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2016국회의장상(최우수상)- 차봉규

2016수상자 – 국회의장상(최우수상)

차 봉 규 중국절강이우차씨공무유한공사 회장

뉴욕한인경제인 협회 산파

시진핑 주석 차봉규 회장 회사 방문

 


중국 진출 액세서리 ‧ 부동산개발로 성공신화 일궈

차봉규 중국절강이우차씨공무유한공사 회장은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온 실향민 부모의 장남(2남 3녀)으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운데다 남한에는 일가친척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고향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와야겠다는 부친을 따라 3살 때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친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어머님마저 몸이 아파서 집안 사정은 더욱 곤궁해졌다.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우유배달 등을 해가면서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 했다. 주경야독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서강대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제대로 공부한 경험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가장(家長)인 자신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줘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소년 가장으로 동생들 뒷바라지 사명감 가져

 

군복무를 마친 후, 1984년 광고회사인 고려기획 무역부에 취업했다. 1989년에 이종사촌누님이 경영하는 액세서리 제조수출업체인 부천공예사의 무역부로 옮겼던 것이 패션 및 액세서리 등 잡화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차 회장은 34세인 1992년 4월에 독립하여 액세서리 제조 및 무역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차스 무역’을 설립했다. 그는 바이어 발굴을 위해 미국과 일본, 독일, 영국 등 해외전시회를 뛰어다녔다. 그 결과, 창업 3년 만인 1994년도에 무역의 날 100만 달러의 수출탑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그의 액세서리 사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저임금으로 대량생산하는 중국산 액세서리가 세계시장을 점유하면서 차스무역의 매출이 급감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이었던 의류와 신발, 액세서리 등의 공장을 동남아 등지로 이전하는 붐이 일고 있었다. 그도 액세서리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투자라고 판단했다.

그가 눈독을 두었던 해외투자지역은 중국과 필리핀, 베트남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당시 미국의 적성 국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생산된 물품을 미국시장에 내다 팔 수가 없어서 제외했다. 필리핀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섣불리 투자하기가 겁이 났다. 1995년부터 한국 액세서리제조업체들은 중국 청도지역으로 공장이전이 봇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첫 번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분석했다. 1994년에 상해 장가향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거래처 사장이 그에게 이우(義鳥)시로 가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상해에서 이우시까지 열차로 7시간 정도 걸릴 정도로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국도만 있을 뿐 고속도로도 없었다. 특히 중국지도에서 이우시가 표기되지 안될 정도로 오지(奧地)였다.

 

이우시 잠재력 눈여겨봐…1995년 한국인 최초 투자

 

그렇지만 차 회장은 이우시의 잠재력을 눈여겨봤다. 이우시는 항구도시 닝보(寧波)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2시간 정도 걸리지만 증지세(부가세)는 다른 지역에 비해 17%정도 면제되는 등 장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우시에서는 잡화 등의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갖고 있었다. 차 회장은 액세서리 공장을 이우시로 옮기기로 결정 했다.

38세였던 1995년 6월에 중국 이우시에 한국인 최초 외국인 투자법인 중국절강이우차씨공무유한공사(中國浙江義鳥車氏工貿有限公司)를 세웠다. 법인명에 공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액세서리 제조 및 무역을 병행할 수 있음을 허가한 것이다.

1998년에는 광동성 심천시에 지사를, 1999년에는 미국 뉴욕시에 판매법인 CHAS TRADING INC를 각각 설립했다. 2000년에는 가족 모두 뉴저지 버겐가운티로 이민을 갔던 그는 기술개발과 시장개척, 품질향상 등에 심혈을 쏟았다.

본사에 상품개발실을 운영하고 미국현지법인을 통하여 경쟁사의 상품동향을 파악한 뒤 기존바이어 관리 및 신규바이어 발굴을 병행했다. 차 회장이 구축한 액세서리 시스템은 한국에서 고급인력과 원·부자재를 중국으로 보내서 해외로 수출을 하는 형태로 사업을 전환했다.

차 회장이 생산한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살아나면서 미국에서도 대량 판매가 이뤄졌다. 특히 여성용 액세서리와 스카프, 모자, 가방 등을 직접 제조하거나 주문자 상표 부착생산(OEM), 중개무역 등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로 수출했다. 이러한 호황 때문에 연간 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사업이 잘 됐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발생 이후, 매출이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창사 이래 두 번째의 위기를 맞았다. 게다가 그가 중국에 와서 경험했던 언어·제도·정책·문화의 장벽 때문에 수 차례 부도의 위기에 내몰렸다. 이때마다 그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온갖 역경을 이겨냈다. 그는 미국 현지법인을 폐쇄하고 제조업에서 중개 무역업으로 사업구조를 전환했다. 이처럼 사업구조를 바꿀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 전역의 액세서리 제조 업체들이 이우시에 매장을 확보하고 안테나숍을 운영했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이 있는 제품을 수집하기가 수월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발생…중개무역 사업구조 전환

 

세계 전역에서 저렴한 물건을 사러 이우시를 방문하는 바이어가 많아지고, 더 많은 손님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내 업체들끼리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다른 지역보다 20%정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됐다.

바이어 입장에서도 국제전시회장에 가면 대량 주문만이 가능한데 반해, 이우시에서는 1~2박스 정도의 소량을 구매해 소비자의 반응을 지켜본 뒤 추가 주문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월마트와 다이소, 롯데마트 등 전세계 생필품 바이어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더욱이 이우시가 세계의 생필품 공급시장으로 부각되면서 중국 전역으로 수송되는 물류망이 구축됐다.

예컨대 이우시를 기점으로 항주와 소주, 남경과 북경 등으로 이어지거나 절강성 광동성 복건성 등을 경유하여 광주로 이어지는 중국 남부 철도망이 형성됐다.

 

중국 건설업체와 부동산 투자로 성공신화 대열 동참

 

중국 진출 후 그는 우연한 기회에 부동산 관련 일들을 접하게 되었고 성과도 좋은 편이었다. 우선 외국인 개인에게 땅을 팔지 않던 이우시 지방정부가 그에게 4,000㎡와 6,600㎡ 등 공업용지 2곳을 불하해줬다. 그의 성실함과 뛰어난 비즈니스를 눈여겨 본 뒤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는 2003년 호자이공업구 4,000㎡ 부지에 ㄱ자 모양으로 공장 겸 사무실을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연건평 1만㎡) 규모의 이 건물에는 기숙사 및 사내식당, 실내체육관 등을 짓는 등 사내 복지에도 신경을 썼다. 현재는 건물의 상당수는 임대를 주고 있다. 이어 이팅구(義停)공업구 6,600㎡에 건물을 지어 분양하는데 성공했다.

차 회장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안정적인 생산 및 판매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재미교포 출신 등 10개사와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상공업원(韓商工業院)을 설립했다. 그는 2004년에 절강성 이우시에 2,000만 달러의 지분 투자하여 중국의 건설회사와 손잡고 아파트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분양에 성공했다.

2007년에는 강소수이한상공업원(江蘇首義韓商工業院)을 설립, 이우에서 백화점과 호텔, 물류회사, 부동산개발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이우그룹 위한평(餘漢平)회장과 30%대 70%의 비율로 강소성 숙천시(宿迁市) 55만5,000㎡의 부지에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그는 이우그룹에 ‘산업단지에 한국기업들을 대거 유치하려면 공사를 한국 건설업체에 맡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 포스코 건설이 중국 공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중국 사회와 경영 환경에 익숙하지 않는 한국기업들에게 법무 및 세무·수출입·경비·보안 등 부대업무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산업단지 조성은 숙천시 정부가 파격적인 가격으로 토지를 공급해줬기 때문에 ㎡당 800위안으로 분양, 대성공을 거뒀다. 다만 50만㎡규모의 산업단지 추가개발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발생으로 포기했다.

그는 2005년에 구주건설과 1억 달러의 지분 투자해 이우시 국제상무성 옆에 오피스텔 2동 300세대와 상가 2,800개를 분양하는 ‘금복원 상가 개발 사업’에 참여했으나 당국의 정책 변화로 실패했다. 금복원 상가 개발은 국영시장의 문제점을 보완, 이우시 최초의 민영시장으로 허가를 받은 프로젝트였다. 당시만 해도 이우시에는 국영시장만 존재했었다.

일명 ‘푸덴 시장’으로 일컫는 국영시장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번째 문제점은 국영시장의 운영시간이 공무원의 근무 시간에 맞춰 아침 9시에 문을 연 뒤 오후 4시면 폐점한다는 점이었다. 상인들이 새벽 또는 오후 장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둘째, 국영시장의 연 임대료는 9㎡당 50만~70만 위안인데다 5년 주기로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에 반해 ‘금복원 프로젝트’는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매장의 개·폐점 시간을 상인이 맘대로 할 수 있게 하고, 분양가를 20㎡당 120만~180만 위안으로 책정했다. 국영시장에서 3년간 내는 임대료면 금복원 상가의 점포를 살 수 있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추진한 구주건설은 중국 절강성에서 최초, 최대 규모로 민영시장을 건설한 경험이 풍부한 회사였다.

 

중국 첫 민영시장 건설투자…당서기 교체로 쓴맛봐

 

구주건설은 이우시 국제상무성 옆에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에 비해 6배나 큰 민영상가를 건설하고자, 토지 14만 5,000여 평(중국 평수)을 확보해 30억 달러를 투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차 회장은 한인들을 규합해 1억 달러의 지분을 투자했다.

그는 구주건설과 담판을 벌여 민영시장의 노른자위 매장을 선점했다. 이러한 메리트 때문에 이우시에 터전을 잡고 있던 사업가들과 한국 동대문상인들이 대거 분양을 받아 입주했다. 차 회장도 그동안 벌었던 돈을 투입해 20개의 매장을 확보했다. 그의 구상은 ‘금복원 상가’를 기반으로,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계한인무역협회의 회원들이 만든 제품을 이우시로 가져와 중국 내수시장은 물론 전 세계로 수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는 이우시 정부가 외국상품을 구매하면 물류, 통관까지 모든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데다 부가세 면세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엄청난 시세차익을 낼 것으로 내다봤다. 물건만 좋으면 중국 내수시장은 물론 세계시장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와 같은 최적의 장소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꿈은 2009년 이우시 당서기가 교체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우시 정부는 민영시장의 개발로 국영시장의 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며 도매시장으로 허가를 받은 금복원을 소매영업 허가로 바꿔 버렸다. 게다가 금복원의 매장을 갖고 있는 국영시장의 상인들에게는 푸텐 시장의 임대권을 박탈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때문에 푸텐 시장의 임대권을 갖고 있으면서 금복원 매장을 분양받았던 상인들은 급매물로 매장을 내놓으면서 상당수의 매장이 텅비었다. 개장 1년 때만 해도 프리미엄이 10%까지 올랐던 금복원 상가는 이러한 이우시 정부의 조치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복원 입주상인들은 민영시장 활성화를 위해 영화관과

뷰티 서플라이 생산 수출


색조화장품 미국 수출


식품관, 쇼핑몰, 전시장과 사무실을 함께하는 O2O 등을 입주시키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고 침체상태에 빠졌다. 차 회장의 부동산 개발은 초기에 엄청난 이익을 봤으나 미국발 금융위기와 이우시 민영시장 정책의 변화로 빛을 잃었다.

 

 

중저가 화장품 생산업체 투자… 북미 시장 판매 독점권 따내

 

2017년에도 기존의 액세서리 분야 외에 화장품 분야에 진출했다. 지금까지 취급해 왔던 품목이 대부분 여성을 겨냥한 제품이기 때문에 화장품 사업이 기존 고객과 자연스럽게 매칭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기존의 로만틱 화장품을 생산하는 절강구낙화장품유한공사 (折江歐諾化粧品有限公司)에 100만 달러를 투자, 북미 및 캐나다 시장의 판매 독점권을 따냈다. 차 회장은 2018년에 미국 LA에 지사를 설치하는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차 회장의 경영비결은 끊임없이 중국은 물론 세계 소비성향과 기업경영, 생산 활동 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해외기업은 물론 중국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밖에 없는 수익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 한국인 투자 기업을 경영하는 차 회장은 이우시 정부로부터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심혈을 쏟았다. 이를 토대로 그는 2005년부터 2년간 이우한국상공인회 회장을 지냈다. 2006년에 창립된 이우한인회 초대회장과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한인무역협회 이우지회장을 맡았다. 그는 사회활동 기간 동안 이우시에 거주하는 재중 또는 조선족들한테 발생하는 잡다한 일을 뒤치다꺼리하는 해결사의 역할을 했다. 현지 관리 및 공안 등의 관시를 이용, 난감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이후, 차 회장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한인무역협회 수석부회장직과 세계한인무역협회 GBC 초대센터장을 맡았다.

2016년 10월에는 세계한인무역협회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으나 일신상의 이유로 물러난 바 있다.

차 회장은 열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 탄탄하게 기반을 잡은 한국기업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액세서리 제품


봉제라인 생산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