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수상자 -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이 연 수 유비바이오 회장
생녹용 건조기 세계 최초 개발 뉴질랜드 진출
이연수 유비바이오 회장(69)은 군 제대 후 1975년에 둘째 형이 운영하던 파고다 무역에 입사했다. 그의 업무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지역의 한의원을 대상으로 녹용을 팔았다. 그는 시간만 나면 거래하던 한의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녹용 및 한약 재료의 특성 등을 공부했다.
당시 한국의 녹용시장은 세계 녹용의 80%를 소비하는 최대 시장인데다 매년 15%정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정도로 전망이 밝았다. 다만 당시 국내 소비자들의 대부분은 추운 지방에 사는 북방지역의 사슴뿔 효능이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녹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이연수 회장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산 순록은 약용가치가 떨어졌으며 캐나다산 녹용은 검역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취급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관심을 가진 녹용은 뉴질랜드산이었다. 다만 뉴질랜드산 녹용의 단점은 생녹용을 건조하는 과정에 녹용이 썩는 관계로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약방은 물론, 서울 한약재 시장에서 뉴질랜드산 녹용은 푸대접을 받았다.
뉴질랜드산 녹용 건조기 개발 도전해 성공
그는 새로운 건조기술을 통한 질 좋은 뉴질랜드산 녹용을 가져온다면 상품가치가 충분해 시장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다. 그는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생녹용을 제대로 건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별별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예컨대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지피고 난 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생녹용을 이불에 덮어 건조해보는 실험을 했지만 색이 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유리관 안에 생녹용을 넣고 뜨거운 열을 가하여 건조해봤지만 역시 썩고 색이 변했다. 국내에 사슴을 키우는 사슴농장 등을 쫓아다니며 생녹용을 수집하여 어떻게 건조하면 좋은 색과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숱하게 고민했다.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은 뒤 그는 기적적으로 생녹용 건조방법을 찾았다. 우연히 경기도에 있는 계란 부화기 생산업체를 알게 됐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녹용 건조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는 계란부하기 업체에 자신이 구상한 생녹용 건조방법을 설명해주고, 거기에 합당한 기계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부탁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은 후 드디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능이 좋은 생녹용 건조기계를 만들었다.
이민초기 현지인과의 언어 소통이 장애물
녹용건조기계를 개발하면서 그의 인생도 변화했다. 둘째 형님과 거래하던 뉴질랜드의 녹용유통업체, 그의 녹용가공기술을 합쳐서 뉴질랜드 현지회사인 스태그 코퍼레이션(Stag Corporation) 등과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는 녹용 건조기술자로 1980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그가 정착했던 곳은 합작회사가 있던 뉴질랜드 북(北)섬의 오지(奧地) 롱거티아였다.
그의 뉴질랜드 이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첫 번째 어려움은 현지인과의 대화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 손에는 영한사전을, 또 다른 손에는 한영사전을 들고 현지 기술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때 얻어진 그의 별명이 ‘나는 할 수 있어(No, Problem)’였다. 현지 기술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영한사전’을 내밀었다. 그가 말하는 영어단어를 찾아주면 이 대표가 거기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찾아 주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그가 녹용 관련 전문지식을 주제로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어려움은 뉴질랜드에서 녹용은 먹을 수 없는 ‘혐오식품’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일이었다. 사슴뿔을 잘라 먹는 야만인이라는 눈총을 따갑게 받았다. 그는 현지인들을 상대로 사슴뿔이 몸에 좋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일이 힘들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녹용건조 관련, 세계적인 특허기술을 취득했던 그는 녹용건조기술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자’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그가 획득한 녹용건조방법의 국제특허는 ‘녹혈냉동건조’와 ‘녹용효소분해’ 등이다. 녹혈냉동건조 기술은 녹용 뿔을 절단하는 시기에 사슴 수컷의 피만 수거해 이를 위생적으로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동결 건조하는 공법을 개발해 특허를 냈다. 녹용효소분해는 녹용 뿔을 절단하는 과정에서 뿔 부스러기를 버리는 것이 아까워 효소를 활용하여 소화를 쉽게 도와주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계내금(닭똥집)을 이용, 효소를 만들어 단백질이 분해돼 몸에 흡수가 잘 되는 제품을 만들었다.
그는 1983년도에 호키티카로 이주하여 National Deer Horn 회사를 창립, 녹용을 가공 수출 전문공장을 세우면서 아내와 딸 등 가족들을 초청했다. 1987년에는 가공생산허가(PH220)를 취득했다. 그는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 제1공장을 설립하는 것을 계기로 호키티카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이주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쓰레기에서 금 찾아
그는 ‘쓰레기는 금이다’라는 발상의 전환으로 제품을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있다. 상품가치가 없어서 쓰레기로 버리는 녹용 뿔과 녹혈(사슴 피), 사슴 태반 등을 수출상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뉴질랜드에서는 사슴피를 버리기 위해 막대한 하수처리비용을 투입했다. 그는 이 녹혈을 수거, 동결 건조한 다음, 제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는 녹용건조에 필요한 기계를 만든 합작회사의 냉동기술자와 협력하여 녹용을 건조하는 가습제를 만들었다. 기술개발 과정에서 가습제의 바람 세기와 온도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생녹용을 숱하게 썩혀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술개발에 매달렸던 결과, 세계에서 제일 품질이 좋은 상품을 제조하게 되었다. 이 회장은 1992년에는 몽골과 소련, 1995년에는 캐나다, 미국 등지를 다니며 녹용과 녹각을 사서 홍콩 및 한국에 수출 하였다. 1994년에서 1998년 사이에는 녹혈, 동결건조기술, 녹용효소 분해공법을 노르웨이, 스웨덴, 캐나다, 미국, 호주, 한국에 특허를 획득했다.
그는 전문적인 기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녹용이 사람의 몸에 좋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준히 제품개발에 심혈을 쏟았다.
사슴태반이 자궁이 약한 여성 등에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추출해서 캡슐로 만들어 중국에 팔았다. 녹용과 인삼, 사슴 뼈를 강아지 영양제로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지인들은 그를 뉴질랜드 사슴농장의 농부에게 ‘부(富)를 가져다 준 은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1997년에 그는 건조공장에만 만족하지 않고 녹용을 편리하게 먹을 수 있도록 캡슐로 만드는 2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뉴질랜드 정부(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rest)로 부터 녹용 및 녹혈가공, 식품 생산 및 수출업체 승인을 획득했다. 더 나아가 정부기관인 MPI(Ministry for Primary Industries)로부터 건강기능식품 생산과 수출업체에게 승인해주는 품질관리시스템(RMP: Risk Management Program-일종의 GMP) 인증을 획득했다. 이밖에 미국 식품의약청(USFDA)에 녹용, 녹혈 가공식품 및 기타 가공식품 수출업체로 등록했다.
한국 녹용소비량의 20% 공급… 미국 등 10개국에 수출
2006년에는 건강식품가공업을 추가하면서 회사의 이름도 유비 바이오로 바꿨다. 녹용과 녹혈, 홍합, 초유 등의 재료를 활용, 스테미너, 비타민, 어린이 건강&성장, 관절건강, 면역력 및 황산화 등 24종과 반려동물건강 상품 4종류를 생산하고 있다. 그는 한국은 물론, 영국, 미국과 중동, 이스라엘 등 10여 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이 공로로 2011년 3월에 지식경제부장관상을 받았다. 올해로 창립 38주년을 맞는 유비바이오는 한국 전체 녹용 소비량의 20% 이상을 꾸준히 공급하고 있다. 당시 뉴질랜드에서 한해 녹용 500톤 중, 이 회장의 회사에서 1/5정도의 물량을 처리할 정도였다.
크라이스트처치에는 녹용건조공장이 24개 정도 있었으나 1997년 IMF때 대부분이 도산했고, 현재 4개 공장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녹용 전도사’였던 이 회장의 삶이 추운 지방의 사슴뿔이 약효가 뛰어나다는 한국 소비자의 인식을 바꿨던 것이다. 이처럼 기술개발 등에 힘입어 유비바이오의 녹용 및 녹혈의 가공기술은 세계 최고의 입지를 다졌다.
이 사장이 뉴질랜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녹용가공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요인은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한 덕분이었다. 이 공로로 2007년 10월에 산업자원부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그의 경영철학은 정직과 성실, 봉사의 자세로 임직원 가족이 먼저 복용한다는 마음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
그는 1998년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 평화통일자문회의를 시작으로 봉사활동을 참여했다. 2005년에 세계한인무역협회(OKTA:옥타) 크라이스트처치의 지회장을 맡았다. 2007년에는 중국 연길시 경제특사 및 홍보대사로 위촉됐으며 옥타 15·16대 상임집행위원(부회장)을 역임했다.
뒤늦게 옥타 활동을 했지만 성실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일하는 그의 모습에 반했던 옥타 회원들은 2014년부터 그를 18대 감사로 선출했다.
2010년에 크라이스트처치 한 교민 가정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 당시 한인회장과 몇몇 의견이 같은 분들과 한인 사회를 도울 수 있는 봉사단체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17명의 봉사자들과 정신 상담 및 법률에 관한 교육을 받던 중 2010년 7월에 강진이 발생하면서 뉴질랜드 한인들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이 컸다. 그는 바로 코리안 헬프라인을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지진 피해 교민 치유 앞장… 엘리자베스 여왕 공로 훈장 받아
코리안 헬프라인(www.koreanhelpline.org.nz)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1년 2월 22일 낮 1시에 6.3의 강진이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을 강타하여 185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등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였다. 이연수 회장을 중심으로 헬프라인 회원들은 지진 피해를 입은 교민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불면증과 공포·불안증 등 트라우마의 치유에 성심껏 도왔다. 그 이전부터 청년들의 멘토와 봉사로 코리안 커뮤니티에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그는 이 공로로 2011년 9월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그의 경영철학은 한번 맺은 인연을 중시하는 점과 끊임없는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가 뉴질랜드로 이주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독보적인 녹용축출기술을 확보한 것과 세계적인 인적 자산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2016수상자 -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이 연 수 유비바이오 회장
생녹용 건조기 세계 최초 개발 뉴질랜드 진출
이연수 유비바이오 회장(69)은 군 제대 후 1975년에 둘째 형이 운영하던 파고다 무역에 입사했다. 그의 업무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지역의 한의원을 대상으로 녹용을 팔았다. 그는 시간만 나면 거래하던 한의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녹용 및 한약 재료의 특성 등을 공부했다.
당시 한국의 녹용시장은 세계 녹용의 80%를 소비하는 최대 시장인데다 매년 15%정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정도로 전망이 밝았다. 다만 당시 국내 소비자들의 대부분은 추운 지방에 사는 북방지역의 사슴뿔 효능이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녹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이연수 회장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산 순록은 약용가치가 떨어졌으며 캐나다산 녹용은 검역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취급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관심을 가진 녹용은 뉴질랜드산이었다. 다만 뉴질랜드산 녹용의 단점은 생녹용을 건조하는 과정에 녹용이 썩는 관계로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약방은 물론, 서울 한약재 시장에서 뉴질랜드산 녹용은 푸대접을 받았다.
뉴질랜드산 녹용 건조기 개발 도전해 성공
그는 새로운 건조기술을 통한 질 좋은 뉴질랜드산 녹용을 가져온다면 상품가치가 충분해 시장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다. 그는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생녹용을 제대로 건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별별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예컨대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지피고 난 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생녹용을 이불에 덮어 건조해보는 실험을 했지만 색이 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유리관 안에 생녹용을 넣고 뜨거운 열을 가하여 건조해봤지만 역시 썩고 색이 변했다. 국내에 사슴을 키우는 사슴농장 등을 쫓아다니며 생녹용을 수집하여 어떻게 건조하면 좋은 색과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숱하게 고민했다.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은 뒤 그는 기적적으로 생녹용 건조방법을 찾았다. 우연히 경기도에 있는 계란 부화기 생산업체를 알게 됐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녹용 건조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는 계란부하기 업체에 자신이 구상한 생녹용 건조방법을 설명해주고, 거기에 합당한 기계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부탁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은 후 드디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능이 좋은 생녹용 건조기계를 만들었다.
이민초기 현지인과의 언어 소통이 장애물
녹용건조기계를 개발하면서 그의 인생도 변화했다. 둘째 형님과 거래하던 뉴질랜드의 녹용유통업체, 그의 녹용가공기술을 합쳐서 뉴질랜드 현지회사인 스태그 코퍼레이션(Stag Corporation) 등과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는 녹용 건조기술자로 1980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그가 정착했던 곳은 합작회사가 있던 뉴질랜드 북(北)섬의 오지(奧地) 롱거티아였다.
그의 뉴질랜드 이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첫 번째 어려움은 현지인과의 대화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 손에는 영한사전을, 또 다른 손에는 한영사전을 들고 현지 기술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때 얻어진 그의 별명이 ‘나는 할 수 있어(No, Problem)’였다. 현지 기술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영한사전’을 내밀었다. 그가 말하는 영어단어를 찾아주면 이 대표가 거기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찾아 주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그가 녹용 관련 전문지식을 주제로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어려움은 뉴질랜드에서 녹용은 먹을 수 없는 ‘혐오식품’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일이었다. 사슴뿔을 잘라 먹는 야만인이라는 눈총을 따갑게 받았다. 그는 현지인들을 상대로 사슴뿔이 몸에 좋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일이 힘들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녹용건조 관련, 세계적인 특허기술을 취득했던 그는 녹용건조기술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자’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그가 획득한 녹용건조방법의 국제특허는 ‘녹혈냉동건조’와 ‘녹용효소분해’ 등이다. 녹혈냉동건조 기술은 녹용 뿔을 절단하는 시기에 사슴 수컷의 피만 수거해 이를 위생적으로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동결 건조하는 공법을 개발해 특허를 냈다. 녹용효소분해는 녹용 뿔을 절단하는 과정에서 뿔 부스러기를 버리는 것이 아까워 효소를 활용하여 소화를 쉽게 도와주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계내금(닭똥집)을 이용, 효소를 만들어 단백질이 분해돼 몸에 흡수가 잘 되는 제품을 만들었다.
그는 1983년도에 호키티카로 이주하여 National Deer Horn 회사를 창립, 녹용을 가공 수출 전문공장을 세우면서 아내와 딸 등 가족들을 초청했다. 1987년에는 가공생산허가(PH220)를 취득했다. 그는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 제1공장을 설립하는 것을 계기로 호키티카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이주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쓰레기에서 금 찾아
그는 ‘쓰레기는 금이다’라는 발상의 전환으로 제품을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있다. 상품가치가 없어서 쓰레기로 버리는 녹용 뿔과 녹혈(사슴 피), 사슴 태반 등을 수출상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뉴질랜드에서는 사슴피를 버리기 위해 막대한 하수처리비용을 투입했다. 그는 이 녹혈을 수거, 동결 건조한 다음, 제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는 녹용건조에 필요한 기계를 만든 합작회사의 냉동기술자와 협력하여 녹용을 건조하는 가습제를 만들었다. 기술개발 과정에서 가습제의 바람 세기와 온도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생녹용을 숱하게 썩혀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술개발에 매달렸던 결과, 세계에서 제일 품질이 좋은 상품을 제조하게 되었다. 이 회장은 1992년에는 몽골과 소련, 1995년에는 캐나다, 미국 등지를 다니며 녹용과 녹각을 사서 홍콩 및 한국에 수출 하였다. 1994년에서 1998년 사이에는 녹혈, 동결건조기술, 녹용효소 분해공법을 노르웨이, 스웨덴, 캐나다, 미국, 호주, 한국에 특허를 획득했다.
그는 전문적인 기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녹용이 사람의 몸에 좋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준히 제품개발에 심혈을 쏟았다.
사슴태반이 자궁이 약한 여성 등에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추출해서 캡슐로 만들어 중국에 팔았다. 녹용과 인삼, 사슴 뼈를 강아지 영양제로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지인들은 그를 뉴질랜드 사슴농장의 농부에게 ‘부(富)를 가져다 준 은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1997년에 그는 건조공장에만 만족하지 않고 녹용을 편리하게 먹을 수 있도록 캡슐로 만드는 2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뉴질랜드 정부(Ministry of Agriculture and Forest)로 부터 녹용 및 녹혈가공, 식품 생산 및 수출업체 승인을 획득했다. 더 나아가 정부기관인 MPI(Ministry for Primary Industries)로부터 건강기능식품 생산과 수출업체에게 승인해주는 품질관리시스템(RMP: Risk Management Program-일종의 GMP) 인증을 획득했다. 이밖에 미국 식품의약청(USFDA)에 녹용, 녹혈 가공식품 및 기타 가공식품 수출업체로 등록했다.
한국 녹용소비량의 20% 공급… 미국 등 10개국에 수출
2006년에는 건강식품가공업을 추가하면서 회사의 이름도 유비 바이오로 바꿨다. 녹용과 녹혈, 홍합, 초유 등의 재료를 활용, 스테미너, 비타민, 어린이 건강&성장, 관절건강, 면역력 및 황산화 등 24종과 반려동물건강 상품 4종류를 생산하고 있다. 그는 한국은 물론, 영국, 미국과 중동, 이스라엘 등 10여 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이 공로로 2011년 3월에 지식경제부장관상을 받았다. 올해로 창립 38주년을 맞는 유비바이오는 한국 전체 녹용 소비량의 20% 이상을 꾸준히 공급하고 있다. 당시 뉴질랜드에서 한해 녹용 500톤 중, 이 회장의 회사에서 1/5정도의 물량을 처리할 정도였다.
크라이스트처치에는 녹용건조공장이 24개 정도 있었으나 1997년 IMF때 대부분이 도산했고, 현재 4개 공장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녹용 전도사’였던 이 회장의 삶이 추운 지방의 사슴뿔이 약효가 뛰어나다는 한국 소비자의 인식을 바꿨던 것이다. 이처럼 기술개발 등에 힘입어 유비바이오의 녹용 및 녹혈의 가공기술은 세계 최고의 입지를 다졌다.
이 사장이 뉴질랜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녹용가공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요인은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한 덕분이었다. 이 공로로 2007년 10월에 산업자원부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그의 경영철학은 정직과 성실, 봉사의 자세로 임직원 가족이 먼저 복용한다는 마음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
그는 1998년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 평화통일자문회의를 시작으로 봉사활동을 참여했다. 2005년에 세계한인무역협회(OKTA:옥타) 크라이스트처치의 지회장을 맡았다. 2007년에는 중국 연길시 경제특사 및 홍보대사로 위촉됐으며 옥타 15·16대 상임집행위원(부회장)을 역임했다.
뒤늦게 옥타 활동을 했지만 성실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일하는 그의 모습에 반했던 옥타 회원들은 2014년부터 그를 18대 감사로 선출했다.
2010년에 크라이스트처치 한 교민 가정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 당시 한인회장과 몇몇 의견이 같은 분들과 한인 사회를 도울 수 있는 봉사단체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17명의 봉사자들과 정신 상담 및 법률에 관한 교육을 받던 중 2010년 7월에 강진이 발생하면서 뉴질랜드 한인들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이 컸다. 그는 바로 코리안 헬프라인을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지진 피해 교민 치유 앞장… 엘리자베스 여왕 공로 훈장 받아
코리안 헬프라인(www.koreanhelpline.org.nz)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1년 2월 22일 낮 1시에 6.3의 강진이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을 강타하여 185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등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였다. 이연수 회장을 중심으로 헬프라인 회원들은 지진 피해를 입은 교민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불면증과 공포·불안증 등 트라우마의 치유에 성심껏 도왔다. 그 이전부터 청년들의 멘토와 봉사로 코리안 커뮤니티에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그는 이 공로로 2011년 9월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그의 경영철학은 한번 맺은 인연을 중시하는 점과 끊임없는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가 뉴질랜드로 이주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독보적인 녹용축출기술을 확보한 것과 세계적인 인적 자산을 확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