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수상자 - 대상
홍명기 M&L Hong Foundation 이사장 겸 듀라코트 창업주(미국)
세계 첨단 도료시장 석권… 미주한인 권리 향상 사표(師表)
홍명기 M&L Hong Foundation 이사장 겸 듀라코트 창업주는 1954년 고교 졸업 직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 세계 최첨단 코팅 도료 개발 연구에 몰두했고, 이후 창업을 통해 세계적으로 관련 업계를 선도한 인물이다.
그는 51세 되던 1986년 자본금 2만 달러를 가지고 ‘듀라코트 프로덕트’라는 회사를 세웠다. 늦깎이로 사업계에 몸담았지만 그는 출중한 실력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데 주력, 업계를 리드해갔다. 그는 일본 스미토모 그룹에 연구물을 납품하는 등 세계적 기업들과 거래하며 성장했고 2002년 첨단 시설을 갖춘 제2공장을 건설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그는 1992년 LA 폭동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면서 경영자로서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들의 권리 향상에도 발 벗고 나서게 된다. 민족정신을 깨우기 위해 안창호 동상 건립사업에 나섰고, 본인이 솔선수범 기금 출연에 앞장서는 등 각종 모금운동을 통해 미주 한인들의 권익향상과 인재 양성에 앞장선다.
대한민국 정부도 홍 이사장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국민훈장 동백장(2003)과 무궁화장(2011)을 수여했다.
▲국민훈장_무궁화장
6․25직후 “큰 무대에서 큰 꿈을 꾸자” 미국 유학
홍 이사장은 8·15 해방 후 종합일간지인 평화신문(대한일보로 변경)과 한국 최초의 영화 촬영소인 안양촬영소와 수도극장(이후 스카라극장)을 경영하던 선친(홍찬:1909~1964) 덕분에 부유한 유년 생활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외국 영화 및 문화 등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6·25 전쟁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큰 무대에서 큰 꿈을 꾸라”는 선친의 조언에 따라 혼자 힘으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서 재수를 선택하지 않고 해외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1954년에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부친의 통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 LA가 콜로라도에 비해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산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 화학과로 편입학했다. 과학 기술 분야의 학과로 편입한 것은 부친 사업의 흥망의 부침(浮沈)을 보면서 미개척 유망 분야였던 화학계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 온 이후로 집안의 도움 없이 고용센터의 알선으로 플로리다 농장과 목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1달러를 받고 소를 몰고 젖을 짜는 일로 학비와 생활비 등을 벌어서 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평소 힘든 일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데다 도시 생활만 했던 그가 온종일 소의 발길질에 채여 몸에 멍이 들었고 우유통을 트럭에 싣고 가다가 떨어뜨린 바람에 우윳값 7달러를 배상할 정도로 혹독했기 때문에 목장 일을 그만뒀다.
두 번째 취업한 곳은 베벌리힐스에 거주하는 유대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보이였다. 월 30달러를 받고 숙식을 해결하는 일자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이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질책하는 바람에 손전등 아래서 이를 악물고 부족한 공부를 했다. 하우스보이의 수입으로는 학비 등을 충당할 수 없었던 그는 수업이 끝난 화학과 실험실 정리 정돈 잡일을 하면서 월 70달러를 벌어서 생활비에 보탰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이 경영하던 안양촬영소가 부도 처리되면서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어져 모국의 집안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4학년 마지막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졸업을 포기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구원의 손길을 준 분이 그의 영어 선생이었던 람사스 교수였다. 그녀가 자신의 은퇴연금을 해약한 후 200달러를 보태준 덕분에 홍 이사장은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1959년에 철강 외장 코팅재료 개발 회사였던 웨스턴 스테이트 라커(Western States Lacquer Corporation)의 수지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그가 첫 월급을 탔을 때 제일 먼저 했던 것은 학비를 보태준 람사스 교수를 찾아가 돈을 내밀었다. 람사스 교수는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준 선물”이라며 한사코 받기를 사양했다. 이러한 스승의 진심 어린 행동에 감동을 받은 그는 “나도 다음에 성공하면 반드시 스승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화공 도료업계 세계적 권위자로…승진에는 누락
라커 회사에서 1963년까지 근무했던 그는 크라이슬러 항공기 및 자동차 마감재를 개발하는 앤드류 브라운 연구원으로 이직했다. 1966년에는 철강 코팅 원료와 철재 튜브 및 일반산업 코팅 원료를 개발하는 위태커 코퍼레이션에서 그를 영입했다. 이 회사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 회장을 지냈으며 1951년도에 노벨상을 수상했던 글랜 시어도어 시보그 교수 (Dr. Glenn Theodore Seaborg, UC 버클리대 총장 역임)의 화학계 동기 동문인 에드워드 에이브 라셔(Dr. Edward Abe Lasher) 박사로부터 최고 수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홍 이사장은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활용해서 연구에 매진한 결과, 연구 실적이 일취월장했다.
1986년까지 20년 동안 최첨단 코팅 도료 개발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는 연구실장까지 올랐다. 그는 당시 코팅도료의 최고 기술을 습득했던 조셉 헌터와 에이브 라셔 박사와 함께 화공도료업계에서는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독보적 위치에 오를 정도로 유명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해 매달리면서 개발한 제품들이 시장에서 잇달아 히트를 쳤다. 이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 최첨단 코팅도료를 잇달아 개발하여 회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던 그는 소수민족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승진에서 고배를 마셨다.
듀라코트사 창업…미국 시장점유율 1위 올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아내 로라 홍(서영옥) 여사는 간호사로 계속 일을 하며 생활비와 살림을 책임질 테니 적극적으로 창업에 도전해 보라고 남편에게 권유했다. 그는 1986년 51세에 2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듀라코트 프로덕트’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1시간 동부에 위치한 한 화학회사 모퉁이에 설치된 컨테이너 박스를 1년간 임대, 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이전의 회사에서 연구하던 것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창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존 거래처에서 “홍 회장이 개발한 물건을 공급해 준다면 무조건 사겠다”는 비즈니스 제안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혁신적인 제품을 잇달아 개발했다. 듀라코트사가 생산한 제품은 품질과 기능이 뛰어나 업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사업은 날로 번창해 나갔다.
공해방지를 위해 화학 생산공장 건립을 위한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유명한 리버사이드시(市)에 듀라코트 프로덕트사의 미래비전을 제시한 후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3년 만에 리버사이드시 최초의 화학생산공장허가를 받아냈다. 이와 함께 사옥도 신축했다.
그가 듀라코트사를 창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계적 기업인 일본 스미토모 그룹이 생산하는 철강 파이프의 안과 밖의 부식 방지와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도료를 개발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는 4년에 걸친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스미토모 회사에서 요청한 시제품을 완성, 납품했다.
그는 2002년 앨라배마주 한스빌 12에이커의 부지에 첨단 시설을 갖춘 제2공장을 건설했다. 이후 듀라코트사는 건축자재 및 전자제품 외장, 트럭 트레일러와 같은 상용차의 코팅에 사용하는 첨단 도료도 생산했다.
특히 다국적 기업들이 공급하지 못하는 틈새시장을 공략, 소량 주문을 받아 제때에 납품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듀라코트는 직원 150명에, 건축용 철근 부식을 막는 ‘세라나멜’을 비롯해 수백 종류의 산업 및 건축용 특수 페인트를 제조했으며 미국 내 시장점유율 1위, 연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는 2016년 8월에 글로벌 코팅제 전문 업체인 ‘엑솔타 코팅 시스템즈(Axalta Coating Systems)’에 듀라코트를 매각했다. 이는 홍 회장이 소유한 화학연구 기술과 개발한 상품이 글로벌 회사인 엑솔타사의 유통과 마케팅이 합쳐져서 글로벌화하는 전환점(Conversion)을 가져오는 성공적인 계약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홍 회장은 엑솔타의 요청에 의해 2018년 12월까지 고문을 맡았다.
LA 폭동 계기 미주 한인 권리 찾기 나서
듀라코트 프로덕트사가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그는 한인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사업 성공 후, 조용히 노후를 지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그는 1992년 4월 29일 TV로 LA 폭동을 시청하면서 미주 한인들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미주 한인의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주 한인들이 자존감을 갖고 주류사회에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이를 위해 미주 한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도록 한민족의 우수한 정신과 문화를 고취시키는 한편, 교육 분야와 차세대 리더의 양성에 집중하기로 했다.
민족혼 일깨운 안창호 선생 동상 제막 앞장
홍 이사장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도산 안창호 동상을 듀라코트사가 있는 리버사이드시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가 안창호 동상을 세우게 된 배경은 청장년 시절에 안창호 부인 고(故) 이혜련 여사가 다녔던 ‘나성 한인연합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안창호 가족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할리우드에 처음 진출한 한국인 배우였던 필립 안(안창호 선생의 장남)을 만나면서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게 됐다. 그는 1954년 수라 안(안창호 선생의 둘째 딸)이 운영하던 중국 식당 ‘Moongate’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불러서 식사를 사주면서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공유했다. 이와 더불어 주일학교의 2세들을 지도하는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산 선생의 애국 및 독립·노동운동과 덕·지·체 사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수하는 한편, 민족정신 함양과 뿌리교육에 앞장을 섰다. 이처럼 홍 이사장이 도산 선생으로부터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것은 1902년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의 가르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도산은 초기 미주 한인들에게 “미국 사회에 살아가려면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야 주류사회에서 한국 사람을 서로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 한인 이민사회가 태동했던 곳은 홍 이사장이 거주하고 있는 남가주 리버사이드시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와 기타 지역에 정착했던 200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리버사이드시 오렌지 농장으로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한인 타운을 형성했었다. 안창호 선생은 미국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애국·애족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이는 미국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한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홍 이사장은 LA 폭동 이후 26년 동안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후세에게 전수함과 동시에 사회복지사업과 교육재단 등에 후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02년에 밝은 미래재단(현 M&L Hong 재단)을 세웠다. 1998년 서울 강남구청(당시 권문용 청장)과 리버사이드시의 자매결연을 주선했던 홍 이사장은 1999년에 ‘미주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전 리버사이드 도산기념사업회) 총회장을 맡았다. 그는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미주 한인들에게 선양하기 위해 리버사이드 시청 앞 공원에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거액의 사재를 기부했다. 이에 고무된 재미동포 4,000명이 기부에 동참하여 50만 달러와 모국인 한국 정부의 10만 달러등 총 70만 달러를 모았다. 2001년 8월 11일 리버사이드 시청 앞 공원 40평에 안창호 동상을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후세에 남길 정신문화 ‧ 뿌리교육 적극 전개
홍 이사장이 두 번째로 나선 것은 후세에 남길 교육 및 정신문화 사업을 적극적 지원하는 것이었다. 미주 유일의 민족학교인 남가주학원이 경제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했을 때 300만 달러의 기금을 모금, 정상화에 앞장섰다. 또한 1909년 미국 독립운동의 총본산인 대한인 국민회관을 복원을 위해 종잣돈을 사재로 지원하고 동포사회와 모국 정부 지원 55만 달러를 포함 총 70만 달러의 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2003년 12월 9일에 개관시켰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2년간 협상을 벌여 LA 다운타운 110번과 10번 프리웨이 인터체인지를 ‘도산 안창호기념 인터체인지’로 변경시켰다. 이처럼 그는 미국 사회 최초의 한국인 이름의 도로 표지판을 달 수 있도록 하는 등 한인 사회와 미국 주류사회를 위해 수많은 사업을 펼쳐왔다.
홍 이사장은 또 민족정신 함양과 모국의 뿌리교육을 하는데도 선봉에 섰다. 한인이주 100주년을 맞아 한국 꽃차를 출품할 수 있도록 막대한 재정도 지원했다. 미주한인전국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한미 박물관 이사장을 맡았다. 또한 한미경제개발연구소(KAEDC)의 이사장을 맡아서 한인사회의 경제 및 사회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특히 논문집 발행을 지원함으로써 미주 한인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지난 10여 동안 미주 초기 이민자 자녀 및 안창호 선생의 자녀들을 초청 매년 8월에 연례 오찬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밖에 UCLA 대학에 200만 달러를, 라시에라 대학에 100만 달러, 삼육대학교에 100만 달러를 각각 기부하는 등 지난 20여 년간 약 3천만 달러를 사회에 지원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故김영옥 대령의 희생과 봉사 정신을 기리는 김영옥 연구소의 건립을 위해 수백만불 기금 조성을 성사시키는 한편, 2018년에도 37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밖에 미주 한인역사와 지구촌 한민족 연구를 위해 연관 대학에 20여 년간 연구비를 지원해왔다. 이외에도 한상들이 차세대 리더 양성을 위해 종잣돈을 지원하며 장학 재단 ‘글로벌 한상드림’의 설립에 앞장서며 초대 이사장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수년간 탈북자 자녀와 다문화가정 자녀 등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재외 동포들에게 한국 알리기와 모국어 교육사업에도 앞장을 서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 영향력 확대 차세대 지도자 양성
그는 한인사회의 미래가 차세대 육성에 달려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민 1세대가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인사회의 정치적 신장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차세대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인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어 떳떳하게 살아가려면 미주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오랜 소신이다.
이 때문에 동포사회의 주역인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미주 한인정치리더십포럼(KAPOL)과 미주 한인 정치력 신장에도 재정적 지원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미국 사회에서 한인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는 등 재미 한인의 정치력 신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 공화당원인 그는 미주 한인이 미국 정치에 출마를 하면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한인을 후원해 오고 있다. 이러한 지원으로 다수의 한인정치가를 배출했다. 홍 이사장은 데이빗 류 LA 시의원, 미셀 박 스틸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등 많은 한인 정치인과 한인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재정을 후원하고 있다. 이는 한 명이라도 미 의회에 보낼 수 있다면 재미동포사회의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당파를 초월해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또한 그는 차세대 지도자의 육성 및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에도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요구하는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 다만 차세대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급선무”라고 밝혔다.
“베푸는 것이 받는 것보다 축복” 나눔철학 실천
홍 이사장은 독특한 기부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잡지 인터뷰에서 왜 기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벌면 나눌 수 있는 인생,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눠주면 나중에 반드시 더 많은 것을 채워준다는 것을 체험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감동하며 행복해하는 모습 가운데, 베풀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히려 내가 큰 기쁨과 은혜가 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는 오랫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해오면서 터득했던 나눔의 철학이다. 홍 이사장은 2019년 1월 듀라코트사 경영에서 손을 떼면 앞으로 자선활동에 주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홍 이사장의 성공 요인은 독특한 아이디어와 긍정적인 마인드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불가능(impossible)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할 수 있다(I’m possible)는 자세와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미주 한인 동포사회는 물론, 주류 사회에서도 홍 이사장을 가장 존경하는 한인 자선가이며 복지가로 예우해 주고 있다. 홍 이사장은 한민족의 사표인 장보고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해외동포사회에서 한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홍 이사장의 아메리칸드림과 나눔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국민훈장 동백장(2003)과 무궁화장(2011)을 수여했다.
2017수상자 - 대상
홍명기 M&L Hong Foundation 이사장 겸 듀라코트 창업주(미국)
세계 첨단 도료시장 석권… 미주한인 권리 향상 사표(師表)
홍명기 M&L Hong Foundation 이사장 겸 듀라코트 창업주는 1954년 고교 졸업 직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 세계 최첨단 코팅 도료 개발 연구에 몰두했고, 이후 창업을 통해 세계적으로 관련 업계를 선도한 인물이다.
그는 51세 되던 1986년 자본금 2만 달러를 가지고 ‘듀라코트 프로덕트’라는 회사를 세웠다. 늦깎이로 사업계에 몸담았지만 그는 출중한 실력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데 주력, 업계를 리드해갔다. 그는 일본 스미토모 그룹에 연구물을 납품하는 등 세계적 기업들과 거래하며 성장했고 2002년 첨단 시설을 갖춘 제2공장을 건설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그는 1992년 LA 폭동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면서 경영자로서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들의 권리 향상에도 발 벗고 나서게 된다. 민족정신을 깨우기 위해 안창호 동상 건립사업에 나섰고, 본인이 솔선수범 기금 출연에 앞장서는 등 각종 모금운동을 통해 미주 한인들의 권익향상과 인재 양성에 앞장선다.
대한민국 정부도 홍 이사장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국민훈장 동백장(2003)과 무궁화장(2011)을 수여했다.
▲국민훈장_무궁화장
6․25직후 “큰 무대에서 큰 꿈을 꾸자” 미국 유학
홍 이사장은 8·15 해방 후 종합일간지인 평화신문(대한일보로 변경)과 한국 최초의 영화 촬영소인 안양촬영소와 수도극장(이후 스카라극장)을 경영하던 선친(홍찬:1909~1964) 덕분에 부유한 유년 생활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외국 영화 및 문화 등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6·25 전쟁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큰 무대에서 큰 꿈을 꾸라”는 선친의 조언에 따라 혼자 힘으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서 재수를 선택하지 않고 해외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1954년에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부친의 통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 LA가 콜로라도에 비해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산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 화학과로 편입학했다. 과학 기술 분야의 학과로 편입한 것은 부친 사업의 흥망의 부침(浮沈)을 보면서 미개척 유망 분야였던 화학계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 온 이후로 집안의 도움 없이 고용센터의 알선으로 플로리다 농장과 목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 1달러를 받고 소를 몰고 젖을 짜는 일로 학비와 생활비 등을 벌어서 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평소 힘든 일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데다 도시 생활만 했던 그가 온종일 소의 발길질에 채여 몸에 멍이 들었고 우유통을 트럭에 싣고 가다가 떨어뜨린 바람에 우윳값 7달러를 배상할 정도로 혹독했기 때문에 목장 일을 그만뒀다.
두 번째 취업한 곳은 베벌리힐스에 거주하는 유대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보이였다. 월 30달러를 받고 숙식을 해결하는 일자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이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질책하는 바람에 손전등 아래서 이를 악물고 부족한 공부를 했다. 하우스보이의 수입으로는 학비 등을 충당할 수 없었던 그는 수업이 끝난 화학과 실험실 정리 정돈 잡일을 하면서 월 70달러를 벌어서 생활비에 보탰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이 경영하던 안양촬영소가 부도 처리되면서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어져 모국의 집안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4학년 마지막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졸업을 포기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구원의 손길을 준 분이 그의 영어 선생이었던 람사스 교수였다. 그녀가 자신의 은퇴연금을 해약한 후 200달러를 보태준 덕분에 홍 이사장은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1959년에 철강 외장 코팅재료 개발 회사였던 웨스턴 스테이트 라커(Western States Lacquer Corporation)의 수지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그가 첫 월급을 탔을 때 제일 먼저 했던 것은 학비를 보태준 람사스 교수를 찾아가 돈을 내밀었다. 람사스 교수는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준 선물”이라며 한사코 받기를 사양했다. 이러한 스승의 진심 어린 행동에 감동을 받은 그는 “나도 다음에 성공하면 반드시 스승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화공 도료업계 세계적 권위자로…승진에는 누락
라커 회사에서 1963년까지 근무했던 그는 크라이슬러 항공기 및 자동차 마감재를 개발하는 앤드류 브라운 연구원으로 이직했다. 1966년에는 철강 코팅 원료와 철재 튜브 및 일반산업 코팅 원료를 개발하는 위태커 코퍼레이션에서 그를 영입했다. 이 회사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 회장을 지냈으며 1951년도에 노벨상을 수상했던 글랜 시어도어 시보그 교수 (Dr. Glenn Theodore Seaborg, UC 버클리대 총장 역임)의 화학계 동기 동문인 에드워드 에이브 라셔(Dr. Edward Abe Lasher) 박사로부터 최고 수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홍 이사장은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활용해서 연구에 매진한 결과, 연구 실적이 일취월장했다.
1986년까지 20년 동안 최첨단 코팅 도료 개발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는 연구실장까지 올랐다. 그는 당시 코팅도료의 최고 기술을 습득했던 조셉 헌터와 에이브 라셔 박사와 함께 화공도료업계에서는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독보적 위치에 오를 정도로 유명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해 매달리면서 개발한 제품들이 시장에서 잇달아 히트를 쳤다. 이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 최첨단 코팅도료를 잇달아 개발하여 회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던 그는 소수민족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승진에서 고배를 마셨다.
듀라코트사 창업…미국 시장점유율 1위 올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아내 로라 홍(서영옥) 여사는 간호사로 계속 일을 하며 생활비와 살림을 책임질 테니 적극적으로 창업에 도전해 보라고 남편에게 권유했다. 그는 1986년 51세에 2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듀라코트 프로덕트’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1시간 동부에 위치한 한 화학회사 모퉁이에 설치된 컨테이너 박스를 1년간 임대, 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이전의 회사에서 연구하던 것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창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존 거래처에서 “홍 회장이 개발한 물건을 공급해 준다면 무조건 사겠다”는 비즈니스 제안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혁신적인 제품을 잇달아 개발했다. 듀라코트사가 생산한 제품은 품질과 기능이 뛰어나 업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사업은 날로 번창해 나갔다.
공해방지를 위해 화학 생산공장 건립을 위한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유명한 리버사이드시(市)에 듀라코트 프로덕트사의 미래비전을 제시한 후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3년 만에 리버사이드시 최초의 화학생산공장허가를 받아냈다. 이와 함께 사옥도 신축했다.
그가 듀라코트사를 창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계적 기업인 일본 스미토모 그룹이 생산하는 철강 파이프의 안과 밖의 부식 방지와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도료를 개발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는 4년에 걸친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스미토모 회사에서 요청한 시제품을 완성, 납품했다.
그는 2002년 앨라배마주 한스빌 12에이커의 부지에 첨단 시설을 갖춘 제2공장을 건설했다. 이후 듀라코트사는 건축자재 및 전자제품 외장, 트럭 트레일러와 같은 상용차의 코팅에 사용하는 첨단 도료도 생산했다.
특히 다국적 기업들이 공급하지 못하는 틈새시장을 공략, 소량 주문을 받아 제때에 납품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듀라코트는 직원 150명에, 건축용 철근 부식을 막는 ‘세라나멜’을 비롯해 수백 종류의 산업 및 건축용 특수 페인트를 제조했으며 미국 내 시장점유율 1위, 연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는 2016년 8월에 글로벌 코팅제 전문 업체인 ‘엑솔타 코팅 시스템즈(Axalta Coating Systems)’에 듀라코트를 매각했다. 이는 홍 회장이 소유한 화학연구 기술과 개발한 상품이 글로벌 회사인 엑솔타사의 유통과 마케팅이 합쳐져서 글로벌화하는 전환점(Conversion)을 가져오는 성공적인 계약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홍 회장은 엑솔타의 요청에 의해 2018년 12월까지 고문을 맡았다.
LA 폭동 계기 미주 한인 권리 찾기 나서
듀라코트 프로덕트사가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그는 한인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사업 성공 후, 조용히 노후를 지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그는 1992년 4월 29일 TV로 LA 폭동을 시청하면서 미주 한인들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미주 한인의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주 한인들이 자존감을 갖고 주류사회에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이를 위해 미주 한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도록 한민족의 우수한 정신과 문화를 고취시키는 한편, 교육 분야와 차세대 리더의 양성에 집중하기로 했다.
민족혼 일깨운 안창호 선생 동상 제막 앞장
홍 이사장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도산 안창호 동상을 듀라코트사가 있는 리버사이드시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가 안창호 동상을 세우게 된 배경은 청장년 시절에 안창호 부인 고(故) 이혜련 여사가 다녔던 ‘나성 한인연합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안창호 가족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할리우드에 처음 진출한 한국인 배우였던 필립 안(안창호 선생의 장남)을 만나면서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게 됐다. 그는 1954년 수라 안(안창호 선생의 둘째 딸)이 운영하던 중국 식당 ‘Moongate’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불러서 식사를 사주면서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공유했다. 이와 더불어 주일학교의 2세들을 지도하는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산 선생의 애국 및 독립·노동운동과 덕·지·체 사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수하는 한편, 민족정신 함양과 뿌리교육에 앞장을 섰다. 이처럼 홍 이사장이 도산 선생으로부터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것은 1902년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의 가르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도산은 초기 미주 한인들에게 “미국 사회에 살아가려면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야 주류사회에서 한국 사람을 서로 믿을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 한인 이민사회가 태동했던 곳은 홍 이사장이 거주하고 있는 남가주 리버사이드시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와 기타 지역에 정착했던 200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리버사이드시 오렌지 농장으로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한인 타운을 형성했었다. 안창호 선생은 미국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애국·애족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이는 미국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한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홍 이사장은 LA 폭동 이후 26년 동안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후세에게 전수함과 동시에 사회복지사업과 교육재단 등에 후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02년에 밝은 미래재단(현 M&L Hong 재단)을 세웠다. 1998년 서울 강남구청(당시 권문용 청장)과 리버사이드시의 자매결연을 주선했던 홍 이사장은 1999년에 ‘미주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전 리버사이드 도산기념사업회) 총회장을 맡았다. 그는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미주 한인들에게 선양하기 위해 리버사이드 시청 앞 공원에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거액의 사재를 기부했다. 이에 고무된 재미동포 4,000명이 기부에 동참하여 50만 달러와 모국인 한국 정부의 10만 달러등 총 70만 달러를 모았다. 2001년 8월 11일 리버사이드 시청 앞 공원 40평에 안창호 동상을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후세에 남길 정신문화 ‧ 뿌리교육 적극 전개
홍 이사장이 두 번째로 나선 것은 후세에 남길 교육 및 정신문화 사업을 적극적 지원하는 것이었다. 미주 유일의 민족학교인 남가주학원이 경제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했을 때 300만 달러의 기금을 모금, 정상화에 앞장섰다. 또한 1909년 미국 독립운동의 총본산인 대한인 국민회관을 복원을 위해 종잣돈을 사재로 지원하고 동포사회와 모국 정부 지원 55만 달러를 포함 총 70만 달러의 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2003년 12월 9일에 개관시켰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2년간 협상을 벌여 LA 다운타운 110번과 10번 프리웨이 인터체인지를 ‘도산 안창호기념 인터체인지’로 변경시켰다. 이처럼 그는 미국 사회 최초의 한국인 이름의 도로 표지판을 달 수 있도록 하는 등 한인 사회와 미국 주류사회를 위해 수많은 사업을 펼쳐왔다.
홍 이사장은 또 민족정신 함양과 모국의 뿌리교육을 하는데도 선봉에 섰다. 한인이주 100주년을 맞아 한국 꽃차를 출품할 수 있도록 막대한 재정도 지원했다. 미주한인전국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한미 박물관 이사장을 맡았다. 또한 한미경제개발연구소(KAEDC)의 이사장을 맡아서 한인사회의 경제 및 사회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특히 논문집 발행을 지원함으로써 미주 한인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지난 10여 동안 미주 초기 이민자 자녀 및 안창호 선생의 자녀들을 초청 매년 8월에 연례 오찬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밖에 UCLA 대학에 200만 달러를, 라시에라 대학에 100만 달러, 삼육대학교에 100만 달러를 각각 기부하는 등 지난 20여 년간 약 3천만 달러를 사회에 지원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전쟁영웅 16인에 뽑힌 유일한 아시아계 故김영옥 대령의 희생과 봉사 정신을 기리는 김영옥 연구소의 건립을 위해 수백만불 기금 조성을 성사시키는 한편, 2018년에도 37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밖에 미주 한인역사와 지구촌 한민족 연구를 위해 연관 대학에 20여 년간 연구비를 지원해왔다. 이외에도 한상들이 차세대 리더 양성을 위해 종잣돈을 지원하며 장학 재단 ‘글로벌 한상드림’의 설립에 앞장서며 초대 이사장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수년간 탈북자 자녀와 다문화가정 자녀 등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재외 동포들에게 한국 알리기와 모국어 교육사업에도 앞장을 서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 영향력 확대 차세대 지도자 양성
그는 한인사회의 미래가 차세대 육성에 달려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민 1세대가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인사회의 정치적 신장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차세대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인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어 떳떳하게 살아가려면 미주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오랜 소신이다.
이 때문에 동포사회의 주역인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미주 한인정치리더십포럼(KAPOL)과 미주 한인 정치력 신장에도 재정적 지원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미국 사회에서 한인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는 등 재미 한인의 정치력 신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 공화당원인 그는 미주 한인이 미국 정치에 출마를 하면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한인을 후원해 오고 있다. 이러한 지원으로 다수의 한인정치가를 배출했다. 홍 이사장은 데이빗 류 LA 시의원, 미셀 박 스틸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등 많은 한인 정치인과 한인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재정을 후원하고 있다. 이는 한 명이라도 미 의회에 보낼 수 있다면 재미동포사회의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당파를 초월해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또한 그는 차세대 지도자의 육성 및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에도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요구하는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 다만 차세대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급선무”라고 밝혔다.
“베푸는 것이 받는 것보다 축복” 나눔철학 실천
홍 이사장은 독특한 기부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잡지 인터뷰에서 왜 기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벌면 나눌 수 있는 인생,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눠주면 나중에 반드시 더 많은 것을 채워준다는 것을 체험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감동하며 행복해하는 모습 가운데, 베풀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히려 내가 큰 기쁨과 은혜가 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는 오랫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해오면서 터득했던 나눔의 철학이다. 홍 이사장은 2019년 1월 듀라코트사 경영에서 손을 떼면 앞으로 자선활동에 주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홍 이사장의 성공 요인은 독특한 아이디어와 긍정적인 마인드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불가능(impossible)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할 수 있다(I’m possible)는 자세와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미주 한인 동포사회는 물론, 주류 사회에서도 홍 이사장을 가장 존경하는 한인 자선가이며 복지가로 예우해 주고 있다. 홍 이사장은 한민족의 사표인 장보고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해외동포사회에서 한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홍 이사장의 아메리칸드림과 나눔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국민훈장 동백장(2003)과 무궁화장(2011)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