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우수상)
이재구 아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 회장(중국)
중국 중심 동아시아 물류 ‧ 유통망 구축 사업다각화
이재구 아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 회장은 (주)대우중공업에 입사 후 3년 만에 지방으로 발령이 나자, 회사를 그만두고 동대문상가에 의류도매점을 내고 일본 및 남미 등지로 의류를 수출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콩고 시장 개척 출국…우연히 중국 방문 기회 얻어
그가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88년 10월에 아프리카의 의류시장개척을 위해 홍콩으로 출국, 콩고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고자 잠시 체류했었다. 그 당시 홍콩에서 여행사를 하던 지인이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하고 관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어려울 수 있다. 앞으로 중국과 수교될 움직임도 있고 하니 이번 기회에 북경을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중국시장을 개척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이 회장은 일본에 의류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중국의 값싼 의류 제품들이 일본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어차피 중국과 경쟁을 해야 할 입장이라면 하루 빨리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아래 홍콩에서 중국 비자를 발급받아 북경을 방문했다. 그런데 막상 북경에 도착해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공항대합실에서 9시간이나 기다렸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구사할 줄 몰랐던 그였지만, 암담한 상황에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지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뭔가를 찾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는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북경시내로 들어오던 순간, 도로변에 한글로 된 호텔의 간판을 봤다. 기사에게 몸짓으로 택시를 스톱시키고 무작정 도로를 무단으로 건너갔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달러를 인민폐로 바꿔 택시비를 지급했다. 그는 호텔방에서 이런 저런 구상을 한 뒤 조선족 교포 청년을 만나서 통역 업무를 맡겼다.
그는 중국 인민일보에 ‘한국에서 온 이재구라는 사람이 향후 중국에서 사업을 같이 할 파트너를 찾고 싶다’는 명함 크기의 광고를 냈다. 많은 중국인들이 광고를 보고 그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왔다. 당시 88올림픽 개최국이었던 한국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서 호텔 부속실 3개를 더 확충하고 한족 직원을 채용, 상담했다. 그는 당시 많은 중국인과 상담을 하면서 중국인의 습관, 생활태도는 물론, 외국인을 대하는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면접을 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사업가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북경 동성구 왕푸징 백화점에 ‘한미시장점’을 개설, 합작 운영한 것이 중국 진출의 계기가 됐다.
1991년에는 천진탕고국제터미널에 한국상품도매시장을 개설, 운영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이 회장은 인구도 많고 땅이 큰 중국과 사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중국시장을 개척했다. 그는 1992년에는 국제터미널 도로변 인근 580㎡규모 건물을 지어 한국상품도매시장으로 1998년까지 운영했다.
IMF때 중국 육상 및 해상 항공 복합물류망 구축
이 회장이 중국에서 육상 및 해상, 항공 등 복합 물류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97년 IMF금융위기였다. 당시 국내소비가 얼어붙으면서 대부분의 의류회사들이 만든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재고가 쌓였고, 이를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이 회장은 부도난 업체들이 ‘땡 처리’하는 상품들을 t당으로 헐값에 사들였다. 중국으로 보낸 상품은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판매망을 통해 제 값을 받고 팔았다. 이 회장은 80여 명의 보따리 무역상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전역으로 물건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중국은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유통물류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상당부분을 보따리무역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천을 기점으로 중국 위해와 연태, 천진, 대련, 청도, 단동 등지로 대형 카페리가 투입되면서 한중을 잇는 보따리 무역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들 보따리 무역상들과도 연대하여 싼값에 재고 상품(의류 등)을 매입해 중국 현지에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중국 천진과 대련, 심양, 장춘 등지로 한국산 의류제품을 보내 유통시켰다.
이 회장이 안착한 곳은 중국 천진에 이어 대련이었다. 인천과 대련을 잇는 카페리선박이 1995년에 투입될 때 그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련역 앞의 여관을 임대하여 동대문상인들이 입주, 장사할 수 있도록 중국대련한국복장도매시장을 조성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대련한국상인회장 겸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이 회장이 두 번째 안착한 곳이 동북지역의 중심인 심양이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변호사 2명과 회계사 3명을 둔 컨설팅 회사였던 심양화기상무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104개 회사를 설립해주고 28개 업체의 재무회계 기장업무를 맡았다. 그는 이때 중국의 법률 체계를 공부하면서 무역과 부동산, 기업경영 등 실무에 필요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고 회고했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심양현대복장유한공사라는 의류공장을 설립, 한국과 일본의 임가공 무역을 전담토록 했다. 이밖에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심양북역 지하에 한국상품도매시장을 조성, 한국인 및 조선족 상인이 운영하는 82개 업체를 입점시켰다. 이러한 상가조성 및 임대분양에 성공한 탓에 이재구 회장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한국에도 알려졌다.
중국심양시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중국심양무역촉진회와 영주상공회의소(풍기 봉화지역) 및 대구상공회의소 회원간의 무역촉진상담회를 주선했다. 특히 그는 중국정부로부터 최초 신용장을 발급을 받아 풍기인삼을 중국 수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풍기 인삼의 수출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산지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형성되는 바람에 수출이 단절됐다.
그는 또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 상해에서 핸드폰 도매상인과 한국 칼라 핸드폰 제조회사간의 무역 상담을 주선했다. 2년에 걸쳐 상담한 결과, 중국휴대폰도매상인들이 삼성과 엘지가 생산한 휴대폰 3,500만 달러를 구입할 수 있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1998년 중국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물류네트워크로 구축하겠다는 원대한 사업목표를 설정했던 이 회장은 기존 사업의 거점이었던 동북지역에서 광주(广州)지역으로 옮겨야겠다고 판단했지만 심양의 임직원들은 반발했다. 그 이유는 심양과 하얼빈, 단동, 대련지역에서 사업이 잘 되고 있는 마당에 굳이 광주(广州)로 본거지를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구 회장은 동북지역에 안주하면 장래가 밝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혼자서 2002년에 광주로 옮겨와서 사무실과 집을 마련한 뒤 아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잘 나가던 중국 동북지방 사업 접고 광주로 이주
그는 당시 중국 전역의 물류 유통망이 광주(广州)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음에 주목했다. 광주지역에는 일년 내내 다양한 국제박람회들이 개최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계의 바이어들이 광주로 대거 몰려오고 있었다. 특히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광주와 심천 지역은 개방개혁정책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품질이 뛰어난 상품을 대량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통화물이 풍부했다. 게다가 대규모 도매시장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매일 새로운 디자인의 상품들이 쏟아졌다. 이처럼 광동성 지역은 중국 국내와 해외로 유통되는 물동량이 넘쳐나고 다양한 형태의 상업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이 회장이 광주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이 지역을 찾아오는 한국인은 대기업 유통회사의 관계자를 제외하면 소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좋은 상품이 많고 소량주문도 가능한데다, 거래조건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까지 운송기간이 20여일 이상 걸린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점이었다. 이처럼 화물운송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중국에서 홍콩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수출통관이 늦어진데다 한국행 선사의 운항일정이 서로 맞지 않아 홍콩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밖에 태풍 발생 등 기상악화 때문에 선박 및 항공기 등이 결항하는 것도 한 몫을 했다.
다른 물류수송수단인 항공편으로 화물을 실어 보낼 경우 광주에서 한국으로 바로 오는 화물기가 없었기 때문에 홍콩으로 제품을 보낸 뒤 화물기에 실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특히 광주에서 심천을 경유하여 홍콩공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국 통관수속이 늦어지거나 대기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공사의 운항시간을 맞춰 적기에 화물을 실을 수가 없었다. 이밖에 한국행 화물량이 포화상태라 매일 예약이 어긋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다음 항공편을 기다려 수송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따라서 매우 비싼 항공요금을 부담하면서 화물기로 화물을 보내더라도 운송기간이 4~5일이나 걸렸기 때문에 항공수송의 이점이 반감됐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 상인들에게는 광주의 시장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상인들을 광주로 불러 들이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저렴한 비용으로 빠른 운송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봤다.
철도-트럭-선박 연계 복합운송노선개발…운송기간 대폭 단축
그는 2003년부터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중국 화남~인천/평택을 직접 잇는 복합운송노선을 개발했다. 중국 화남지역(광주, 중산, 심천, 동관 등)에서 철도 및 트럭을 이용, 화물을 실어와 연태와 위해에서 한국(인천/ 평택)까지 선박으로 운송하는 복합운송노선을 개설했다. 이 루트는 운송시간과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켰다. 왜냐하면 17~23일 걸리던 광주~인천간의 운송기간을 3~5일로 대폭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복합운송노선의 핵심은 특급열차 우정국화물칸을 임대한 것이다. 이는 중국특급우편물과 소포를 운송하는 전용열차이었던 탓에 중국인들에게 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관례를 깨는 독특한 발상이었다. 그는 중국인과의 관시를 활용해 철도와 트럭과 선박을 연계하는 복합운송노선을 개설한 것이 물류업계의 파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복합물류노선의 개설로 운송시간 및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아이엘국제물류는 연태와 상해, 온주, 이우, 청도, 항주 등 18개 지역에 직영 지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는 2005년에 대만인 사업가가 철수하면서 남긴 공장을 광주시 정부로부터 임대를 받아 사무실로 리모델링한 뒤 분양에 성공을 했다. 또한 2012년에는 3개 회사와 합작해 5만㎡의 땅을 시정부로부터 임대하여 광주지역 내 70개 물류업체를 입주시켰다. 중국 아이엘 국제물류회사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
그가 한국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지역까지 물류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종합물류서비스를 펼칠 수 있었던 요인은 25년 동안 국제물류사업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와 IT 자회사를 만들어 자체 특화된 물류 프로그램(www.21nn.com)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고객의 화물정보와 물류관련 제반 업무내용을 데이터화하여 고객의 실정에 맞는 최적의 물류노선과 시스템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운송화물의 실시간 추적과 물류내역을 고객이 직접 관리할 수 있게 했다. 더욱이 고객이 한중간 물류수송 과정에서 업계 최초로 도착 운송일을 지정하는 물류시스템을 개발, 화물의 운송시간과 비용을 대폭 줄였다.
중국-베트남 등 동남아 연계 국제물류노선 구축
이재구 회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006년에 베트남 아이엘 국제 물류회사 지사를 설립했으며 중국-베트남을 잇는 국제육상노선을 개척했다. 중국 우의관-베트남 하노이 국제육상노선에는 자체 차량을 투입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호치민을 잇는 국제노선을 비롯하여 광주~항주/상해~일본 오사카/동경과 광주~연태/위해~한국 인천/ 평택, 광주~천진/랑팡~몽골 울란바트로~러시아 모스코바 노선 외에 광주~중경/성두~미얀마 양곤, 광주~남녕/핑샹~베트남 하노이 /호치민~라오스~캄보디아 등의 노선을 개척했다.
이 회장의 사업영역이 국제물류망에서 국제유통망으로 대폭 확장된 시기는 2015년부터다. 광주와 항주, 사천, 중경, 청두, 난사, 판위 등 7개 지역에 2,000평이 넘는 한국상품 체험관을 잇달아 개설했다. 이들 체험관들은 2017년 2월까지 매출이 증가했다. 그러나 사드 (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노골적인 간섭과 한국 상품불매운동이 겹치면서 매출이 현격하게 감소되면서 중국인들에게 넘겨줬다.
이 회장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정부로부터 전자상거래상품 통관사업 허가를 획득했으며 온라인 하하쇼핑몰을 설립, 중국 소비자들에게 해외 직접 구매대행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노이 근처 산업 및 물류 유통단지 건설
이밖에 광주와 항주, 연태에 보세창고 및 유통단지, 물류단지를 조성하고 부동산 사업에도 진출했다. 2015년부터는 베트남 박장성 지방정부로부터 산업공단 사업 승인을 받아 하노이에 113만㎡에 산업단지를 건설 중이다. 또한 베트남 최초 상업용지 허가 및 산업유통 센터의 조성사업을 승인을 받아 7만㎡의 유통센터를 건설하고 있다. 이밖에 2017년부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유통단지와 보세창고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장이 유일하게 활동하는 사회단체는 2001년에 재중국대한체육회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수석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 제9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재중국선수단장을 맡아 재외동포부분 종합준우승을 받았다.
이재구 회장의 경영철학은 ‘고객에게 신뢰받는 사업파트너로 고객과 함께 발전 한다’와 ‘심고 가꾸는 물류를 지향한다’이다. 그는 ‘인화(人和)와 신속, 적소, 적기의 정확한 배달과 동시에 안전한 물류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고 있다 . 특히 그가 지향하는 ‘안전한 물류’는 마약 등 법적으로 금지하는 부정한 물품을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화물취급 영업소에는 ‘안전하지 못한 물품을 접수하면 회사에서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글이 안내되어 있다. 그는 신속 및 적소, 적기의 정확한 배달을 하겠다는 고객과의 약속은 중국인과의 관시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운영하는 물류회사의 고객 70% 이상이 중국기업가들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적극성과 창의성을 발휘, 끊임없이 연관 사업에 진출, 성공을 거뒀다. 그는 한·중·일 해상무역과 동서교역을 주도했던 장보고 대사의 위업을 이어받아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는 해상 및 항공, 육상 등 종합물류 및 유통망을 구축해 가고 있다.
2017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우수상)
이재구 아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 회장(중국)
중국 중심 동아시아 물류 ‧ 유통망 구축 사업다각화
이재구 아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 회장은 (주)대우중공업에 입사 후 3년 만에 지방으로 발령이 나자, 회사를 그만두고 동대문상가에 의류도매점을 내고 일본 및 남미 등지로 의류를 수출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콩고 시장 개척 출국…우연히 중국 방문 기회 얻어
그가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88년 10월에 아프리카의 의류시장개척을 위해 홍콩으로 출국, 콩고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고자 잠시 체류했었다. 그 당시 홍콩에서 여행사를 하던 지인이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하고 관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어려울 수 있다. 앞으로 중국과 수교될 움직임도 있고 하니 이번 기회에 북경을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중국시장을 개척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이 회장은 일본에 의류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중국의 값싼 의류 제품들이 일본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어차피 중국과 경쟁을 해야 할 입장이라면 하루 빨리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아래 홍콩에서 중국 비자를 발급받아 북경을 방문했다. 그런데 막상 북경에 도착해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공항대합실에서 9시간이나 기다렸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구사할 줄 몰랐던 그였지만, 암담한 상황에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지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뭔가를 찾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는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북경시내로 들어오던 순간, 도로변에 한글로 된 호텔의 간판을 봤다. 기사에게 몸짓으로 택시를 스톱시키고 무작정 도로를 무단으로 건너갔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달러를 인민폐로 바꿔 택시비를 지급했다. 그는 호텔방에서 이런 저런 구상을 한 뒤 조선족 교포 청년을 만나서 통역 업무를 맡겼다.
그는 중국 인민일보에 ‘한국에서 온 이재구라는 사람이 향후 중국에서 사업을 같이 할 파트너를 찾고 싶다’는 명함 크기의 광고를 냈다. 많은 중국인들이 광고를 보고 그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왔다. 당시 88올림픽 개최국이었던 한국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서 호텔 부속실 3개를 더 확충하고 한족 직원을 채용, 상담했다. 그는 당시 많은 중국인과 상담을 하면서 중국인의 습관, 생활태도는 물론, 외국인을 대하는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면접을 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사업가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북경 동성구 왕푸징 백화점에 ‘한미시장점’을 개설, 합작 운영한 것이 중국 진출의 계기가 됐다.
1991년에는 천진탕고국제터미널에 한국상품도매시장을 개설, 운영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이 회장은 인구도 많고 땅이 큰 중국과 사업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중국시장을 개척했다. 그는 1992년에는 국제터미널 도로변 인근 580㎡규모 건물을 지어 한국상품도매시장으로 1998년까지 운영했다.
IMF때 중국 육상 및 해상 항공 복합물류망 구축
이 회장이 중국에서 육상 및 해상, 항공 등 복합 물류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97년 IMF금융위기였다. 당시 국내소비가 얼어붙으면서 대부분의 의류회사들이 만든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재고가 쌓였고, 이를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이 회장은 부도난 업체들이 ‘땡 처리’하는 상품들을 t당으로 헐값에 사들였다. 중국으로 보낸 상품은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판매망을 통해 제 값을 받고 팔았다. 이 회장은 80여 명의 보따리 무역상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전역으로 물건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중국은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유통물류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상당부분을 보따리무역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천을 기점으로 중국 위해와 연태, 천진, 대련, 청도, 단동 등지로 대형 카페리가 투입되면서 한중을 잇는 보따리 무역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들 보따리 무역상들과도 연대하여 싼값에 재고 상품(의류 등)을 매입해 중국 현지에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중국 천진과 대련, 심양, 장춘 등지로 한국산 의류제품을 보내 유통시켰다.
이 회장이 안착한 곳은 중국 천진에 이어 대련이었다. 인천과 대련을 잇는 카페리선박이 1995년에 투입될 때 그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련역 앞의 여관을 임대하여 동대문상인들이 입주, 장사할 수 있도록 중국대련한국복장도매시장을 조성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대련한국상인회장 겸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이 회장이 두 번째 안착한 곳이 동북지역의 중심인 심양이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변호사 2명과 회계사 3명을 둔 컨설팅 회사였던 심양화기상무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104개 회사를 설립해주고 28개 업체의 재무회계 기장업무를 맡았다. 그는 이때 중국의 법률 체계를 공부하면서 무역과 부동산, 기업경영 등 실무에 필요한 지식을 많이 얻었다고 회고했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심양현대복장유한공사라는 의류공장을 설립, 한국과 일본의 임가공 무역을 전담토록 했다. 이밖에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심양북역 지하에 한국상품도매시장을 조성, 한국인 및 조선족 상인이 운영하는 82개 업체를 입점시켰다. 이러한 상가조성 및 임대분양에 성공한 탓에 이재구 회장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한국에도 알려졌다.
중국심양시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중국심양무역촉진회와 영주상공회의소(풍기 봉화지역) 및 대구상공회의소 회원간의 무역촉진상담회를 주선했다. 특히 그는 중국정부로부터 최초 신용장을 발급을 받아 풍기인삼을 중국 수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풍기 인삼의 수출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산지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형성되는 바람에 수출이 단절됐다.
그는 또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 상해에서 핸드폰 도매상인과 한국 칼라 핸드폰 제조회사간의 무역 상담을 주선했다. 2년에 걸쳐 상담한 결과, 중국휴대폰도매상인들이 삼성과 엘지가 생산한 휴대폰 3,500만 달러를 구입할 수 있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1998년 중국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물류네트워크로 구축하겠다는 원대한 사업목표를 설정했던 이 회장은 기존 사업의 거점이었던 동북지역에서 광주(广州)지역으로 옮겨야겠다고 판단했지만 심양의 임직원들은 반발했다. 그 이유는 심양과 하얼빈, 단동, 대련지역에서 사업이 잘 되고 있는 마당에 굳이 광주(广州)로 본거지를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구 회장은 동북지역에 안주하면 장래가 밝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혼자서 2002년에 광주로 옮겨와서 사무실과 집을 마련한 뒤 아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잘 나가던 중국 동북지방 사업 접고 광주로 이주
그는 당시 중국 전역의 물류 유통망이 광주(广州)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음에 주목했다. 광주지역에는 일년 내내 다양한 국제박람회들이 개최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계의 바이어들이 광주로 대거 몰려오고 있었다. 특히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광주와 심천 지역은 개방개혁정책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품질이 뛰어난 상품을 대량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통화물이 풍부했다. 게다가 대규모 도매시장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매일 새로운 디자인의 상품들이 쏟아졌다. 이처럼 광동성 지역은 중국 국내와 해외로 유통되는 물동량이 넘쳐나고 다양한 형태의 상업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이 회장이 광주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이 지역을 찾아오는 한국인은 대기업 유통회사의 관계자를 제외하면 소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좋은 상품이 많고 소량주문도 가능한데다, 거래조건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까지 운송기간이 20여일 이상 걸린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점이었다. 이처럼 화물운송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중국에서 홍콩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수출통관이 늦어진데다 한국행 선사의 운항일정이 서로 맞지 않아 홍콩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밖에 태풍 발생 등 기상악화 때문에 선박 및 항공기 등이 결항하는 것도 한 몫을 했다.
다른 물류수송수단인 항공편으로 화물을 실어 보낼 경우 광주에서 한국으로 바로 오는 화물기가 없었기 때문에 홍콩으로 제품을 보낸 뒤 화물기에 실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특히 광주에서 심천을 경유하여 홍콩공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국 통관수속이 늦어지거나 대기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공사의 운항시간을 맞춰 적기에 화물을 실을 수가 없었다. 이밖에 한국행 화물량이 포화상태라 매일 예약이 어긋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다음 항공편을 기다려 수송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따라서 매우 비싼 항공요금을 부담하면서 화물기로 화물을 보내더라도 운송기간이 4~5일이나 걸렸기 때문에 항공수송의 이점이 반감됐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 상인들에게는 광주의 시장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상인들을 광주로 불러 들이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저렴한 비용으로 빠른 운송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봤다.
철도-트럭-선박 연계 복합운송노선개발…운송기간 대폭 단축
그는 2003년부터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중국 화남~인천/평택을 직접 잇는 복합운송노선을 개발했다. 중국 화남지역(광주, 중산, 심천, 동관 등)에서 철도 및 트럭을 이용, 화물을 실어와 연태와 위해에서 한국(인천/ 평택)까지 선박으로 운송하는 복합운송노선을 개설했다. 이 루트는 운송시간과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켰다. 왜냐하면 17~23일 걸리던 광주~인천간의 운송기간을 3~5일로 대폭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복합운송노선의 핵심은 특급열차 우정국화물칸을 임대한 것이다. 이는 중국특급우편물과 소포를 운송하는 전용열차이었던 탓에 중국인들에게 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관례를 깨는 독특한 발상이었다. 그는 중국인과의 관시를 활용해 철도와 트럭과 선박을 연계하는 복합운송노선을 개설한 것이 물류업계의 파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복합물류노선의 개설로 운송시간 및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아이엘국제물류는 연태와 상해, 온주, 이우, 청도, 항주 등 18개 지역에 직영 지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는 2005년에 대만인 사업가가 철수하면서 남긴 공장을 광주시 정부로부터 임대를 받아 사무실로 리모델링한 뒤 분양에 성공을 했다. 또한 2012년에는 3개 회사와 합작해 5만㎡의 땅을 시정부로부터 임대하여 광주지역 내 70개 물류업체를 입주시켰다. 중국 아이엘 국제물류회사의 본사도 이곳에 있다.
그가 한국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지역까지 물류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종합물류서비스를 펼칠 수 있었던 요인은 25년 동안 국제물류사업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와 IT 자회사를 만들어 자체 특화된 물류 프로그램(www.21nn.com)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고객의 화물정보와 물류관련 제반 업무내용을 데이터화하여 고객의 실정에 맞는 최적의 물류노선과 시스템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운송화물의 실시간 추적과 물류내역을 고객이 직접 관리할 수 있게 했다. 더욱이 고객이 한중간 물류수송 과정에서 업계 최초로 도착 운송일을 지정하는 물류시스템을 개발, 화물의 운송시간과 비용을 대폭 줄였다.
중국-베트남 등 동남아 연계 국제물류노선 구축
이재구 회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006년에 베트남 아이엘 국제 물류회사 지사를 설립했으며 중국-베트남을 잇는 국제육상노선을 개척했다. 중국 우의관-베트남 하노이 국제육상노선에는 자체 차량을 투입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호치민을 잇는 국제노선을 비롯하여 광주~항주/상해~일본 오사카/동경과 광주~연태/위해~한국 인천/ 평택, 광주~천진/랑팡~몽골 울란바트로~러시아 모스코바 노선 외에 광주~중경/성두~미얀마 양곤, 광주~남녕/핑샹~베트남 하노이 /호치민~라오스~캄보디아 등의 노선을 개척했다.
이 회장의 사업영역이 국제물류망에서 국제유통망으로 대폭 확장된 시기는 2015년부터다. 광주와 항주, 사천, 중경, 청두, 난사, 판위 등 7개 지역에 2,000평이 넘는 한국상품 체험관을 잇달아 개설했다. 이들 체험관들은 2017년 2월까지 매출이 증가했다. 그러나 사드 (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노골적인 간섭과 한국 상품불매운동이 겹치면서 매출이 현격하게 감소되면서 중국인들에게 넘겨줬다.
이 회장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정부로부터 전자상거래상품 통관사업 허가를 획득했으며 온라인 하하쇼핑몰을 설립, 중국 소비자들에게 해외 직접 구매대행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노이 근처 산업 및 물류 유통단지 건설
이밖에 광주와 항주, 연태에 보세창고 및 유통단지, 물류단지를 조성하고 부동산 사업에도 진출했다. 2015년부터는 베트남 박장성 지방정부로부터 산업공단 사업 승인을 받아 하노이에 113만㎡에 산업단지를 건설 중이다. 또한 베트남 최초 상업용지 허가 및 산업유통 센터의 조성사업을 승인을 받아 7만㎡의 유통센터를 건설하고 있다. 이밖에 2017년부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유통단지와 보세창고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장이 유일하게 활동하는 사회단체는 2001년에 재중국대한체육회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수석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 제9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재중국선수단장을 맡아 재외동포부분 종합준우승을 받았다.
이재구 회장의 경영철학은 ‘고객에게 신뢰받는 사업파트너로 고객과 함께 발전 한다’와 ‘심고 가꾸는 물류를 지향한다’이다. 그는 ‘인화(人和)와 신속, 적소, 적기의 정확한 배달과 동시에 안전한 물류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고 있다 . 특히 그가 지향하는 ‘안전한 물류’는 마약 등 법적으로 금지하는 부정한 물품을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화물취급 영업소에는 ‘안전하지 못한 물품을 접수하면 회사에서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글이 안내되어 있다. 그는 신속 및 적소, 적기의 정확한 배달을 하겠다는 고객과의 약속은 중국인과의 관시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운영하는 물류회사의 고객 70% 이상이 중국기업가들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적극성과 창의성을 발휘, 끊임없이 연관 사업에 진출, 성공을 거뒀다. 그는 한·중·일 해상무역과 동서교역을 주도했던 장보고 대사의 위업을 이어받아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는 해상 및 항공, 육상 등 종합물류 및 유통망을 구축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