골프 환경이 좋은 미국 PGA에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학연, 지연, 인맥도 하나 없는 더 큰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도전, 성공하고 싶었다. 그의 미국행에 대해 주변에서는 걱정하며 반대를 했지만 아내는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그리하여 첫 번째 관문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퀄리파잉 스쿨(Qualifying School: PGA자격 획득 방법 중 하나)에 도전하기로 한다. 식단조절, 시차 적응, 영어 공부 등 꾸준히 준비했다. 식단조절을 할 때 어떤 음식을 먹어야 체력이 유지되는지 실험했다. 이때 찾은 그의 보양식은 아몬드와 캐슈넛, 사과, 피망, 블루베리, 딸기 호두를 섞어 만든 즙을 마시는 것이다. 이처럼 식단조절과 시차 적응, 영어 공부 등 자신에게 맞는 루틴을 만들었다. 도전하는 가운데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IMG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에이전트가 이정한 성균관대학교 교수이다. 그렇게 준비하여 그는 미국 PGA에 한 발 다가서기 위해 1998년 10월 캘리포니아 라노에서 개최된 Q스쿨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터프한 러프와 코스 길이, 한국보다 빠른 그린 스피드를 적응하지 못해 예선 1차전에서 탈락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다. 전략을 수정하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유럽이나 아시아로 우회, 진출하기로 하면서 체력, 마음, 영혼을 가다듬었다. 1999년 기린 오픈 골프대회에 출전했다. 짧게 기도를 한 뒤, 마지막 홀에서 버팅을 하려는 순간 공에서 홀까지 호미로 파놓은 것처럼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선대로 몸을 맡겼더니 연장전에 들어가서 우승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1억 4천만 원의 상금을 현금으로 받았다.
의외의 곳에서 PGA 문이 열리다
기린 오픈에 이어 2주 뒤 일본 우베 고산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일본 투어 상금 랭킹 10위 안에 들면 미국 PGA투어 Q스쿨 최종전에 가는 혜택이 있었다. 1998년 8월 말 상금 랭킹 10위를 확보했으나 Q스쿨로 가기 위한 티켓은 3장 중 1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9위 랭커가 결혼 때문에 티켓을 포기하면서 최 이사장이 최종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미PGA투어 도전하는 시기가 IMF 여파로 경기침체였는데, 최 이사장이 ‘길러주신 아버지’로 모시는 피홍배 (주)삼정 회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1999년 11월 22일 Q스쿨 최종 6라운드에서 8언더파 공동 34위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PGA투어에 진출하게 됐다. PGA투어 멤버십을 가진 선수들에게는 시설이용이 전부 무료이다. 식비를 포함 기타비용은 후불 정산이며 평상시 코스 사용료가 무려 280달러나 되지만, 언제든 무료인데다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1년에 10회 정도 개인 손님을 무료로 초대, 라운딩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최 이사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가 반갑게 인사를 해도 엉뚱하게 대꾸하며 비웃는 선수는 물론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고, 그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 Q스쿨의 문턱을 통과하고 난 뒤 승승장구할 것 같았지만, 2000년 소니오픈 등 연달아 세 대회에서 컷 탈락했다. 그해 상반기에 14개 대회를 출전했지만 컷을 통과해 최종 라운드까지 치른 대회는 6개뿐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그해 9월 에어캐나다 챔피언십 등 공동 8위로 오르면서 남자 프로 골퍼에게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Top 10을 기록했다. 그러나 자만했던 탓일까. 이후 5개 대회에서 줄줄이 컷 탈락했다. 현실은 냉정했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매일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찾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를 털어놓고 상의할 사람도 없으니 답답했다. 그렇게 몸부림을 쳤어도 2000년 상금랭킹 134위로 끝나면서 지옥의 레이스 Q스쿨에 다시 도전했다. 그는 Q스쿨 5라운드까지 48위를 기록했다. 최종 6라운드에서 17번 홀까지 4타를 줄인 덕분에 겨우 30위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남은 마지막 홀에서 무조건 파를 해야만 했다. 오른쪽은 물이고 왼쪽은 깊은 러프로 까다로운 홀이었다. 마지막 퍼팅이 Q스쿨 통과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짧은 기도를 하고 눈을 뜨니 공에서 컵까지 하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퍼팅 성공이 극적으로 31위로 올라서면서 통과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
최경주 이사장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후 훈련을 접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함께 운동하고 저녁을 먹었다. 그는 “부모와 자식은 얼굴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도 만나 뵙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부모로서 모든 것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에게도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서 항상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한다. 2003년에는 큰 아들 호준에게 캐디를 맡겼다. 아이들이 자라서 서로 캐디를 하겠다고 다투기도 했다. 나이순으로 호준이가 가방을 메고 딸 신영이가 타월을 들고 막내 강준이는 물병을 들게 했다.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경우 아이들이 “아빠 괜찮아 다음에 잘 하면 돼.”하고 위로를 해줬다. 경기가 없을 땐 아이들과 스키와 낚시를 다니면서 확실하게 놀아주고 있다. 장남 호준군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해병대에 입대, 제대했다. 둘째 아들 최강준은 2019년 미국 주니어골프협회(AJGA) 올스타 남자부 최종라운드에서 6언더파 65타로 정상에 올랐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임을 증명했다.
끝없는 연습을 통해 신(神)을 감동시킨 KJ
최 이사장은 수많은 도전을 하면서 정상에 오르기 쉽지 않은 이유가 욕심에 비롯된 집착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만 우승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기엔 어려웠다. 골프는 팔과 클럽이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공을 쳐야 한다. 하지만 욕심이 생기고, 관중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다 보니 샷 과정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한국에선 잘나가는 골퍼였지만, 미국에서는 무명 신인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는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기보다는 한국인의 자긍심과 긍지를 갖는 태도로 갖고자 했다. 골프 가방에 태극마크를 달았고, 늘 조국을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 결과, 경기력이 좋아지면서 2002년 5월 6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잉글리시턴 골프장에서 열린 PGA투어 컴팩 클래식(총상금 450만 달러)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서 최초 우승컵을 안았다. 100여 년이 넘는 PGA 역사상 한국인으로 처음 투어 대회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후 2011년까지 PGA 8승을 달성했다. 특히 그는 PGA선수 14년 동안 역대 선수 평가 20위에 올랐다. 이를 두고 외신에서는 ‘신이 타이거 우즈를 선택했다면 KJ(최경주의 애칭)는 신을 감동시켰다.’라고 썼다.
수도승과 같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적 선수 명성 지켜
세계적인 선수들이 한순간 자기관리를 하지 못해 나락(那落)으로 떨어진 사례를 숱하게 접했던 최경주 이사장은 수도승처럼 자신을 철저히 관리했다. 최 이사장은 자질과 실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대회가 없을 때 하루에 3,000~4,000개의 연습 볼을 친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타고나도 연습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기술만 있다고 정상급 골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미칠 만큼 몰두하고, 그러기 위해서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골프에 몰입한다. 니콜라우스는 최경주 프로를 “품격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진정한 프로 골퍼”라고 치켜세웠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하루 담배 3갑을 피우던 습관을 버리고 술은 일절 마시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주 사소한 스캔들도 없다. 매사에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컨트롤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물 간 선수가 아니냐’는 주위의 우려를 씻고 2021년 한국인 최초로 50세 이상 선수들이 출전하는 시니어 투어인 미국 프로 골프(PGA) 챔피언스 투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0년 4개월 만에 우승을 한 것이다.
그의 좌우명은 “실패를 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이며 따라서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3년을 맞이해 새해 PGA 투어에서 아들 뻘인 젊은 선수들과 기량을 겨룬다. 쉽지 않지만 젊은 친구들과 함께 경기를 하는 것은 행복하다. 어려움이 오히려 간절히 우승을 바라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 선수로 키워준 후원자 기억... 골프 꿈나무 양성으로 보답
최경주 이사장은 자신이 어렸을 때의 재능을 알아봐 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최경주 프로’가 된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백도 없고 연줄도 없던 그가 완도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서울로, 연습생에서 프로로 진입할 때,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기적의 후원자들의 덕분이었다. 그의 성공은 자신을 아무런 대가 없이 후원했던 한서고 김재천 이사장과 피홍배 회장의 후원, 하용조 목사의 코칭, 호소카와 가즈히코의 양보, 해외 교민 팬의 응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들 후원자가 없으면 오늘의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후원자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은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미래를 꿈꿀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힘으로 꿈을 이뤄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2007년 비영리 민간단체인 사)최경주 복지회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 재단의 설립이념은 정직과 기회, 리더십, 우정 등이다. 재단은 14년 동안 골프 꿈나무 315명과 장학 꿈나무 총 417명을 지원해왔다. 한국 선수와 현지 교민 자녀들이 미국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3개의 주니어 챔피언십을 개최하고 있다. 3월에 AJGA-메디힐 텍사스 주니어 챔피언십, 7월 AJGA 시애틀 주니어 챔피언십, 8월 AJGA-SKT 텍사스 주니어 챔피언십 등을 공동 개최하고 있다.
자연재해 및 재난 사고로 고통 받은 이들에게 특별지원 전개
철저하게 우승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날을 반추해 보면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최 이사장은 주변을 돌아보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챙기며 살고 있다. 고인이 된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의 제안으로 2012년에 <코리안 탱크, 최경주> 자서전을 출판, 인세를 최경주재단에 기부하여 꿈의 둥지건립(Build Dream Nest)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다. 또한 재난재해 및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가 있을 때 챙기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여겼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폭발사고 유가족한테 지원금을 전달한 이후 2011년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그 해 일본 쓰나미 피해자들과 미국 동남부를 강타한 태풍 피해자 가족을 돕기 위해 2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동안 재난재해 등으로 곤경에 처한 피해지역이 세계 어느 곳이든 간에 찾아가서 성금을 기탁했다.
‘코리안 탱크 최경주’ 자서전 펴내... ‘희망’ 전도사 활약
최경주 이사장은 2012년 ‘코리안 탱크, 최경주’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했다. 당초에는 영화제작을 염두에 뒀는데 너무 이른 것 같아 책을 먼저 집필했다. 그는 신앙 간증을 잘 하는 스포츠맨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역경에서 이겨냈다.”라는 내용의 신앙 간증을 하며 교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최경주 선수는 2013년에 아시아-태평양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는 한국 남자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플로리다주 폰테베드라비치 미국 프로 골프 투어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World Golf Hall of Fame) 입회자로 대기하고 있다. 이 전당에는 박세리와 박인비 선수가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됐다. 그러나 남자의 입회 조건은 여자보다 까다롭다. 10년 이상 투어 멤버 활동은 물론 50세로 나이 제한이 있다. 게다가 남자는 정해진 우승 횟수와 메이저대회 우승 트로피 숫자를 채워야 한다. 52세에 불과한 최경주 선수가 꾸준히 활약하여 승수를 쌓는다면, 한국 남자 선수로서 첫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