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우수상)
장성배 하나푸즈 사장(일본)
명란젓 ‧ 참치어업 통해 연 매출 500억 기업 키워
장성배 하나푸즈 사장은 대학 졸업 후인 1987년 주식회사 선경(현 SK네트웍스)에 입사했다. 한직을 떠돌았던 그는 1992년 명란 제품 국제 가공 사업을 맡으면서 능력을 발휘, 안정적인 판매 실적을 올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1995년 러시아와 일본이 명란을 확보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때, 고군분투한 결과 6,000톤(5,000만 달러) 판매 실적을 달성했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매년 1억 달러 수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다. 이런 성과 덕분에 그는 2003년 1월에는 선경그룹 오사카 식품사업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이후 회사에 사표를 낸 뒤 일본 후쿠오카에서 2003년 하나푸즈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2010년 명란젓 거래 과정에서 원·부자재와 채권, 채무를 관리할 부산 현지 법인으로 SBC 무역을 설립했다. 이어 2014년에 원양어선 5척으로 부산에 참치 원양 회사인 3T 오션을 설립했다. 이처럼 사업다각화를 진행한 그는 신용 하나로 매출액 500억 원(2017년)을 달성했으며, 임직원 161명을 거느린 중견기업가로 성장했다.
선경 입사 후 한동안 한직…명란 제품 가공분야 맡으며 두각
장 사장은 대학교 1학년 때 음악을 좋아해서 우연히 그룹사운드 동아리활동을 한 계기로 소규모 나이트클럽이나 미군부대(히야리아 캠프)에서 공연, 용돈벌이를 했다. 성당 야간학교에서 주 2회 음악 선생으로도 재능 기부도 했다. 음악 연주에 푹 빠져 지냈지만 학업을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공부도 충실하게 하여 대학 6학기 동안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그의 그룹사운드 경력은 선경에 입사할 때 조직생활과 하모니에 대한 가산점을 받아 남보다 수월하게 취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한 덕분에 50세를 넘긴 지금도 낯선 일본에서 재능 기부로 음악 연주자로 초청을 받고 있다.
장 사장은 1987년 주식회사 선경(현 SK네트웍스)에 입사했다. 회사의 기획 업무를 담당하고자 관리부를 희망하였고, 그의 뜻대로 배치를 받았으나 원하던 부서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회사의 조직 개편 시점에 맞춰 종합상사의 꽃인 영업부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다. 왜냐하면 무역상사의 핵심부서는 해외 영업부로서 그곳에서 근무하면 글로벌 역량을 키우고 해외근무 기회가 많기 때문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희망대로 영업부에 배치되지 않았고 1992년경 약 6개월간 보직 대기 상태로 있었다. 속된 말로 한직으로 좌천됐던 것이다.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시절에 SK그룹 계열사였던 선경의 일본지사에서 그동안 LG상사와 함께 수행해 오던 명란 제품 국제 무환수탁 가공사업(위탁자(일본 제품 바이어)는 원·부자재를 제공하고 수탁자(한국 MAKER)는 숙련된 고급 기술을 제공하여 제품을 생산하기로 하는, 국제 수출 계약의 한 형태)을 SK네트웍스가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본사에서는 이 업무를 수행할 책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명란 제품 국제 무환수탁 가공 사업은 내용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데다가 돈이 안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지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한직에 있었던 그에게 의향을 물어왔을 때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날부터 빈둥빈둥 일본어 책만 보던 생활을 청산했다. 이 업무를 맡으면서 그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1년 넘게 야근을 하는 등 강행군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담당 선배들로부터 늘 질책과 격려를 받았다. 그는 이때의 경험 덕분에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고 믿고 있다. 한마디로 한직을 떠돌던 그가 명란젓 가공 업무 분야에서는 단연 업계의 최고수로 성장하고 독보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관심이 있는 분야에 몰입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 습득하고 터득한 기량이 창업 후에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이 됐다.”고 회고했다.
명란젓은 일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반찬이다. 다만 명란젓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요리다.
명란젓은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가와하라 도시오(川原俊夫)이라는 사람이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고향 후쿠오카현 하카타로 돌아간 뒤 식품 도매상을 열었다. 그는 새 상품을 선보일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 부산 초량시장에서 먹었던 매운 ‘명란 김치’ 맛을 떠올렸다. 이를 ‘멘타이코’(명란젓의 일본 말)란 이름으로 선보였던 시기가 1949년 1월이었다. 멘타이코가 히트를 치면서 일본 전역에서 명란젓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때문에 명란젓이 일본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여기는 한국인도 많다.
명란 수출 연 1억 달러 달성…부장으로 승진
당시 명란젓의 가공 유통 비중은 일본이 95%가량 점유하고 있고 한국은 고작 5%를 내외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명란젓의 원료인 명란을 공급하는 명태의 어획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명태 어획고는 러시아산과 미국산이 5만 톤 정도다. 이는 전 세계 물량의 90%를 차지한다. 당시 일본을 제외한 해외가공 물량은 중국 5,000톤, 한국 1,000톤 정도다. 이 중 SK가 무환수탁 가공 수출업으로 연간 300톤(500만 달러) 규모에 해당하는 물량을 처리한다. 그는 무환수탁 가공 수출 사업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왔다. 그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시기는 1994년이었다. 어느 날 러시아 에이전트 1명이 그를 찾아와 연간 1만 톤 규모의 명란 원료를 취급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는 본사에 구두 보고를 한 뒤, 구매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 에이전트가 삼성과 LG상사 등으로부터 사기꾼으로 인식되어 어느 회사도 상대해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에이전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자 주야로 미팅 기회를 계속 가지면서 정보 분석, 상황 파악에 주력하였다. 특히 그는 일본과 거래하는 러시아 회사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 ·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 결과, 그 에이전트가, 페로스트로이카 시절 EU 지원금으로 8,000 톤급 14척을 스페인에서 건조하여 북태평양에서 명태조업을 통해 전 세계 피쉬 버그에 들어가는 필렛과 명란젓 원료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 기업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에이전트의 아버지가 러시아 경제 마피아였기에 1995년 봄에 러시아에서 명란젓 원료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따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업계 1, 2위를 점하고 있는 바이어그룹의 회장을 만나서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명란젓 원료를 공급해 줄 것이니 일본에서 수입 소화해 줄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했다. 이들 바이어 그룹의 두 회장들은 장 사장이 안정적으로 공급해 준다면 물량을 소화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995년은 러시아와 일본이 명란을 확보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때였는데 고군분투한 결과 6,000톤(5,000만 달러) 판매 실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사전에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그가 남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개척한 성과는 엄청난 실적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매년 1억 달러 수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다. 이러한 실적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1996년에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열렸다.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어, 영어, 일본어 등 3개 국어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끝난 후 그는 바이어와 함께 두 대의 헬기(대당 4,000만 달러)를 임차하여 그랜드캐넌을 관광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는 인생에서 최고의 절정기를 보냈다.
이런 성과 덕분에 2003년 1월에는 선경그룹 오사카 식품사업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일본 주재원으로 있으면서 한국산 명란 제품과 원료 수입, 삼치 수입 등으로 연간 7,0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같은 해 2월에 시애틀로 출장 갔을 때 6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본사에서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계약을 취소하라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본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바이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위약금을 받지 않고 계약을 취소해 줬다.
귀국한 후 상황을 파악해 보니, 회사 내부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SK 글로벌 분식 사태로 회사는 휘청거렸다. 이 여파로 일본 주재원 십여 명과 로컬 스태프 90명이 퇴직 처리되는 등 창사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그는 3개월 동안 사후 정리 업무를 수행한 뒤 서울로 와서 사표를 제출했다. 그가 못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2003년 6월 주재원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일본 법인장 후보로 낙점됐었다는 후일담을 우연히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때 회사 상황이 악화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일본 법인장으로 근무했을 것이다.
2003년 하나푸즈 설립… 창업 후 3년 동안 퇴직금으로 버텨
장 사장은 사표를 낸 뒤 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오사카를 떠나 후쿠오 카로 향하는 배를 탔다. 연고가 없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2003년 하나푸즈라는 회사를 세웠다. 하나푸즈의 회사명은 ‘come together’(서로 함께, お互にご-緒に)의 뜻을 담고 있다.
후쿠오카에 회사를 설립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오래전 우연히 방문한 후쿠오카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208km밖에 떨어지지 않아서 비행기로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교통 접근성이 뛰어난 점도 이곳에 자리 잡게 한 배경이었다.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겠다고 다짐한 것은 일본의 장점을 배우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됐다. 일본인의 친절함과 겸손, 배려, 남에게 폐 안 끼치기, 청결, 기술 중시 같은 것과 세계적인 브랜드를 갖게 된 비결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창업을 한 후 매일 부지런히 비즈니스를 찾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시작할 때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6개월 동안 단 한 건의 계약도 성사하지 못했다. 회사의 자산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사무실에 컴퓨터 2대와 전화기 2대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어서 특별히 영업하러 갈 곳도 없었다. 온종일 마우스의 클릭 소리만 들릴 뿐 사무실에는 전화가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다. 7개월째 한 재일동포 사장님의 도움으로 원료를 통관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단순히 세관 통관 업무를 수행했지만, 수입 서류 작성과 통관 업무, 배달 업무 등 실시간 통관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을 맡긴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창업 후 지금까지 실시간 통관 시스템을 활용 해오고 있다. 그는 회사 설립 후 약 3년 동안 집에 생활비로 매월 30만 엔을 줬는데, 퇴직한 후 받았던 퇴직금으로 근근이 버텼던 것이다. 그는 대기업 간부 출신이라는 것만 믿고 준비하지 않은 채 무작정 창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처절하게 실감했다.
창업 4년 만에 예전 명란젓 거래 회사를 찾아가서 거래를 부탁했다. 일본 업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첫 주문을 해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부산 공장과도 거래를 재개하여 3년 반 만에 명란젓 가공 시장을 장 사장 회사 전용 가공 공장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일본 초일류 명란 브랜드인 ‘카네 후쿠(kanefuku)’에 매주 1억 원어치 명란(4만 식)을 수출하고 있다.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통학 때문?
그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들이 어느 정 도 역할을 해주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들이 규슈 지역의 구루메 부설 중학교(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모교)에 합격하였다. 이 학교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50km 떨어진 지방에 있는데, 매일 전차로 통학을 해야 했다. 장 사장은 매일 6시에 일어나 전차가 7시 2분에 출발하는 역까지 아들을 태워다 주고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7시 7분에 출근해 9시까지 사장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고 9시부터는 거래처 바이어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나면 10시 이후에는 시간이 남았다. 그는 이 시간을 대충 허비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과 거래했던 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맞춤 서비스를 통하여 상대방에게 필요한 내용을 제공했다. 그 결과, 그의 평판과 신용이 좋아지면서 어려운 일 또는 난이도가 높은 일도 차츰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창업 7년 차가 되어서야 ‘사업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돈이라는 것이 이렇게 벌어지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들 때문에 회사를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게 됐다.
장성배 사장의 기업 경영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일본 후 쿠오카에 하나푸즈를 설립해놓고, 즉 본사를 후쿠오카에 두고서 부산에서 실질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인이 운영하는 명란젓 가공 회사가 아니라, 일본 회사인데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컨트롤 타워를 맡고 있는 일본 본사와 명란 제품 가공을 하는 한국 파트너들과 협력하는 것은 물론, 명란 및 참치 사업의 환경을 분석하고 일본 파트너의 신뢰를 얻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둘째, 수산 산업의 금융의존도가 50% 이상인 점도 일본에 본사를 둔 이유다. 왜냐하면 일본의 금융 대출이자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셋째, 일본에서 상품을 판매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한국 상품을 판매하려면 수입 절차가 까다롭고, 수입 승인이 났다 하더라도 일본 마트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품질과 위생에 대한 200가지 항목의 체크리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하나푸즈는 선경 시절에 축적해 왔던 기존 보유 역량과 수입자로서의 기능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런 불필요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본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수직 계열화하는 경영을 검토해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점이 더 많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장 사장은 명란젓 거래 과정에서 원·부자재와 채권, 채무를 관리할 현지 법인으로 2010년 SBC 무역을 설립했다. 그가 계열사를 개설한 것은 일본 하나푸즈의 자금이 연간 3억 엔에서 7억 엔 정도 투입되지만, 이 자금에 대한 원·부자재와 채권, 채무를 관리할 부산 현지 법인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2014년에 65억 원을 투자하여 원양어선 5척으로 부산에 참치 원양 회사인 3T 오션을 설립했다. 그는 사실 2008년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잡은 참치를 일본에 수입·판매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참치를 전량 일본으로 수출해 연간 13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다만 시황에 따라서 원료 확보가 어려워지거나 할 수 없다는 점이 걸렸다. 참치의 안정적 확보가 일본 내수 판매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들 선박이 잡는 참치의 규모는 척당 400톤이며 대략 연간 15억 엔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 장 사장은 일본 대형 매장 바이어의 니즈에 맞춰 원양어선을 투입하여 참치를 잡은 뒤 최종 소비자까지 가장 빠르게 공급하는 원스톱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후쿠오카 하나푸즈에서 1차+2차+3차를 합쳐서 6차 산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켓에서 다른 업체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로 미흡한 수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6차 산업을 실천한다는 사명 아래 지금도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가 수산 분야에서 정착한 6차 산업의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먼저 원양 참치 선박에서 잡은 참치를 부산으로 옮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부산에서 1차 가공한 후 일본으로 수출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도쿄와 고베 등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한다.
그가 2003년 창업한 뒤 15년 동안 기업을 경영하면서 매달려온 철칙은 수직 계열화를 구축하여 6차 산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의 경영 철학은 시장에서 1등 하는 기업을 벤치마킹한 뒤 2등으로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마존과 같은 플랫폼을 구축한 회사를 벤치마킹하고 아마존이 흉내 낼 수 없는 감성마케팅을 전개하여 독자적인 생존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이를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닮은 경영’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동안 신용 하나로 매출액 500억 원(2017년)을 달성했으며, 임직원 161명을 거느린 중견기업가로 성장했다.
어릴 적 “신동”…지진 구호 등 봉사활동 나서
장 사장은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던 그는 세 살 때 한글을 읽고 썼으며, 구구단을 암기했다. 양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 바람에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부친이 운수업에 종사해서 25평 단층 기와집에는 가족들과 운전수 등 15명이 함께 지내야 해서 무척 시끌벅적했다. 당시 아버지의 회사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차량 보험이 없었던 탓에 어려움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8톤 덤프트럭을 몰고 토석장에서 건설 현장까지 흙을 싣고 운반하는 아버지의 조수로서 잡일을 도와드렸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다투는 성과급 작업과 하루 왕복 몇 번을 해야만 수익을 내는지에 대한 것, 진성어음 같은 실물경제를 익히게 됐다. 사실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자청한 것은 가장 맛있는 자장면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회 활동 경력이 일천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회사에 안정적인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쏟았기 때문이다. 2012년 1월에서야 재일본 큐슈한인회 부회장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6월부터 세계한인무역협회 후쿠오카 지회의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봉사 활동은 2016년 4월 16일에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 구호 활동이다. 당시 교민이었던 정영진 대표가 운영하던 아소 야마 나미 골프클럽과 리조트의 피해가 심각하여 3,000만 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후쿠오카 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구마모토를 찾았다가 지진으로 귀국이 어려워진 여행객을 위해 비상식량을 제공하고 대형 버스 5대를 수배하여 약 200명의 여행객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밖에 그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야구선수 이대호와 축구 감독 윤정환의 후원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원료에서 제품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참치 어업부터 말단 소비자 판매까지 수직계열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 출 장중 , 명란 원료 생산하는 배
(Factory Trawler ; 배 뒤쪽으로 명태가 그물에 올라오면 배 한 쪽에서는 채란, 선별, 냉동, 포장이 완료되어 완제품이 나오는 공장 기능을 가진 어선)
▲ 검품 (품질평가)
▲ 미국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신제품 출시
▲ 카네후쿠 브랜드로 관동지역 일류 슈퍼에 한국산은 우리 회사 제품이 석권
▲ 만 50세 생일기념으로 처음으로 새 차 구입 , 가족과 함께
▲ 태평양을 무대로 대한민국 수출에 공헌하고 있는 LONG LINER (독항선; 20개월 한 항차)
▲ 깡깡 얼은 초저온 선창에서 육지로 하역하고 있는 Big Eye Tuna , 가공하여 일본 스시감으로 전량 수출
▲ 부산 부두의 하역 모습, 한마리에 얼마짜리일까 늘 계산해 본다
▲ 일본 초일류 슈퍼마켓 ( COOP KOBE) 의 신년 특판 찌라시 , 일주일에 3천만 엔(3십만 불) 매출 달성
▲ 장남 동경대 입학식 (일본 무도관)
▲ 딸 규슈대 입학식
▲ 한국상품 수출 공헌을 평가받아 무역의 날 수상
▲ 참치 중국 진출을 목적으로 일단 지도를 펴 놓고 그림을 그려 보자.
▲ 영문도 모르고 일본으로 이주하여 묵묵히 사업을 지원 해 준 가족들.
▲ FUKUOKA HAWKS 프로야구팀에 용병으로 온 이대호 선수 후원
▲ 세계 한인 무역협회 후쿠오카 지회 월례회에서 신상품 소개 중(3D Printer)
▲ 세계한인 무역협회 정영진 지회장 취임식과 참치 해체쇼
▲ 일본 굴지 바이어(COOP KOBE) 와 참치 상담 중
▲ 무역의 날 수출의 탑 수상(한국 자회사 SBC TRADING)
▲ 2013년 고민고민해서 신설회사 법인 이름 직접 작명
▲ 바다를 무대로 수산물 식품사업으로 우상향 성장하는 의미를 담아 만든 회사 로고.
New Balance 전속 프로 Designer 작품
▲ 남미 출장중 Paraguay Asuncion 에서 골프 , 국민영웅 PGA 우승자 Carlos 의 Private 골프크럽. 애완동물이 Crocodile .
▲ 남미 Uruguay Monte video 의 한국 공원,한국사람의 예절 인사를 배우자는 의미의 동상
▲ 오후 다섯시에 영상 44도 , 체온보다 높지만 건조 기후라 참을 만한 더위.
▲ 채용박람회 참가 ,모국 청년 채용 실적 다수
2018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우수상)
장성배 하나푸즈 사장(일본)
명란젓 ‧ 참치어업 통해 연 매출 500억 기업 키워
장성배 하나푸즈 사장은 대학 졸업 후인 1987년 주식회사 선경(현 SK네트웍스)에 입사했다. 한직을 떠돌았던 그는 1992년 명란 제품 국제 가공 사업을 맡으면서 능력을 발휘, 안정적인 판매 실적을 올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1995년 러시아와 일본이 명란을 확보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때, 고군분투한 결과 6,000톤(5,000만 달러) 판매 실적을 달성했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매년 1억 달러 수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다. 이런 성과 덕분에 그는 2003년 1월에는 선경그룹 오사카 식품사업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이후 회사에 사표를 낸 뒤 일본 후쿠오카에서 2003년 하나푸즈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2010년 명란젓 거래 과정에서 원·부자재와 채권, 채무를 관리할 부산 현지 법인으로 SBC 무역을 설립했다. 이어 2014년에 원양어선 5척으로 부산에 참치 원양 회사인 3T 오션을 설립했다. 이처럼 사업다각화를 진행한 그는 신용 하나로 매출액 500억 원(2017년)을 달성했으며, 임직원 161명을 거느린 중견기업가로 성장했다.
선경 입사 후 한동안 한직…명란 제품 가공분야 맡으며 두각
장 사장은 대학교 1학년 때 음악을 좋아해서 우연히 그룹사운드 동아리활동을 한 계기로 소규모 나이트클럽이나 미군부대(히야리아 캠프)에서 공연, 용돈벌이를 했다. 성당 야간학교에서 주 2회 음악 선생으로도 재능 기부도 했다. 음악 연주에 푹 빠져 지냈지만 학업을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공부도 충실하게 하여 대학 6학기 동안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그의 그룹사운드 경력은 선경에 입사할 때 조직생활과 하모니에 대한 가산점을 받아 남보다 수월하게 취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한 덕분에 50세를 넘긴 지금도 낯선 일본에서 재능 기부로 음악 연주자로 초청을 받고 있다.
장 사장은 1987년 주식회사 선경(현 SK네트웍스)에 입사했다. 회사의 기획 업무를 담당하고자 관리부를 희망하였고, 그의 뜻대로 배치를 받았으나 원하던 부서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회사의 조직 개편 시점에 맞춰 종합상사의 꽃인 영업부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다. 왜냐하면 무역상사의 핵심부서는 해외 영업부로서 그곳에서 근무하면 글로벌 역량을 키우고 해외근무 기회가 많기 때문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희망대로 영업부에 배치되지 않았고 1992년경 약 6개월간 보직 대기 상태로 있었다. 속된 말로 한직으로 좌천됐던 것이다.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시절에 SK그룹 계열사였던 선경의 일본지사에서 그동안 LG상사와 함께 수행해 오던 명란 제품 국제 무환수탁 가공사업(위탁자(일본 제품 바이어)는 원·부자재를 제공하고 수탁자(한국 MAKER)는 숙련된 고급 기술을 제공하여 제품을 생산하기로 하는, 국제 수출 계약의 한 형태)을 SK네트웍스가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본사에서는 이 업무를 수행할 책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명란 제품 국제 무환수탁 가공 사업은 내용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데다가 돈이 안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지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한직에 있었던 그에게 의향을 물어왔을 때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날부터 빈둥빈둥 일본어 책만 보던 생활을 청산했다. 이 업무를 맡으면서 그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1년 넘게 야근을 하는 등 강행군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담당 선배들로부터 늘 질책과 격려를 받았다. 그는 이때의 경험 덕분에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고 믿고 있다. 한마디로 한직을 떠돌던 그가 명란젓 가공 업무 분야에서는 단연 업계의 최고수로 성장하고 독보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관심이 있는 분야에 몰입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 습득하고 터득한 기량이 창업 후에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이 됐다.”고 회고했다.
명란젓은 일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반찬이다. 다만 명란젓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요리다.
명란젓은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가와하라 도시오(川原俊夫)이라는 사람이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고향 후쿠오카현 하카타로 돌아간 뒤 식품 도매상을 열었다. 그는 새 상품을 선보일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 부산 초량시장에서 먹었던 매운 ‘명란 김치’ 맛을 떠올렸다. 이를 ‘멘타이코’(명란젓의 일본 말)란 이름으로 선보였던 시기가 1949년 1월이었다. 멘타이코가 히트를 치면서 일본 전역에서 명란젓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때문에 명란젓이 일본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여기는 한국인도 많다.
명란 수출 연 1억 달러 달성…부장으로 승진
당시 명란젓의 가공 유통 비중은 일본이 95%가량 점유하고 있고 한국은 고작 5%를 내외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명란젓의 원료인 명란을 공급하는 명태의 어획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명태 어획고는 러시아산과 미국산이 5만 톤 정도다. 이는 전 세계 물량의 90%를 차지한다. 당시 일본을 제외한 해외가공 물량은 중국 5,000톤, 한국 1,000톤 정도다. 이 중 SK가 무환수탁 가공 수출업으로 연간 300톤(500만 달러) 규모에 해당하는 물량을 처리한다. 그는 무환수탁 가공 수출 사업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왔다. 그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시기는 1994년이었다. 어느 날 러시아 에이전트 1명이 그를 찾아와 연간 1만 톤 규모의 명란 원료를 취급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는 본사에 구두 보고를 한 뒤, 구매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 에이전트가 삼성과 LG상사 등으로부터 사기꾼으로 인식되어 어느 회사도 상대해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에이전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자 주야로 미팅 기회를 계속 가지면서 정보 분석, 상황 파악에 주력하였다. 특히 그는 일본과 거래하는 러시아 회사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 ·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 결과, 그 에이전트가, 페로스트로이카 시절 EU 지원금으로 8,000 톤급 14척을 스페인에서 건조하여 북태평양에서 명태조업을 통해 전 세계 피쉬 버그에 들어가는 필렛과 명란젓 원료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 기업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에이전트의 아버지가 러시아 경제 마피아였기에 1995년 봄에 러시아에서 명란젓 원료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따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업계 1, 2위를 점하고 있는 바이어그룹의 회장을 만나서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명란젓 원료를 공급해 줄 것이니 일본에서 수입 소화해 줄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했다. 이들 바이어 그룹의 두 회장들은 장 사장이 안정적으로 공급해 준다면 물량을 소화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995년은 러시아와 일본이 명란을 확보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때였는데 고군분투한 결과 6,000톤(5,000만 달러) 판매 실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사전에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그가 남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개척한 성과는 엄청난 실적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매년 1억 달러 수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다. 이러한 실적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1996년에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열렸다.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어, 영어, 일본어 등 3개 국어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끝난 후 그는 바이어와 함께 두 대의 헬기(대당 4,000만 달러)를 임차하여 그랜드캐넌을 관광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는 인생에서 최고의 절정기를 보냈다.
이런 성과 덕분에 2003년 1월에는 선경그룹 오사카 식품사업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일본 주재원으로 있으면서 한국산 명란 제품과 원료 수입, 삼치 수입 등으로 연간 7,0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같은 해 2월에 시애틀로 출장 갔을 때 6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본사에서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계약을 취소하라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본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바이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위약금을 받지 않고 계약을 취소해 줬다.
귀국한 후 상황을 파악해 보니, 회사 내부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SK 글로벌 분식 사태로 회사는 휘청거렸다. 이 여파로 일본 주재원 십여 명과 로컬 스태프 90명이 퇴직 처리되는 등 창사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그는 3개월 동안 사후 정리 업무를 수행한 뒤 서울로 와서 사표를 제출했다. 그가 못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2003년 6월 주재원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일본 법인장 후보로 낙점됐었다는 후일담을 우연히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때 회사 상황이 악화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일본 법인장으로 근무했을 것이다.
2003년 하나푸즈 설립… 창업 후 3년 동안 퇴직금으로 버텨
장 사장은 사표를 낸 뒤 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오사카를 떠나 후쿠오 카로 향하는 배를 탔다. 연고가 없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2003년 하나푸즈라는 회사를 세웠다. 하나푸즈의 회사명은 ‘come together’(서로 함께, お互にご-緒に)의 뜻을 담고 있다.
후쿠오카에 회사를 설립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오래전 우연히 방문한 후쿠오카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208km밖에 떨어지지 않아서 비행기로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교통 접근성이 뛰어난 점도 이곳에 자리 잡게 한 배경이었다.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겠다고 다짐한 것은 일본의 장점을 배우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됐다. 일본인의 친절함과 겸손, 배려, 남에게 폐 안 끼치기, 청결, 기술 중시 같은 것과 세계적인 브랜드를 갖게 된 비결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창업을 한 후 매일 부지런히 비즈니스를 찾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시작할 때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6개월 동안 단 한 건의 계약도 성사하지 못했다. 회사의 자산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사무실에 컴퓨터 2대와 전화기 2대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어서 특별히 영업하러 갈 곳도 없었다. 온종일 마우스의 클릭 소리만 들릴 뿐 사무실에는 전화가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다. 7개월째 한 재일동포 사장님의 도움으로 원료를 통관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단순히 세관 통관 업무를 수행했지만, 수입 서류 작성과 통관 업무, 배달 업무 등 실시간 통관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을 맡긴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창업 후 지금까지 실시간 통관 시스템을 활용 해오고 있다. 그는 회사 설립 후 약 3년 동안 집에 생활비로 매월 30만 엔을 줬는데, 퇴직한 후 받았던 퇴직금으로 근근이 버텼던 것이다. 그는 대기업 간부 출신이라는 것만 믿고 준비하지 않은 채 무작정 창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처절하게 실감했다.
창업 4년 만에 예전 명란젓 거래 회사를 찾아가서 거래를 부탁했다. 일본 업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첫 주문을 해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부산 공장과도 거래를 재개하여 3년 반 만에 명란젓 가공 시장을 장 사장 회사 전용 가공 공장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일본 초일류 명란 브랜드인 ‘카네 후쿠(kanefuku)’에 매주 1억 원어치 명란(4만 식)을 수출하고 있다.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통학 때문?
그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들이 어느 정 도 역할을 해주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들이 규슈 지역의 구루메 부설 중학교(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모교)에 합격하였다. 이 학교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50km 떨어진 지방에 있는데, 매일 전차로 통학을 해야 했다. 장 사장은 매일 6시에 일어나 전차가 7시 2분에 출발하는 역까지 아들을 태워다 주고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7시 7분에 출근해 9시까지 사장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고 9시부터는 거래처 바이어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나면 10시 이후에는 시간이 남았다. 그는 이 시간을 대충 허비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과 거래했던 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맞춤 서비스를 통하여 상대방에게 필요한 내용을 제공했다. 그 결과, 그의 평판과 신용이 좋아지면서 어려운 일 또는 난이도가 높은 일도 차츰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창업 7년 차가 되어서야 ‘사업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돈이라는 것이 이렇게 벌어지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들 때문에 회사를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게 됐다.
장성배 사장의 기업 경영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일본 후 쿠오카에 하나푸즈를 설립해놓고, 즉 본사를 후쿠오카에 두고서 부산에서 실질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인이 운영하는 명란젓 가공 회사가 아니라, 일본 회사인데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컨트롤 타워를 맡고 있는 일본 본사와 명란 제품 가공을 하는 한국 파트너들과 협력하는 것은 물론, 명란 및 참치 사업의 환경을 분석하고 일본 파트너의 신뢰를 얻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둘째, 수산 산업의 금융의존도가 50% 이상인 점도 일본에 본사를 둔 이유다. 왜냐하면 일본의 금융 대출이자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셋째, 일본에서 상품을 판매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한국 상품을 판매하려면 수입 절차가 까다롭고, 수입 승인이 났다 하더라도 일본 마트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품질과 위생에 대한 200가지 항목의 체크리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하나푸즈는 선경 시절에 축적해 왔던 기존 보유 역량과 수입자로서의 기능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런 불필요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본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수직 계열화하는 경영을 검토해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점이 더 많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장 사장은 명란젓 거래 과정에서 원·부자재와 채권, 채무를 관리할 현지 법인으로 2010년 SBC 무역을 설립했다. 그가 계열사를 개설한 것은 일본 하나푸즈의 자금이 연간 3억 엔에서 7억 엔 정도 투입되지만, 이 자금에 대한 원·부자재와 채권, 채무를 관리할 부산 현지 법인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2014년에 65억 원을 투자하여 원양어선 5척으로 부산에 참치 원양 회사인 3T 오션을 설립했다. 그는 사실 2008년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잡은 참치를 일본에 수입·판매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는 참치를 전량 일본으로 수출해 연간 13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다만 시황에 따라서 원료 확보가 어려워지거나 할 수 없다는 점이 걸렸다. 참치의 안정적 확보가 일본 내수 판매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들 선박이 잡는 참치의 규모는 척당 400톤이며 대략 연간 15억 엔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 장 사장은 일본 대형 매장 바이어의 니즈에 맞춰 원양어선을 투입하여 참치를 잡은 뒤 최종 소비자까지 가장 빠르게 공급하는 원스톱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후쿠오카 하나푸즈에서 1차+2차+3차를 합쳐서 6차 산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켓에서 다른 업체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로 미흡한 수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6차 산업을 실천한다는 사명 아래 지금도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가 수산 분야에서 정착한 6차 산업의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먼저 원양 참치 선박에서 잡은 참치를 부산으로 옮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부산에서 1차 가공한 후 일본으로 수출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도쿄와 고베 등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한다.
그가 2003년 창업한 뒤 15년 동안 기업을 경영하면서 매달려온 철칙은 수직 계열화를 구축하여 6차 산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의 경영 철학은 시장에서 1등 하는 기업을 벤치마킹한 뒤 2등으로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마존과 같은 플랫폼을 구축한 회사를 벤치마킹하고 아마존이 흉내 낼 수 없는 감성마케팅을 전개하여 독자적인 생존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이를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닮은 경영’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동안 신용 하나로 매출액 500억 원(2017년)을 달성했으며, 임직원 161명을 거느린 중견기업가로 성장했다.
어릴 적 “신동”…지진 구호 등 봉사활동 나서
장 사장은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던 그는 세 살 때 한글을 읽고 썼으며, 구구단을 암기했다. 양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 바람에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부친이 운수업에 종사해서 25평 단층 기와집에는 가족들과 운전수 등 15명이 함께 지내야 해서 무척 시끌벅적했다. 당시 아버지의 회사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차량 보험이 없었던 탓에 어려움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8톤 덤프트럭을 몰고 토석장에서 건설 현장까지 흙을 싣고 운반하는 아버지의 조수로서 잡일을 도와드렸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다투는 성과급 작업과 하루 왕복 몇 번을 해야만 수익을 내는지에 대한 것, 진성어음 같은 실물경제를 익히게 됐다. 사실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자청한 것은 가장 맛있는 자장면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회 활동 경력이 일천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회사에 안정적인 경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쏟았기 때문이다. 2012년 1월에서야 재일본 큐슈한인회 부회장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6월부터 세계한인무역협회 후쿠오카 지회의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봉사 활동은 2016년 4월 16일에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 구호 활동이다. 당시 교민이었던 정영진 대표가 운영하던 아소 야마 나미 골프클럽과 리조트의 피해가 심각하여 3,000만 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후쿠오카 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구마모토를 찾았다가 지진으로 귀국이 어려워진 여행객을 위해 비상식량을 제공하고 대형 버스 5대를 수배하여 약 200명의 여행객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밖에 그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야구선수 이대호와 축구 감독 윤정환의 후원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원료에서 제품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참치 어업부터 말단 소비자 판매까지 수직계열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미국 시애틀 출 장중 , 명란 원료 생산하는 배
(Factory Trawler ; 배 뒤쪽으로 명태가 그물에 올라오면 배 한 쪽에서는 채란, 선별, 냉동, 포장이 완료되어 완제품이 나오는 공장 기능을 가진 어선)
▲ 검품 (품질평가)
▲ 미국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신제품 출시
▲ 카네후쿠 브랜드로 관동지역 일류 슈퍼에 한국산은 우리 회사 제품이 석권
▲ 만 50세 생일기념으로 처음으로 새 차 구입 , 가족과 함께
▲ 태평양을 무대로 대한민국 수출에 공헌하고 있는 LONG LINER (독항선; 20개월 한 항차)
▲ 깡깡 얼은 초저온 선창에서 육지로 하역하고 있는 Big Eye Tuna , 가공하여 일본 스시감으로 전량 수출
▲ 부산 부두의 하역 모습, 한마리에 얼마짜리일까 늘 계산해 본다
▲ 일본 초일류 슈퍼마켓 ( COOP KOBE) 의 신년 특판 찌라시 , 일주일에 3천만 엔(3십만 불) 매출 달성
▲ 장남 동경대 입학식 (일본 무도관)
▲ 딸 규슈대 입학식
▲ 한국상품 수출 공헌을 평가받아 무역의 날 수상
▲ 참치 중국 진출을 목적으로 일단 지도를 펴 놓고 그림을 그려 보자.
▲ 영문도 모르고 일본으로 이주하여 묵묵히 사업을 지원 해 준 가족들.
▲ FUKUOKA HAWKS 프로야구팀에 용병으로 온 이대호 선수 후원
▲ 세계 한인 무역협회 후쿠오카 지회 월례회에서 신상품 소개 중(3D Printer)
▲ 세계한인 무역협회 정영진 지회장 취임식과 참치 해체쇼
▲ 일본 굴지 바이어(COOP KOBE) 와 참치 상담 중
▲ 무역의 날 수출의 탑 수상(한국 자회사 SBC TRADING)
▲ 2013년 고민고민해서 신설회사 법인 이름 직접 작명
▲ 바다를 무대로 수산물 식품사업으로 우상향 성장하는 의미를 담아 만든 회사 로고.
New Balance 전속 프로 Designer 작품
▲ 남미 출장중 Paraguay Asuncion 에서 골프 , 국민영웅 PGA 우승자 Carlos 의 Private 골프크럽. 애완동물이 Crocodile .
▲ 남미 Uruguay Monte video 의 한국 공원,한국사람의 예절 인사를 배우자는 의미의 동상
▲ 오후 다섯시에 영상 44도 , 체온보다 높지만 건조 기후라 참을 만한 더위.
▲ 채용박람회 참가 ,모국 청년 채용 실적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