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2018산업자원부장관상-최분도

2018수상자 - 산업자원부장관상

최분도 PTV그룹 회장(베트남) 

베트남에 신개념 물류 ‧ 유통 적용 종합물류그룹 성장


 

<베트남 국세청 모범 납세자상 수상>


숱한 실패 딛고 일어선 오뚝이…2004년 PTV 창업

 

최분도 회장은 대학교 4학년 때 국내 소방 설비 및 소방 제조 1위 기업인 P사에 특채됐다. 그는 1993년 10월부터 베트남 지역을 대상으로 해외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채 1년도 안 되어서 회사는 부도 처리되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해서 해외영업을 시작했으나 신통치 못했다. 1995년에 1인 기업으로 창업했고 운이 좋게도 베트남 국영 석유개발공사인 ‘페트로 베트남’에 소방설비 및 안전장비, 해상용 로프 등을 공급했다. 그러나 1997년 대한민국이 IMF직격탄을 맞으면서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방설비 제품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원자재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수입을 했는데, 환율급등으로 자재단가가 요동을 쳤기 때문에 단가를 맞출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99년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았다. 임신 7개월이었던 아내는 태중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하여 임신한 상태에서 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태중의 아이는 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조산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둘째 아이는 한 달 남짓 영·유아 중환자실에서 지내야 했다. 아내는 출산 후 본격적인 항암 치료를 받았다. 최 회장은 아내와 아이를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역시 어려운 회사도 경영해야만 했다. 더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새로운 곳으로 옮겨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는 1만 달러만을 들고 2002년 10월 베트남 호치민으로 이주했다.

베트남에서 착수했던 사업은 역시 한국에서 소방 설비와 안전 장비를 수입하여 유통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듬해 2003년부터 베트남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중국산 소방 설비의 저가 공세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동종의 아이템으로는 더는 시장에서 도저히 버티기 힘든 상태에 직면했다.

무엇보다도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고정수입이 필요했다. 교민의 소개로 자수기계를 구매해 자수업체에 임대하면 고정적인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투자했으나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가 다니던 호치민 한인 성당의 한 교우가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도움을 줬지만 불과 한 달 만에 최 회장은 수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됐다.



<베트남 세관원 한국 유학 관련 MOU>


최 회장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당시 베트남에는 특별한 산업 기반이 거의 없었지만 베트남전쟁 이후 시장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정부와 근면·성실한 베트남 민족의 특성을 감안하면 조만간에 베트남이 기회의 땅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욱이 1997년부터 베트남에도 한류 붐이 불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베트남 열악한 통관 서비스 개선시킨 주인공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베트남의 물류 및 통관 시스템은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소방 설비를 수입하면서 충분히 인지했던 이 노후 물류 및 통관 시스템을 개선하면 조만간에 이 사업이 유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결정한 후 인생의 모든 것을 베트남에 걸어야겠다고 결심하고, 2003년 3 월 1일에 가족들을 데려왔다.

사실 그는 한국은 물론, 베트남에서도 물류 사업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단지 오랫동안 호치민에서 기존 업체가 관행적으로 하는 물류 서비스를 답습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고객의 입장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구현해보자는 각오로 이 분야에 진출했다.

베트남은 값싼 노동력 때문에 고정적인 인건비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 그는 앞으로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으로 진출하려고 할 때 투명한 통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계 물류 업체를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2004년에 PTV를 창업했다. 베트남 물류 및 통관시스템을 혁신시키고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창출해주는 방안을 모색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다.



PTV의 명칭은 베트남어로 ‘Phu Thanh Viet’으로 ‘베트남에서 부와 가치를 창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영어로는 ‘Professional, Timely, Value-add’의 약자다. 회사 명칭은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서 고객에 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최 회장이 내건 최상의 서비스는 크게 4가지로서 다음과 같다.

첫째, 통관 및 포워딩, 창고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로 구성된 인력들이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으로 서비스한다. 둘째, 한국인과 현지인 등 고객별 전담 인원을 배치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셋째, 경쟁력이 있는 항공 및 해상 운임을 확보하여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시한다. 넷째, 온-오프 라인을 통해 베트남에서 거래를 시작하는 중소기업 고객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 이사회 취임식>


최 회장은 세 가지 측면에서 베트남의 통관 및 물류 서비스의 불편한 점을 개선했다. 첫째, 선진화된 원스톱 물류 서비스를 구축했다. 둘째, 베트남의 통관과 관련된 규정과 절차를 개선시켰다. 셋째, 비용의 불합리성,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통관요율에 대한 요금표(Tariff)를 만들어 고객들의 부담을 줄였다. 이처럼 베트남 세관과의 교류를 통하여 불합리한 규정과 절차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한국 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양질의 통관물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공부하면서 베트남에 새로운 물류‧유통 시스템을 적용하고 제도를 고치도록 현지 공무들을 독려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이 기업을 창업 15년만에 베트남 종합물류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아세안 일자리 협약식-문재인 대통령


2008년 1월에 PTV로지스틱을, 2015년 11월에 PTV파트너스 등을 잇달아 설립했다. 이들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은 180여 명이며 매출액은 750억 원을 넘는다. 이들 업체들은 베트남에 투자 한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에 통관 및 물류·트러킹(trucking)·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세계 80개국에 600여 개의 파트너 기업을 두고 물류 및 보험, 유통, 무역 등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이러한 괄목할만한 성장을 달성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베트남 정부를 상대로 통관 및 물류 서비스 분야에 대한 제도 개선을 제안하고 이뤄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베트남 세관원들도 선진화된 교육을 받아야만 고도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 후 실행에 옮겼다. 인하대학교 물류대학원 MBA 과정과 베트남 세관원들을 연계하여 공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먼저 인하대학교에 학교발전기금으로 2억 원의 기부금을 냈다. 인하대에서는 이 기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여 학기마다 베트남 세관원 1명씩을 선발, 물류전문대학원 MBA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5명의 세관원이 학사 과정을 석사 과정으로 수료했다. 이중 4명이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명이 박사를 취득했다.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직에 복귀한 세관원들은 한국의 선진화된 물류시스템을 경험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 업체의 입장에서 업무를 진행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업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교육 연계 작업은 2021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매년 베트남 세관원 선발 인하대 MBA 과정 지원

 

최 회장은 PTV의 베트남 통관 담당 직원들이 통관 규정과 법률을 꼭 배우게 하고 있고, 동시에 베트남 세관원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끌려가지 말고 규정에 맞게 일하라고 말한다. 때로는 세관 공무원들과 토론도 하라고 당부한다. 특히 화주의 입장에서 업무를 처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PTV 직원들은 한국 고객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다.


<YBLN 활동  회장선출>


비포장 육로로 72시간 원자재 긴급 수송 생산라인 중단 막아

 

PTV그룹은 고객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72시간 동안 원자재를 수송해 납기 기한에 맞춰 공급했던 신화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2008년 한국 대기업의 현지 공장에서 꼭 필요한 원자재를 신속하게 공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흘 안에 원자재를 수급하지 못하면 공장의 생산라인이 중단되고, 하루 약 40만 달러(약 4억5천만 원)의 손해를 볼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최 회장은 이 긴급 연락을 받고 그룹의 총역량을 가동하였다. 기존의 해상 경로를 이용하면 운송 시간만 1주일가량 걸려서 도저히 납기 내에 맞출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중국 북부의 국경에서 원자재를 넘겨받아 육로를 통해 호치민까지 트럭으로 이송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 지역인 랑선에서 동나이성의 년짝까지의 거리는 약 1,800킬로미터였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는 상황에서 트럭으로 72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먼 거리였다.




당시 원재료를 수송할 도로는 베트남 남북종단을 잇는 왕복 2차선(현재도 고속도로 없음) 밖에 없었다. 도로의 포장 상태가 좋지 않고 일부 구간은 비포장 도로인 탓에 평균 시속 30~40km을, 일부 구간은 15km를 달려야 할 정도로 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그는 운전사 6명을 고용,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2교대로 24시간 운행했다. 문제는 연식이 23년 이상된 노후 트럭 3대를 쉬지 않고 운행한 탓에 차의 엔진 온도가 심하게 올라가서 갑자기 서버리는 일종의 오버히트 현상이 15차례나 발생했다. 심한 경우 차가 고장 난 바람에 긴급 수리로 차를 움직였다. 교량 하중이 5톤 미만으로 규정된 곳을 건너갈 때는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서행해서 어렵게 건너갔다. 이렇게 밤샘 운전을 해서 공장이 멈추기 4시간 전에 원자재를 전달했다. 자칫 잘못하면 고객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던 긴급한 상황에서 최 회장은 오로지 책임 완수를 해 야겠다는 생각으로 온갖 열악한 환경을 이겨냈던 것이다.

<한상 꿈꾸는 교실 후원>


이로 인해 PTV는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객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기업,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해내는 기업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고객이 일감을 PTV에 소개했다.

PTV는 직원 복지에도 투자를 많이 한다. 직무 교육과 더불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주고 있다. 매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태국, 싱가포르, 한국 등 해외에서 연수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직원의 대부분은 여권을 처음 만들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살았지만, PTV에 입사한 뒤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있도록 최우선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직원 개개인의 꿈도 성취하고 기업의 목표도 달성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평양방문>


직원복지 적극 투자 ‘직원 꿈’ ‘PTV 목표’ 동시 달성

 

최 회장은 직원들이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어야 고객사의 물류와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꿈은,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한 공장의 해외 이전 방식이 아니라, 전문성을 바탕으로 현지화에 성공함으로써 모국의 투자자와 현지인들에게 모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관세와 물류, 운송, 보험과 관련된 서비스 외에 현지 변호사와 회계사를 채용해 금융, 세무, 법무 등을 총괄하는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추가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베트남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인들이 PTV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좀 더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최 회장 자신이 베트남에 진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기를 당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많은 한국기업이 베트남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보고 있다.<

회사 창립 10주년 공로상 시상


회사 창립 10주년 기념사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한국사람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민족끼리 해외에서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살면서 파일을 키워서 한민족 공동체의 발전을 모색하지는 못할망정 동족끼리 서로 경계하고 갈등을 부채질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생각했다.

최 회장은 사회봉사 활동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2012년부터 매월 장애인복지 시설에 후원을 하고, 베트남 현지 학교에 1년에 한 번씩 컴퓨터를 기증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기증한 컴퓨터는 대략 40대 정도. 그는 호치민 한국학교의 장애우 학생들이 일반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교민 잡지의 기사를 접한 뒤 해당 학교를 방문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600여 명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였다. 장애우들이 특수 교실에서 전담 교원에 의해 특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장애우 특수 교실을 만들고 필요한 보조 기구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 가족 여행


문학소년 사제의 꿈 접고 사업 전선으로


최 회장은 유년 시절에 공부보다 과외 활동을 더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다. ‘가을 아침’이라는 시를 써서 교내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인문학을 좋아하면서 이공 분야에도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엽록소를 리트머스 종이로 측정하던 실험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따로 있었다. 가톨릭 신학을 전공해서 사제가 되고 싶었으나 본인과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다니던 성당의 지도신부님이 동양철학을 먼저 공부하고 그다음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었고 1986년에 동국대 학교 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1988년도에 군에 입대해서 1991년에 제대 했다. 제대한 후 1년간 휴학한 뒤 미국에 1년간 어학 연수를 다녀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사제의 길이 본인과 잘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집안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기에 대학 시절 각종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용돈을 마련하던 그는 땀 흘려서 돈을 버는 일들이 더 적성에 맞겠다는 판단을 하였고,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사업에 대한 어렴풋한 꿈들을 꾸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 교사 모임에서 만났던 노애리 씨를 아내로 맞이했고 두 아들을 뒀다. 최 회장은 베트남에서 물류 사업을 하면서 관련 분야를 공부할 필요성을 느껴서 2014년 9월 인하대학교 물류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물류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