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2022대상 승은호 수상자

2022년 승은호 수상자

2022년 창업성공스토리

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

 

인도네시아 진출 54년 만에 20위권 진입 기업 일궈

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1942~현재)은 한국 목재산업의 산증인인 승상배(1921~2009)동화기업 창업주의 장남으로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51년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 동화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오늘날 보드와 화학, 오토라이프, 미디어 사업 등 다양한 사업 군을 영위하는 동화그룹의 모태이며 그의 동생 승명호씨가 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승은호 회장이 1950년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25동란이 발생하였다. 1.4후퇴 무렵 가족모두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으나, 다행히 그의 부친 사업은 전후 복구 사업과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과 맞물리면서 원목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등 목재산업 전반으로 확장했다. 승은호 회장은 동화기업 미국 LA 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세계가 얼마나 넓고 경쟁이 치열한지를 절감했다. 부친이 인도네시아에서 산판(산에서 벌목 반출 총칭)사업을 해보자는 뜻에 따라 해외로 진출했다. 1969년에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원목을 벌채하기 위해 ‘인니동화’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부사장을 맡은 승 회장은 낯선 땅과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의 오지인 칼리만탄 주 발릭빠빤(Balikpapan)에서 원목 개발 사업을 총괄했다. 그러나 1975년 동화기업이 갑작스러운 부도가 나면서 현지 법인은 외환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졸지에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고교시절 극소심형 학생... 성격개조하려 동아리 활동 힘써

고등학생 시절에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맨날 숨어 다녔다. 특별히 잘한 것이 없었다. 승 회장은 “수줍음과 낯가림으로 숨어 다니느라 바빴다.”라고 학창 시절을 술회했다. 1960년에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를 진학했던 승 회장은 “남의 시선을 피해 숨어 다니니까 자신감 등이 떨어져서 다양한 동아리 활동에 참여했다. 기계 체조부는 물론 합창단, 문예반, 생물반, 소년단 등 동아리에 가입했다. 수줍음 때문에 동아리에 가입은 했지만 제대로 활동한 것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숫기가 없고 조용한 학생이었는지에 대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캠프 파이어를 하는데 참석한 학생들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다른 이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창피해서 그릇 닦기를 자청하고 먼발치에서 또래 대학생들이 노래하는 것을 엿들었다. 당시 내가 왜 이러고 살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다만 학교 교훈인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 지키자”는 장성이 되어서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다.


목재업 노하우와 인맥이 코린도 창업 계기

부친 회사의 부도로 무일푼이 된 승은호 회장에게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 고아상사에서 “일본에도 목재가 많이 필요하니까 당신이 인도네시아에 가서 노하우와 인맥으로 목재를 수출하면 일본에서 사주겠다”라고 제안했다. 승 회장은 일본 기업에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주면 원목 수출은 물론 우선적으로 변제하겠다.”라고 역제안을 했다. 일본 기업은 승 회장을 믿고 160만달러의 거금을 빌려줬다. 그는 이 자금으로 원목 벌채 장비를 구입하고, 임지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법인을 만들었다.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승 회장은 한국인이 일구는 인도네시아, 코리아와 인도네시아를 합쳐 ‘KORINDO'라고 회사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에 코린도라는 회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아상사 빚은 1980년 후반에 전액 상환했다.

승 회장은 코린도그룹이 인도네시아에 뿌리를 둔 회사라는 점을 임직원에게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1998년 아시아를 강타한 IMF 사태 때 수하르토 정권이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한 것이 화근이 되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시위대들은 중국 화교 때문에 IMF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중국인 상가에 난입해 방화를 저지르고 약탈하는 등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승 회장과 코린도 직원들도 중국인과 비슷해서 곤욕을 치렀지만 철수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이처럼 현지인과 융화와 화합을 바탕으로 코린도 그룹이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됐다.


죽을 고비 넘긴 직원에게 “끝까지 한다”라는 동지애 심어


인도네시아의 울창한 밀림에서 원목을 벌채하는 것은 고난도 작업이다. 임학과를 졸업한 기술자와 현지인 길잡이로 구성된 임상조사팀이 밀림으로 들어가서 벌채 예상한 지점에 도착, 나무의 크기와 종류를 파악하고 운송할 도로 건설의 계획을 지도에 표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채산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벌채권을 가진 사람과 매매 협상을 벌인다. 벌채권을 확보하면 임상 조사 보고서에 따라 도로를 내고 본격적인 벌목작업에 착수한다. 벌목 생산팀은 불도저 3대와 톱질하는 전문가 3명이 한 팀이 되어 작업을 한다. 불도저는 나무 톱으로 벌채한 원목을 운반할 길을 닦거나 베어진 나무들을 도로까지 옮기는 일을 담당한다. 일정한 규격의 원목은 트럭에 실어 운반하거나 물에 뜨는 나무들은 뗏목으로 묶은 다음 모터보트가 끌고 강을 따라 운반한다. 이 과정에서 코린도 직원들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는 것은 예사였고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밤중에 차를 운전하다가 마두라족을 치어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현지인들이 칼과 낫을 들고 쫓아와 “한국인도 한 명 죽여야 한다.”고 우기자, 인근 군부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일화도 있다. 2001년에는 파푸아 밀림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을 포함한 13명이 분리 독립운동을 하던 게릴라들에게 인질로 납치, 23일 동안 억류당했었다. 승 회장은 게릴라군 대장과 직접 대화에 나서서 “우리가 밀림을 개척해 사업을 계속해야 당신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 우리 회사에 취직해 먹고 살 수 있지 않느냐.”라며 설득, 직원을 구출했다. 승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코린도 그룹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직원들의 덕분이라고 공을 돌리고 있다. 생사를 넘나들며 함께 근무한 직원들에게 ‘끝까지 함께 간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先見(선견), 先行(선행), 先占(선점) 등 경영철학으로 그룹 발전 꾀해

승은호 회장이 인도네시아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기업가정신은 선견(先見), 선행(先行), 선점(先占) 등 삼선(三先)이다, 이 경영철학이 코린도 그룹이 기업과 지역사회 등 모두와 상생하며 지속 가능한 경영을 도모하는 밑바탕이 됐다. 이는 코린도의 사업 방향을 일깨워주는 방향타를 제시했다. 선견(先見)은 “목재가 앞으로 없어지지 않을 사업”이라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원목에서 합판, 제지, 조림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누구보다 멀리 내다보고 빨리 움직여서 경쟁우위에 도달하자는 승 회장의 경영철학이 변화에 따른 위기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선행(先行)은 남보다 먼저 합판 제지 사업에 진출하여 그룹 발전을 꾀했다. 코린도보다 인도네시아에 먼저 진출했던 한국의 원목 수출 회사들이 1979년에 철수하는 시기에 코린도는 합판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 현재의 코린도 그룹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

선점(先占)은 시장경쟁이 치열해지고 고객의 니즈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발 앞서 고객이 요구하는 제품과 서비스로 고객의 감동과 세상의 행복을 먼저 실현하자는 것이다. 1998년 시작한 팜 오일농장 투자는 선점의 효과를 가져와서 최근 들어 코린도의 미래를 이끌 성장산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처럼 선행과 선점, 선견의 경영철학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 할 수 있는 코린도 그룹을 만들어 낸 것이다.


30개 계열사 성장시켜 인도네시아 경제발전에 기여

코린도 그룹은 플랜테이션과 목가공, 제지, 풍력, 중공업, 물류, 무역, 부동산, 금융 등 30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승 회장은 문어발식 경영으로 확장한 것이 아니라 원목 벌채 사업을 하다보니 연관 사업이 늘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합판 사업이 사양사업이라고 여길 때 전문가와 설비에 과감하게 투자하여 부가가치를 높인 고품질의 2차 합판(필름, 페인트합판)을 생산하여 세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으며 경쟁업체들보다 고가정책을 유지하며 독주하였다. 100% 폐지는 품질이 안 좋다는 편견을 깨고, 품질을 개선하여 인도네시아 제지 기술의 성장을 이끌어 내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인도네시아 내수시장 뿐만이 아니라, 호주 등의 선진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으로 발전시켰다. 평소 “인도네시아에서 번 돈은 모두 이곳에 재투자 한다.”는 신조를 가진 승 회장은 축적된 산림개발 경험을 가지고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인 파푸아(Papua)지역 개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산림개발 및 합판생산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제안한 팜농장을 조성하여 지역사회와 같이 성장하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인도네시아내에 낙후된 물류, 금융시스템으로 인해 사업에 지장을 받던 승 회장은 직접 물류와 금융, 보험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로 인해 수출 및 수입 관련 업무가 안정되고 인도네시아 물류와 금융, 보험 사업 발전에 견인차 역할도 하였다.


지속 가능한 사업을 연구하고 기업 상대 사업 구상

코린도가 인도네시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승은호 회장은 신규 사업을 할 때 3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추진하고 있다.

첫째,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을 아이템을 발굴, 연구한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흐름을 먼저 예측하고 미래 유망한 사업 계획과 조기 시장 개척을 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에서 과거엔 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 아이템을 택한다. 이 경우 인력을 구하기 쉽고 사업을 추진할 때도 있다. 셋째,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사업은 어렵다며 원료를 기반으로 기업을 상대하는 사업을 한다. 새로운 사업을 할 때 3~4년 적자를 낼 각오로 진출했다. 한때 컨테이너 사업이 잘 나갔지만 중국의 저가 공세로 사업을 접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고용 촉진을 위한 사업을 하라고 요청하여 신발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대리점 관리와 운영이 잘되지 않아 실패했다. 목재와 제지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 조림사업은 인도네시아 조림사업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인정을 받고 있다. 또한 1998년부터 식재를 시작하여 매년 식재 면적을 늘려가며 기다림으로 일궈낸 팜농장 사업과 고무농장 사업은 지역사회와 함께 미래를 설계할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코린도그룹은 50여 년간 지속적인 CSC 활동을 하였다. 그 중에서 인도네시아 지역 공동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 환경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도시 숲’ 프로젝트이다.

조림과 임업에 강점을 가진 코린도 그룹은 특별한 용도가 없거나 개발 가능성이 적어 관리가 소홀한 땅이나 쓰레기매립지 등 환경이 크게 훼손된 땅을 조림기술로 복원시켜 시민들이 언제든 찾아 즐길 수 있는 녹지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사업이다. 2019년 코린도 그룹은 자회사의 유휴 부지 2ha에 시범림 조성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코린도 1차 도시숲-아스펙’으로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자신감을 얻었다. 인도네시아 보고르 군청은 코린도그룹에게 보고르군 빠깐사리(Pakansari)지역 자투리땅에도 도시 숲을 조성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2019년 11월에 생장이 빠른 유칼립투스를 심어 도시숲을 조성했다. 그 결과, 현재는 평균 수고 14~15m의 울창한 숲으로 성장하고 있다. 코린도그룹은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무육작업과 모니터링을 지속적으로 한 후, 푸르고 시원한 녹색 공간으로 변모한 이 도시 숲을 지난 2월 초 보고르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2021년부터 보고르군의 뽄독라제그(PondokRajeg) 지역 쓰레기매립지에 도시숲을 조성하고 있다. 2021년 9월 1차 시범 조림을 시작으로 약 7ha에 달하는 땅에 나무가 심어졌다. 도시 곳곳에 버려져 무단 점거 및 쓰레기 투기 등의 문제를 야기하고 지역 환경을 해치는 버려진 자투리 땅에 생장 속도가 빠른 묘목을 선별하고 식재하여 숲을 조성함으로써 환경 복원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도시 숲은 시민들의 쉼터 및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지 문화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현지화의 성공 요인

코린도 그룹의 직원은 한국인 177명과 현지인 22,918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업으로 현지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초기에는 한국인 직원이 현지 문화와 현지인의 이해 부족으로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지금도 섬뜩하게 느껴진 사건은 결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작업시간에도 말썽만 부리는 현지인을 노동청 지부를 통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해고를 했다. 해고당한 현지인이 앙심을 품고 서류를 보고 있는 노무 담당자의 목덜미를 톱으로 썰려다가 발각된 사례도 있다. 중부 칼리만탄에 합판공장을 처음 건립할 때 현지인 직원들이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하는 시간만 되면 일손을 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와중에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 있던 합판 재료가 뒤엉켜 부서지는 등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승 회장은 이들 이슬람을 신봉하는 직원들을 나무라는 대신 공장 한쪽에 기도실을 만들고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환경을 정비했다. 또한 공장 기계가 멈추지 않도록 기도 시간을 나눠서 할 수 있도록 현지 직원들을 설득했다. 승은호 회장은 기회가 되면 코린도 한국 직원에게 인도네시아의 생활문화를 터득하여 그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독려 하고 있다.


학교, 사원, 병원을 갖춘 ‘코린도 타운’ 건설로 신뢰 얻어

코린도는 자카르타와 수라바야, 탕거랑, 발릭파판 등 전국 10개 지역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승은호 회장은 새로운 개척지를 갈 때마다 도로와 통신 등 사회기반 인프라와 종교시설 및 자녀교육을 위한 학교시설, 안정적인 의료혜택을 위한 병원 등을 조성하여 운영하였다. 파푸아 지역에 합판공장을 세울 때 주변에는 집 한 채도 없었다. 현지에 직공들을 채용하면 그 직공의 가족들이 모두 공장 주변에 몰려와 집을 짓고 살면서 거대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일명 ‘코린도 타운’이다. 이들은 땅값을 내지 않고 자유롭게 집을 짓고 살고 있다. 회사는 주민 편의를 위해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을 지어주고 사원, 병원을 지어주고 관리하고 있다. 교사도 채용, 월급을 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코린도 그룹이 인도네시아 각지에 건설한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각각 9개소이며 초등학교 13개소와 중학교(6개), 고등학교(3개) 등이 있다. 특히 주민들의 종교생활을 위해 이슬람 사원과 교회, 성당 등 43개를 지었다. 이 밖에 빵깔란분 지역사회를 위해 140억 루피아를 투입, 도로 및 교량을 건설 기부했다. 또한 팜오일 사업을 하고 있는 파푸아주 머라우께군에는 발전기금 300억 루피아 기부 약정을 하고,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우선 해결하기 위해 하루 100명의 환자가 이용 가능한 1차 진료기관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서 발을 구르고 있는 지방정부에 마스크 12만장을 즉시 투입하여 감염증 확산도 막았다. 이처럼 주민들의 원활한 경제 및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 시설을 지어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승 회장과 코린도 임직원들을 사업장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도전 및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한상(韓商)의 상징 평가받아

도전 및 개척의 상징인 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은 한상(韓商)을 상징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수교를 맺기 전에 자원 개발을 해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정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정착한 그는 해외에 이주, 정착한 재외동포 경제인(韓商)을 네트워크 하려고 애를 썼다. 선두 주자 CEO로서 우리 기업들이 세계무대에 진출, 판로개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왔다. 1998년 설립된 ‘인도네시아 한인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을 맡은 후 14년간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는 재임 기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교민 기업과 현지 기업 간의 사업 협력 활성화를 위해 앞장섰으며 자신이 가진 비즈니스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했다. 2003년에 설립된 ‘아시아 한상연합회’의 초대회장을 맡아서 15년간 봉사했다. 이 연합회는 아시아 지역 회원국 간 한인 경제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다른 대륙 한상연합회 및 한인경제단체와의 경제교류를 추진했다. 승 회장은 아세안 국가로 이주, 정착한 한상들이 무역 및 투자 등 제반 정보를 교환하고 사업 발전을 모색하여 범세계적인 한민족 경제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이 밖에 1990년에 재인도네시아한인회 회장으로 취임한 뒤 2012년까지 22년간 봉사를 하면서 한국인들끼리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애를 썼다. 이와 함께 1990년도 자카르타 한인 국제 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아서 한인 2, 3세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 부지 6,600평을 무상 기부했다. 이 밖에 제7차 세계한상대회 대회장을 역임했으며 제16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아세안 부의장도 맡았다. 2013년부터 국세청과 검찰로부터 역외탈세 등 소송에 휘말리면서 대외활동을 자제했던 승 회장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활동을 재개했다. 그동안 봉사활동했던 인도네시아 한인회와 한인상공회의소, 아시아 한상연합회 등에서 우리끼리 서로 돕고 동반 성장을 모색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롭다고 느끼고 있다.


기업이 성장 발전하는 데 도움을 준 은혜 보답해야

코린도 장학 재단은 2018년 1월 인도네시아 사회의 일원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한 사회 공헌활동을 본격적으로 확장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 코린도 사회 공헌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새로운 이름으로 재단을 재출범한 첫해에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많았다. 6.9의 롬복섬 지진에 이어 7.5의 강진과 함께 쓰나미가 빨루(Palu) 지역을 강타했다. 3천여 명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하였고, 6만 7,000여 개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코린도는 즉각 움직였다. “코린도 그룹이 인도네시아에서 합판으로 건실하게 성장한 만큼, 우리가 전달하는 합판이 피해지역의 재건과 복구에 요긴하게 쓰이길 바란다.” 는 마음을 담아 합판 11만2,200장(70억 루피아)을 피해 지역에 직접 전달하였다. 또한 코린도는 나무 심는 기업으로써 인도네시아의 녹색 산림정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2012년부터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진행하는 정부 차원의 식목행사에 적극 참여했고, 코린도 자체적으로 식목 행사를 개최하는 등 도시 녹화 사업의 큰 뜻을 사회공헌활동으로 구현해 왔다. 이에 2012년 10억 그루 나무심기 운동을 해온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공로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중부자와 지역에 20년간 묵묵히 나무를 심어온 ‘사디만’이라는 노인을 도와 지역주민과 공무원들이 다 같이 동참하여 중요한 산림자원을 가꾸는 잔잔한 감동을 만들기도 했다. 코린도가 인도네시아에 뿌리 내린지 50년이 넘었다. 승 회장은 말한다. “코린도의 터전은 인도네시아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기업으로서의 역할, 인도네시아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승 회장의 철학과 맞물린 코린도 사회공헌재단 활동이 인도네시아 사회공헌 활동에 많은 영향과 함께 큰 상승작용을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래인재 양성과 ESG 실천에 앞장

승은호 회장이 깊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인도네시아의 인재 양성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역사회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장학 재단을 설립, 매년 주요 7개 대학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805명에게 17만 2천 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일정 수준 성적만 유지해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 거둔 성공과 이윤을 끊임없이 인재 양성 등에 재투자하여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는 탄소배출 절감 노력의 일환으로 코린도 임지 대상으로 산불 및 산림벌채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사업장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바이오메스 발전소를 건설하여 탄소배출 절감 노력과 지역사회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특히 2019년 캄파르 1만 4천ha의 이탄지(석탄이 얕은 물에 잠긴 채 수천 년 퇴적되면서 형성된 유기질 토지) 보호를 위해 조림사업을 펼치고 있다. 승 회장은 인도네시아 새 행정수도 이전지인 동칼리만탄 인근에 15만 ha 규모의 임지에 건축자재와 레미콘, 합판 공급을 비롯한 도시 건설 컨설팅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외에 1993년 서울에 코린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 인도네시아에서 필요한 한국의 질 좋은 원료와 상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91년 인도네시아 전 수하르토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수훈했으며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석류장(1991)과 모란장(2002), KBS 제8회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