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2018국회의장상-안청락

2018수상자 - 국회의장상

안청락 상익그룹 회장(중국)

 

국악도에서 군인, 그리고 사업가로 변신

 

안청락 상익그룹 회장은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6시에는 어김없이 일어난다. 기상나팔과 함께 일어났던 군대에서의 습관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다.

안 회장은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국악학과에 입학했지만, 학과 공부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어렸을 적 꿈인 장군이 되고 싶어서 학군사관후보생과정(ROTC)에 지원했다. 1985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했다. 군 복무 시절은 평가받을 때마다 늘 상위 10% 안에 들었을 정도로 속칭 군대 체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셋째 형인 안봉락 회장이 사업 제안을 해왔다.

독신한 신앙인이었던 둘째 형의 이민으로 둘째 형이 운영하던 화장품 사업을 물려받은 셋째 형은 혼자서 운영하기에는 벅찼다. 믿고 함께 할 사람이 ‘막내’라고 생각한 그는 안청락에게 군에서 전역할 것을 강권했던 것이다. ‘장군이라는 명예도 중요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더 중요하다며 돈이 있어야만 평생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다’며 간곡하게 설득하는 형의 말에 그는 결국 장군의 꿈을 접고 1990년에 대위로 예편했다.

 

중국 진출, 새로운 영업마케팅 적용 내수시장 장악

 

이렇게 화장품 유통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중 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1992년경 안봉락 회장은 나드리화장품의 장기 재고를 독점 매입하여 저가로 판매하는 업무를 안청락 회장에게 맡겼다. 그는 지인을 통해 저가 화장품이 필요한 중국 무역회사를 소개받았다. 이 무역회사와 거래를 하면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 무역 회사의 창고에 방문했던 안 형제는 자신들이 납품한 제품이 중국에서 10배 이상의 이윤을 남기고 판매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무역 회사의 거래 물품이 화장품은 물론 의류, 구두, 핸드백 등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들 형제는 중국 시장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었다. 당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하지만 한중 수교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중국 시장이 무궁무진하게 열릴 것이란 사실을 직감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당장 중국으로 가자’며 의기투합했다.

중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중국 선양에 거주하고 있던 외가 친척을 찾는 일이었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 시점에 친척 방문으로 중국 요녕성 선양시 소가툰에 거주하고 있던 외가 친척을 만났다. 이들은 친척들에게 화장품 세트를 나눠주며 시장 진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이종사촌들의 시장조사 결과를 토대로 ‘화장품 사업은 중국에서 무조건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에 안봉락 회장은 1993년, 맡고 있던 한국코티화장품을 안청락에게 맡기고 가족을 데리고 선양으로 아예 이주했다. 그곳에서 곧바로 화장품 공장 설립을 추진했던 것이 오늘날 신생활그룹 성장 신화의 출발점이다.

안봉락 회장은 중국의 법규를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중국인의 물품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 있도록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형태의 영업 · 마케팅 시스템을 구축했다.

우선 전국적으로 화장품 매장을 확보했다. 매장에 마사지 침대를 갖추었고 전문 교육을 받은 피부마사지 전문가가 손님이 오면 무료로 화장을 해주었다. 기존에 없던 방식이었다. 신생활그룹이 초기에 심혈을 기울었던 분야가 바로 이 교육이다. 화장품을 판매하는 마케터와 마사지 전문가를 전문적으로 키워냈다. 최소 1년 이상 교육을 받아야만 매장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러한 신규 마케팅은 중국 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내수 시장 을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형제는 역할을 분담했다. 안봉락 회장은 영업 · 마케팅을, 안청락 회장은 중국 화장품 공장에 필요한 화장품 원료와 부자재의 확보 · 공급을 맡았다. 또한 현지의 이종사촌들은 중국 공공기관(세무국, 공상국)의 관리들을 상대하는 대관 업무(공무 영업)를 맡았다. 이들은 대관 업무를 무난하게 해냈다.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기업이 현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하거나 철수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대관 업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안청락 회장은 조언한다. 만약 중국의 친척들이 대관 업무를 맡아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신생활그룹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신생활그룹 부회장으로 매출 4조원 달성 기여

 

안봉락 회장은 중국 진출 2년 만에, ‘상아’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기 위해 화장품 공장의 건설에 착수했다. 1994년 9월 선양 소가툰의 2만3천평 부지에 건평 1만2천평의 화장품 공장을 착공하여 이듬해에 완공했다. 한국나드리화장품으로부터 관련 기술을 전수받아 현지에서 생산 설비를 갖추고 제조에서 유통, 판매까지 수직 계열화를 통해 논스톱으로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로 인해 중국의 내수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었다.

안청락 회장은 1995년에서야 중국으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신생활그룹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를 중국의 현실에 맞춰 철저하게 기획, 추진했다. 이러한 전략에 대한 현지인의 호응도가 높아 판매 실적이 급성장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중국까지 미치면서 신생활그룹의 상황도 녹록지 않게 되자 그는 1999년 말 항공권만 달랑 끊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반면 안봉락 회장은 여전히 중국에 머물며 내수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현지에 건설한 화장품 공장을 서서히 가동하며 내수시장에서 필요한 물량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2001년이 되자 중국 내수시장의 개척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봉락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겠다’며 화장품 원 · 부자재의 공급을 다시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안청락 회장은 심기일전하여 2001년에 청와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중국 화장품 공장에 필요한 원 · 부자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인쇄와 포장, 다양한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플라스틱 사출 회사 등을 잇달아 설립했다.

2005년부터 20011년까지 6년 동안은 중국 청도와 상해에 체류하면서 신생활그룹에 화장품 원 · 부자재를 조달하며 중국 현지 생산 공장을 건설하는 데 주력했다. 이 기간에 다행히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이후 2012년까지 정체 현상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안봉락 회장은 휴식과 더불어 새로운 사업 구상을 목적으로 한국으로 일시적으로 귀국하고 안청락 회장이 신생활그룹의 부회장이 되어 그룹을 경영하였다. 이때 안봉락 회장은 안청락 부회장에게 향후 그룹의 분화를 대비하여 자신만의 시장 공략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안청락 회장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신생활그룹의 부회장을 맡으면서 중국인의 심리를 꿰뚫는 경영을 통해 예전과 같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되찾았다. 매년 매출액이 30~40%씩 향상됐다. 직원들에게는 보상으로 활기를 불어 넣는 정책을 펼쳤다. 기여도가 높은 직원에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보상을 해주었다. 이 덕분에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조직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가 부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신생활그룹은 화장품, 건강식품, 생활용품 등을 연구 · 제조 · 판매하는 중국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선양 화장품 공장을 비롯해 상하이(화장품 공장 및 연구소), 칭다오(건강식품, 생활용 품 공장), 쿤산(화장품 사출용기 공장) 등 5곳에 공장을 두고 20여 개의 자체 브랜드를 바탕으로 중국 전역에 지사 75개, 물류 거점 12개, 매장(대리점) 1만2,000여 개에 이르는 광범위한 사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로써 신생활그룹은 직원 900여 명, 방문 판매원 12만 명, 연 매출 4조 원의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2세 경영 체제의 구축을 위해 2017년 상익그룹으로 분화

 

안봉락 · 청락 회장은 2017년 11월에 2세 경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그 룹을 분화하기로 결정한다. 같은 업종에서 2세, 3세가 종사할 때 생길 수 있는 불협화음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처였다. 안봉락 회장은 신생활그룹의 마케팅과 제조 등의 업무와, 안청락 회장이 맡고 있던 원 · 부자재 및 용기, 인쇄 포장, 플라스틱 사출 등 화장품과 관련한 계열사들을 모두 매수 하였다. 대신 안청락 회장은 신생활그룹의 주력 상품과 관련이 없는 계열 사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회사를 일궜다. 그것이 바로 상익그룹이다. 2017년 6월 13일에 중국 정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룹의 명칭을 상익(相益)으로 지은 이유에는 남다른 경영 철학이 있다. 안청락의 경영 철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로움을 추구하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윈-윈 비즈니스 전략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속담처럼, 평소에도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것보다 우선하여 사회적 · 윤리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기업(인물)이 되어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에 앞장서겠다는 뜻도 담고 있다.

상익그룹의 모체는 상익플라스틱유한공사(쿤산 2006)를 중심으로, 삼흔인쇄유한공사(선양 2007), 우리위생용품유한공사(항저우 2008), ACR 무역유한공사(상해 2013), 서미일용품제조유한공사(선양 2014), (주)뷰인스(한국 2014), 메이커위생용품유한공사(선양 2015) 등이다. 유통 및 무역 부문에서는, 청와인터내셔널과 청와국제물류주식회사, 삼광우무역유 한공사(선양 2014), 운교무역유한공사, NE-HASKO상무유한공사, 광익 무역유한공사, 한차림(한국음식점)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또한 친환경 생명 사업을 영위하는 광익농업과기유한공사(선양 2014) 등이 상익그룹에 편입됐다. 이와 함께 문화사업의 비영리법인인 한중교류문화원을 비롯하여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 선양유아국제여행사, 선양상익국제문화클럽, 요녕리플스픽쳐스, 스크린킥주식회사인 (주)하다 등도 상익그룹에 포함됐다.

안 회장이 밝힌 상익그룹의 향후 사업 방향은 친환경 생명 사업과 유통 사업, 문화 혁신 사업, 농생명 사업 부문 등 4개 분야에 그룹의 역량을 모으는 것이다. 현재는 2017년에 설립한 상익식품지분유한공사, 상익농업과기유한공사 등을 중심으로 농업 관련 분야에 사업을 집중하고 있다.

상익그룹은 2018년 12월 요녕성 영구시 자유무역구에 20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친환경 옥수수를 분말로 가공하는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영구시에 옥수수 가공 공장을 세우는 이유는 2018년 중 · 러 양식주랑(粮食走廊) 협정에 의거하여 러시아의 최상품 옥수수를 더욱 저렴하게 확보할 수 있는 데다가 영구시 바위첸항으로 직접 들여올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 생산된 제품을 해외 수출도 하고, 중국 동북은 물론, 화동과 화남, 서남 등 전 지역으로 수월하게 유통시킬 수 있는 교통망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 회장은 이곳에 2021년까지 연간 500만 톤 규모의 친환경 옥수수를 분말로 처리할 수 있는 공장 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가축의 사료나 유전자 변형 옥수수가 아닌 친환경 옥수수를 분말로 가공해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옥수수쌀, 옥수수빵, 옥수수면, 옥수수기름 등을 생산, 해외 수출과 중국 내수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이다. 상익그룹이 세계 최초로 개발 · 보유하고 있는 옥수수 특강분말特强粉末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 하기 위한 비전이다. 이 기술은 유기농 옥수수의 맛과 식감, 영양을 유지 하고 있어서 평소 섭취만으로도 건강식품의 효능을 기대할 수 있다.

 

중국 국가프로젝트 따내…농업 6차 산업 모델 완성 계획

 

안 회장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중국 정부가 추 진하는 국책사업인 ‘요녕성 요양시 태자도 특색소진(특색마을) 건설 사업’이다. 상익그룹은 2018년 2월에 요녕거농실업, 대련홍댄투자그룹과 함께 340억 원을 출자하여 요녕도화도미려소진실업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태자도 특색소진 프로젝트를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SPC(특수목적법인) 형태로 설립한 것이다.

2018년 6월 1일 요녕도화도미려소진실업유한공사가 태자도에 스마트 팜 전진기지를 건설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중국 정부의 심의를 거쳐 태자도 특색소진 프로젝트 운영권을 확보하였다. 태자도 특색소진의 1단계 프로젝트는 태자도에 옥수수 가공기지, 동충하초연구소, 백년산삼연구소, 버섯재배기지, 유기농과일 및 야채 재배기지, 클로렐라 배양기지, 정원농장과 유기온실, 화초관광원, 투수(물을 흡수하는)블록기지, 첨단육우양식장, 국가양로단지 등 15개의 기지 및 단지를 설립 · 운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태자도에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것은 태자도 강변이 생태회랑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기후가 온화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토양이 비옥하여 예로부터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안 회장은 태자도에 농업을 근간으로 6차 산업모델을 완성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외 안 회장이 취득한 태자도 개발 운영권 중 하나는 해외로부터 테마파크 개발 자금으로 2조 원을 조달하면 중국 정부가 3조 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요양시는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두 개 마을의 주 민들을 이주시킬 계획이고, 이미 한 곳은 이주가 끝났다.

더불어 안 회장은 경영의 초점을 공익을 실현하는 데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오염된 유전지대의 기름 찌꺼기를 제거하는 ‘SMO’ 신기술을 통해 중국 인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할 목적으로 친환경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재 털어 한중교류문화원 개원 양국 소통 마중물 역할

 

안 회장은 국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문화의 가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기업인이면서도 문화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사재를 털어 2014년 7월 순수 민간 차원의 문화 단체인 한중교류문화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중국은 ‘문화’ 활동을 정치 활동의 일환으로 보기 때문에 활동에는 늘 제약이 수반된다. 특히 기업인이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 가 중국 정부의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그의 끈질긴 노력이 중국 정부를 움직였다. 결국 2015년 7월에 한중교류문화원이 중국 국무원 산하 동북아개발연구원의 ‘중한교류중심(中韓交流中心)’으로 편제되어 정식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단, 3년마다 갱신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었다.

선양 코리안타운에 위치한 한중교류문화원은 한국신성(韓國新城) 건물의 1~3층을 임차하여 사용하고 있다. 총 666평을 사용하고 있고 연간 임차료만 1억 원이 넘지만, 안 회장이 사재를 털어 충당하고 있다. 1층에는 아름다운카페, 국악전수실이, 2층에는 청초당도서관(靑草塘:안중근 의사의 유묵에서 명칭 차용), 어린이만화도서관, 상익홀(110석 규모), 경로당(육유당:育遊堂), 3층에는 태권도시범관, 탁구장, 서화관, 동북항일역사자료전 시관 등이 들어 서 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3무1존(三無一存)이라는 독특한 실천 이념을 갖고 있다. ‘3무’는 일체의 정치적인 언급을 삼가며, 중국인(조선족 포함)은 물론 한국인, 북한인 등을 차별하지 않으며, 문화 인프라를 활용해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강령이다. ‘1존’은 문화 나눔이라는 한 가지만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는 안 회장이 품고 있는 ‘마중물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한중교류문화원의 활동이 마중물처럼 지금 당장에는 보잘것없을지라도, 훗날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서로 소통하며 하나가 되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간 한중교류문화원은 한국과 중국의 문화 교류를 통한 우호증진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자체 추진 행사와 대외 협력 행사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자체 추진 행사는 교육, 공연, 체육, 전시, 보훈 등으 로 분류할 수 있고, 대외 협력행사는 국가기관 협력행사와 민간기관 협력행사로 분류할 수 있다.

 

교육의 경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슬로우-리딩Slow Reading’이라는 교육 방법을 통해 한국어를 더욱 친숙하게 읽고 쓸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고, 노년층 대상으로는 평생교육 차원에서 ‘실버건 강문화대학’을 개설, 연간 졸업생 숫자가 500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다.

또한 2016년에는 ‘키다리아저씨(현 선양꿈나무장학회)’를 건립, 심북신구조선족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또 국악교실을 운영하고 있고 주 선양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함께 한류의 대명사인 K-pop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한 ‧ 중 친선배구 등 체육활동, 태권도시범단 초청행사 등도 이어지고 있다.

전시는 동북항일역사자료전시관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의 공통 된 주제인 ‘항일’을 전시 주제로 설정하고, 동북 삼성에서 전개한 한·중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측면에서 전시기획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밖에 (재)항일영상 역사재단과 함께 한·중 항일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독도협회 설립 영토수호 앞장…민족정신 함양도

 

안 회장의 폭넓은 활동은 2017년 2월 22일 ‘대한민국독도사랑협회’의 창 립으로 이어졌다. 이날은 일본의 시네마현이 제정한 소위 ‘다케시마의 날’ 이기도 했다. 창립일 자체가 일본의 억지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후 2018년 8월 21일, 그동안의 활동 성과를 인정받아 해양수산부의 비영리 사단법인 제299호로 설립 인가를 받고 (사)대한민국독도협회(www.ddsr. or.kr)로 거듭났다.

지금까지 대한민국독도협회는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 철폐 촉구 행사, △10월 25일 독도의 날 기념 행사, △독도 앞바다 찾기 전 국민 서명 대회, △독도 바로 알기 교육 자료 발간 및 국내외 독도 사랑 강연, △독도 수호 결의대회 및 독도 탐방, △길거리 독도 홍보 행사, △대학생 SNS 기 자단 운영, △요양 시설 자원봉사 등의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해왔다.

대한민국독도협회는 해외 지부로서 중국총연합(베이징, 상하이, 칭다 오, 광저우, 선양, 대련)을 조직·운영하고 있다. 박 회장은 베트남 하노이연 합 및 미국 뉴욕연합, 인도네시아연합 등을 조직할 계획도 갖고 있다. 해외연합은 독도를 중심으로 교민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나아 가 전 세계인들에게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사실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안 회장은 2013년부터 선양한국인(상)회의 고문을 맡으면서 선양한국인 (상)회와 한중교류문화원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한국 교민들이 더욱 유익 한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안 회장은 17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선양협의회 회장을 맡아 청소년 통일골든벨 대회, 청소년 동북 삼성 통일캠프 등을 개최하여 한·중 청소년들에게 평화통일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무엇보다, 기미독립선언보다 앞서 중국 동북 삼성에서 민족 대표 39인 에 의해 발표되었던 무오독립선언의 의미와 가치를 대내외에 선양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중국 선양에서는 매년 2월에는 주 선양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공동으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게 되었다.

 

유복했던 성장 과정…고3때 데모 주동 불이익도

 

안 회장은 ‘국악의 고장’으로 알려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쌀장 사를 했던 부모님(안도성, 김기순) 슬하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던 그는 비교적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집에서 한때 사과 과수원을 운영했던 지라 손만 뻗으면 지천에 널린 과일을 따먹었던 추억을 떠올리면 행복감에 젖어들곤 한다.

그가 국악을 전공하게 된 것은 이성 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 년 여름방학 때 선배를 따라 한 여자 중학교의 교장실을 방문하게 됐는 데, 그곳에서 또래 여학생의 안내를 받았다. 순간 이름도 몰랐던 그녀에 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 학생이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980년의 봄을 맞았던 고3 때 데모를 주동했다. 당시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이라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했다. 국립국 악고등학교를 상위권으로 졸업하면 서울대학교 입학은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국립국악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실기 강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아서 입학원서를 제출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한 양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했다. 자녀는 3남 2녀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