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
김점배 알카오스트레이딩 대표(오만)
은근 ․ 끈기로 일궈낸 13년간 원양어선 승선 진기록
김점배 알카오스트레이딩 대표는 여수수산전문대학 어로학과에 진학, 졸업도 하기 전인 1977년 10월부터 3년 동안 북태평양 캄차카 반도에서 명태잡이를 조업하던 동원산업 원양어선과 인도양 참치잡이 배를 탔다.
하지만 1978년 유류 파동으로 그가 승선했던 참치잡이의 수산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없이 다른 고기잡이 배를 타야 했다. 군대에 입대가 면제되는 산업체 병역특례제도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5년간 의무적으로 배를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중동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무스카트에 기지를 둔 한국해외수산이 트롤선에 승선할 항해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2회 연속 계약(당시 1회 계약 기간 30개월)을 통해 연속 60개월간 배를 탔다.
그는 이 기간에 은근과 끈기를 통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는 인내심을 배웠다. 특히 망망대해에서 명태와 참치를 잡으로 사투를 벌이는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무쌍하는 바다를 관찰했다. 이를 통해 욕심을 부리면 안되겠다는 나름의 깨우침을 얻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과욕을 부려서는 성사되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터득하면서 자기를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60개월 동안 한국에도 안 가고 원양어선을 승선하는 김 회장의 성실한 모습에 회사 간부들과 주변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 덕분에 그는 1986년 선장진급의 선물을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결혼도 했다.
그가 속한 배의 선장들은 대부분 4년제 부산수산대학의 출신인 반면 김 대표는 2년제 전문대 출신이었다. 그는 항해사 시절에도 ‘가방끈이 짧은 대학을 졸업하니까 고기를 못잡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텄다. 또 다른 선장들이 1톤을 잡을 때, 그는 2톤을 잡는다는 각오로 임했다. 전문대 출신들이라 별 볼이 없다는 욕을 안 먹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다.
그는 이런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며 1991년 인도양의 파도 위에 몸을 실었던 2년 동안의 선장 생활을 끝으로 육지로 내려왔다. 그는 이로써 13년 동안 원양어선을 탄 진기록을 남겼다.
배 2척 인수 경영자로 변신해 원양어선 지휘
선장직을 무사히 수행하고 내려온 김 대표에게 회사는 오만 무스카트 기지의 과장을 제안했다. 월급은 선장에 비해 적었지만, 안정적인데다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기회는 때로 위기를 동반할 때가 흔히 있다. 그가 지상 근무를 시작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1993년부터는 조업조차 중단하고 회사를 매각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모든 짐이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의 직속 상관인 기지장은 회사의 매각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며 한국으로 들어가고 무스카트 현장에는 그만 남았다. 회사는 하루 아침에 기지 운영과 관련 비용을 지급 중단했다. 선박 9척에 승선했던 선원 300명은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바람에 귀국을 해야 하는데 비행기 값 등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현지에 주저 앉았다. 게다가 선박을 조업하지 않고 항구에 접안했지만, 매일 유류와 선원급료, 식비 등의 경비는 매일 늘어만 갔다. 선원들은 물론, 거래처에서 그에게 하소연을 했다. 모든 아우성이 그에게 빗발쳤다. 그는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당장 선원들의 먹는 문제라도 해결을 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한국에 있던 형님에게 3천만 원을 빌렸다. 그 비용으로 선원들의 부식비와 귀국 경비 등 당장 급한 불을 껐다. 악몽같은 6개월이 지나자 해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항구에 정박했던 한국해외수산의 배를 사겠다는 회사들이 나타났다. 그는 4개 회사에 1~2척씩을 팔았다. 이들 원양어선을 매입한 회사들은 인도양 해역에서 조업을 하고 싶다며 그에게 기지장의 역할을 제안했다. 그는 여러 회사들과 협력한다는 의미에서 기지장 대행 업무를 맡았다.
멈췄던 것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래처들에게 갚지 못했던 빚도 하나씩 해결되었다. 게다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 동안 참돔과 갑오징어 등 값이 비싼 어종 등 많이 잡았다. 이 때문에 그가 관리하던 배는 10척이 넘어설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 와중에 그에게 배 2척을 맡겼던 회사 한곳이 부도났다. 그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가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부도난 회사의 배 가격을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 부채는 떠안았다. 그는 배 2척을 인수했다. 그리고 그 배들을 가지고 2000년에 ”라사 교역“이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부산에 주식회사 천관을 세웠다.
전직 회사 실패원인 분석 획기적 비용절감책 마련
경영자로 변신한 김 대표는 한국해외수산이 도산한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는 그 결과 부도난 한국해외수산의 도산 원인을 분석한 결과, 구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원인은 전직 회사 원양어선들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조업하고 잡은 고기를 아랍에밀리트연합 아즈만항으로 이동해 하역하는 데 항해기간이 편도 1주일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이동하는데 드는 기름값은 물론, 조업기간 단축으로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는 하역 운송거리를 대폭 단축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하역 항구로 오만 남부의 살라라항을 찾아냈다.
라사교역의 모항을 살라라항에 옮김으로써 이동거리를 2일로 줄였다. 기존의 아즈만까지 편도 7일이 걸렸던 것에 비해 5일이 단축됐다. 이로 인한 한번의 출어경비가 10만 달러 정도 절약되었다. 회사로서는 엄청난 이익이 생겼던 것이다.
둘째 원인은 가격이 비싼 고급 어종의 판로가 다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넓은 판로개척이 문제였다. 그는 궁리 끝에 오만에서 조업하던 그리스 원양어선업체인 탈라스와 협력하는 문제를 모색했다. 그는
탈라스의 만달리우스 사장에게 “당신은 유럽의 판로를 뚫어보고 나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만달리우스 사장은 흔쾌히 김 사장의 제안을 수용했다. 일종의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연계 조업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대박을 낸 것이다. 그는 오만 해역에 투입하던 선박을 소말리아의 해역으로 진출시켰다. 왜냐하면 소말리아 해역에서의 조업은 김 사장으로써는 새로운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만달리우스 사장이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국가의 시장에 잡은 어획물을 판매할 수 있도록 개척해줬다. 고기만 잡으면 전량 판매를 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한 셈이었다.
NGO단체 “불법어획” 억울함 삭히며 성장의 길로
김 대표는 2000년에 ㈜라사교역을 설립한 이후 7년만에 1,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특히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들이 창궐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 한 건의 사건 또는 사고를 겪지 않고 승승장구했다. 연간 2천만 달러 이상을 상회하는 수출효자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던 2014년에 불법어획 의혹에 휘말리게 됐다.
라사교역이 소말리아 정부로부터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아 조업을 하고 있었음에도 2014년 유럽연합의 NGO단체가 한국수산회사들이 불법 어획을 했다며 한국정부에 항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 단체는 소말리아 정부에서 발행한 어업허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으로 유럽으로 수출한 라사교역 컨테이너 20개가 통관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이들 단체가 한국을 불법어업국으로 지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한국정부는 이들의 항의를 의식해 어획증명서와 위생증명 등 통관을 위한 서류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14년 연간 3,000만 달러이던 매출이 1,400만 달러로 곤두박칠쳐 한해 50억원의 영업손실을 입었다. 하루아침에 건실하게 운영되던 회사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그는 억울해서 5개월간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하고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회사 때문에 다른 업체들까지 유럽 수출에 지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그는 결국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2015년 소말리아 해역에서 조업하던 선박들을 소말리아측에 양도하고, 이들 선박의 대리점 위탁계약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고기잡이에 나섰다. 다행히도 2016년부터 어획고가 올라가며 매출액이 연간 2,800만 달러를 달성할 정도로 원상회복 했다.
아프리카 동업자가 내민 도움 아프리카 사랑 계기로
한창 사업이 잘 나가던 2011년, 전 세계 유류 파동이 불어닥치면서 회사의 경영에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유류비의 인상으로 조업 경비가 껑충 뛰면서 회사의 존폐가 기로에 처하게 됐다.
그러던 2014년 2월, 아프리카의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만났던 동업자가 어려운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줬다. 가장 큰 난제가 재정위기였는데, 그 동업자는 차용증을 받지 않고 아무런 조건없이 100만 유로(한화 13억원 가량)를 변통해줬다. 한국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금융권 대출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피부색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아프리카 동업자가 내민 도움의 손길로 인해 김 대표는 진심으로 아프리카인을 사랑하는 계기가 됐다.
아프리카 동업자가 그에게 베푼 도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선 그의 원양어선이 잡은 어획물 가운데 고가의 어종, 즉 갑오징어와 한치, 갈치 돔 류 외에 저가 어종인 일명 자투리 어획물을 아프리카로 왕성하게 수출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네갈과 코트디아브르,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시장에 연간 400만 달러 이상의 자투리 어획물을 수출함으로써 당시 유류파동으로 힘들었던 회사의 경영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해줬다.
김 대표는 그 동업자와 혈육보다 더 끈끈한 인간적인 정을 나누면서 아프리카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김 대표는 아프리카 ‘평화의 샘물’ 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그는 앞장서서 탄자니아와 말라위, 잠비아, 짐바브웨, 가나 등지에 평화의 샘물을 기증했다. 이와 함께 김동해 성모안과 병원장이 벌이는 비젼케어 사업에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 동업자와의 네트워크 때문이다.
아데만 전투 청해부대 부상 선장 간호 ․ 선박 수리 도와
김 대표는 남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경우,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낙후된 오만에서 자원개발 또는 건설 분야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파견직원의 자녀 교육 문제와 숙소를 물색할 때면 김 대표를 찾아와 민원을 해결한다. 또 후임자들이 오만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그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오만한국교민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사심없이 교민사회의 발전과 권익 향상, 화합을 위해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그는 교민회장으로 재임하면서 2003년 오만 수도 무스카트의 담수화 공장에 해파리 떼가 침입해 바닷물 취수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당시 무스카트 시장과 오만 농수산부 장관으로부터 500m의 취수통로에 그물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교민들과 협력해 해파리 유입을 막아 바닷물 취수가 원활히 이뤄지도록 적극적으로 앞장 섰다.
또 2007년 6월 오만 무스카트 지역을 초속 60미터 초강력 사이클론이 강타하면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는 교민들과 똘똘히 뭉쳐가 생수를 공급해 식수난을 해결해줬다.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한국의 화물선이 침몰했을 때는 사고처리는 물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까지 해냈다.
특히 그는 2011년 1월 15일 오전 7시 30분쯤 삼호해운 소속 화학물질 운반선 삼호주얼리호(1만1,500t급) 선원 21명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를 당해 한국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에서 1300여 km 떨어진 아데만 해역에서 인질 구출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의 간호를 적극 도왔을 뿐만 아니라 주얼리호 수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했다. 그는 이런 공로로 2012년에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훈했다.
2019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
김점배 알카오스트레이딩 대표(오만)
은근 ․ 끈기로 일궈낸 13년간 원양어선 승선 진기록
김점배 알카오스트레이딩 대표는 여수수산전문대학 어로학과에 진학, 졸업도 하기 전인 1977년 10월부터 3년 동안 북태평양 캄차카 반도에서 명태잡이를 조업하던 동원산업 원양어선과 인도양 참치잡이 배를 탔다.
하지만 1978년 유류 파동으로 그가 승선했던 참치잡이의 수산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없이 다른 고기잡이 배를 타야 했다. 군대에 입대가 면제되는 산업체 병역특례제도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5년간 의무적으로 배를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중동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무스카트에 기지를 둔 한국해외수산이 트롤선에 승선할 항해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2회 연속 계약(당시 1회 계약 기간 30개월)을 통해 연속 60개월간 배를 탔다.
그는 이 기간에 은근과 끈기를 통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는 인내심을 배웠다. 특히 망망대해에서 명태와 참치를 잡으로 사투를 벌이는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무쌍하는 바다를 관찰했다. 이를 통해 욕심을 부리면 안되겠다는 나름의 깨우침을 얻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과욕을 부려서는 성사되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터득하면서 자기를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60개월 동안 한국에도 안 가고 원양어선을 승선하는 김 회장의 성실한 모습에 회사 간부들과 주변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 덕분에 그는 1986년 선장진급의 선물을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결혼도 했다.
그가 속한 배의 선장들은 대부분 4년제 부산수산대학의 출신인 반면 김 대표는 2년제 전문대 출신이었다. 그는 항해사 시절에도 ‘가방끈이 짧은 대학을 졸업하니까 고기를 못잡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텄다. 또 다른 선장들이 1톤을 잡을 때, 그는 2톤을 잡는다는 각오로 임했다. 전문대 출신들이라 별 볼이 없다는 욕을 안 먹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다.
그는 이런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며 1991년 인도양의 파도 위에 몸을 실었던 2년 동안의 선장 생활을 끝으로 육지로 내려왔다. 그는 이로써 13년 동안 원양어선을 탄 진기록을 남겼다.
배 2척 인수 경영자로 변신해 원양어선 지휘
선장직을 무사히 수행하고 내려온 김 대표에게 회사는 오만 무스카트 기지의 과장을 제안했다. 월급은 선장에 비해 적었지만, 안정적인데다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기회는 때로 위기를 동반할 때가 흔히 있다. 그가 지상 근무를 시작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1993년부터는 조업조차 중단하고 회사를 매각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모든 짐이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의 직속 상관인 기지장은 회사의 매각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며 한국으로 들어가고 무스카트 현장에는 그만 남았다. 회사는 하루 아침에 기지 운영과 관련 비용을 지급 중단했다. 선박 9척에 승선했던 선원 300명은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바람에 귀국을 해야 하는데 비행기 값 등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현지에 주저 앉았다. 게다가 선박을 조업하지 않고 항구에 접안했지만, 매일 유류와 선원급료, 식비 등의 경비는 매일 늘어만 갔다. 선원들은 물론, 거래처에서 그에게 하소연을 했다. 모든 아우성이 그에게 빗발쳤다. 그는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당장 선원들의 먹는 문제라도 해결을 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한국에 있던 형님에게 3천만 원을 빌렸다. 그 비용으로 선원들의 부식비와 귀국 경비 등 당장 급한 불을 껐다. 악몽같은 6개월이 지나자 해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항구에 정박했던 한국해외수산의 배를 사겠다는 회사들이 나타났다. 그는 4개 회사에 1~2척씩을 팔았다. 이들 원양어선을 매입한 회사들은 인도양 해역에서 조업을 하고 싶다며 그에게 기지장의 역할을 제안했다. 그는 여러 회사들과 협력한다는 의미에서 기지장 대행 업무를 맡았다.
멈췄던 것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래처들에게 갚지 못했던 빚도 하나씩 해결되었다. 게다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 동안 참돔과 갑오징어 등 값이 비싼 어종 등 많이 잡았다. 이 때문에 그가 관리하던 배는 10척이 넘어설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 와중에 그에게 배 2척을 맡겼던 회사 한곳이 부도났다. 그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가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부도난 회사의 배 가격을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 부채는 떠안았다. 그는 배 2척을 인수했다. 그리고 그 배들을 가지고 2000년에 ”라사 교역“이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부산에 주식회사 천관을 세웠다.
전직 회사 실패원인 분석 획기적 비용절감책 마련
경영자로 변신한 김 대표는 한국해외수산이 도산한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는 그 결과 부도난 한국해외수산의 도산 원인을 분석한 결과, 구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원인은 전직 회사 원양어선들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조업하고 잡은 고기를 아랍에밀리트연합 아즈만항으로 이동해 하역하는 데 항해기간이 편도 1주일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이동하는데 드는 기름값은 물론, 조업기간 단축으로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는 하역 운송거리를 대폭 단축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하역 항구로 오만 남부의 살라라항을 찾아냈다.
라사교역의 모항을 살라라항에 옮김으로써 이동거리를 2일로 줄였다. 기존의 아즈만까지 편도 7일이 걸렸던 것에 비해 5일이 단축됐다. 이로 인한 한번의 출어경비가 10만 달러 정도 절약되었다. 회사로서는 엄청난 이익이 생겼던 것이다.
둘째 원인은 가격이 비싼 고급 어종의 판로가 다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넓은 판로개척이 문제였다. 그는 궁리 끝에 오만에서 조업하던 그리스 원양어선업체인 탈라스와 협력하는 문제를 모색했다. 그는
탈라스의 만달리우스 사장에게 “당신은 유럽의 판로를 뚫어보고 나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만달리우스 사장은 흔쾌히 김 사장의 제안을 수용했다. 일종의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연계 조업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대박을 낸 것이다. 그는 오만 해역에 투입하던 선박을 소말리아의 해역으로 진출시켰다. 왜냐하면 소말리아 해역에서의 조업은 김 사장으로써는 새로운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만달리우스 사장이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국가의 시장에 잡은 어획물을 판매할 수 있도록 개척해줬다. 고기만 잡으면 전량 판매를 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한 셈이었다.
NGO단체 “불법어획” 억울함 삭히며 성장의 길로
김 대표는 2000년에 ㈜라사교역을 설립한 이후 7년만에 1,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특히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들이 창궐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 한 건의 사건 또는 사고를 겪지 않고 승승장구했다. 연간 2천만 달러 이상을 상회하는 수출효자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던 2014년에 불법어획 의혹에 휘말리게 됐다.
라사교역이 소말리아 정부로부터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아 조업을 하고 있었음에도 2014년 유럽연합의 NGO단체가 한국수산회사들이 불법 어획을 했다며 한국정부에 항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 단체는 소말리아 정부에서 발행한 어업허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으로 유럽으로 수출한 라사교역 컨테이너 20개가 통관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이들 단체가 한국을 불법어업국으로 지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한국정부는 이들의 항의를 의식해 어획증명서와 위생증명 등 통관을 위한 서류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14년 연간 3,000만 달러이던 매출이 1,400만 달러로 곤두박칠쳐 한해 50억원의 영업손실을 입었다. 하루아침에 건실하게 운영되던 회사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그는 억울해서 5개월간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하고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회사 때문에 다른 업체들까지 유럽 수출에 지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그는 결국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2015년 소말리아 해역에서 조업하던 선박들을 소말리아측에 양도하고, 이들 선박의 대리점 위탁계약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고기잡이에 나섰다. 다행히도 2016년부터 어획고가 올라가며 매출액이 연간 2,800만 달러를 달성할 정도로 원상회복 했다.
아프리카 동업자가 내민 도움 아프리카 사랑 계기로
한창 사업이 잘 나가던 2011년, 전 세계 유류 파동이 불어닥치면서 회사의 경영에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유류비의 인상으로 조업 경비가 껑충 뛰면서 회사의 존폐가 기로에 처하게 됐다.
그러던 2014년 2월, 아프리카의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만났던 동업자가 어려운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줬다. 가장 큰 난제가 재정위기였는데, 그 동업자는 차용증을 받지 않고 아무런 조건없이 100만 유로(한화 13억원 가량)를 변통해줬다. 한국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금융권 대출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피부색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아프리카 동업자가 내민 도움의 손길로 인해 김 대표는 진심으로 아프리카인을 사랑하는 계기가 됐다.
아프리카 동업자가 그에게 베푼 도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선 그의 원양어선이 잡은 어획물 가운데 고가의 어종, 즉 갑오징어와 한치, 갈치 돔 류 외에 저가 어종인 일명 자투리 어획물을 아프리카로 왕성하게 수출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네갈과 코트디아브르,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시장에 연간 400만 달러 이상의 자투리 어획물을 수출함으로써 당시 유류파동으로 힘들었던 회사의 경영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해줬다.
김 대표는 그 동업자와 혈육보다 더 끈끈한 인간적인 정을 나누면서 아프리카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김 대표는 아프리카 ‘평화의 샘물’ 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그는 앞장서서 탄자니아와 말라위, 잠비아, 짐바브웨, 가나 등지에 평화의 샘물을 기증했다. 이와 함께 김동해 성모안과 병원장이 벌이는 비젼케어 사업에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 동업자와의 네트워크 때문이다.
아데만 전투 청해부대 부상 선장 간호 ․ 선박 수리 도와
김 대표는 남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경우,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낙후된 오만에서 자원개발 또는 건설 분야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파견직원의 자녀 교육 문제와 숙소를 물색할 때면 김 대표를 찾아와 민원을 해결한다. 또 후임자들이 오만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그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오만한국교민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사심없이 교민사회의 발전과 권익 향상, 화합을 위해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그는 교민회장으로 재임하면서 2003년 오만 수도 무스카트의 담수화 공장에 해파리 떼가 침입해 바닷물 취수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당시 무스카트 시장과 오만 농수산부 장관으로부터 500m의 취수통로에 그물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교민들과 협력해 해파리 유입을 막아 바닷물 취수가 원활히 이뤄지도록 적극적으로 앞장 섰다.
또 2007년 6월 오만 무스카트 지역을 초속 60미터 초강력 사이클론이 강타하면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는 교민들과 똘똘히 뭉쳐가 생수를 공급해 식수난을 해결해줬다.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한국의 화물선이 침몰했을 때는 사고처리는 물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까지 해냈다.
특히 그는 2011년 1월 15일 오전 7시 30분쯤 삼호해운 소속 화학물질 운반선 삼호주얼리호(1만1,500t급) 선원 21명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를 당해 한국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에서 1300여 km 떨어진 아데만 해역에서 인질 구출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의 간호를 적극 도왔을 뿐만 아니라 주얼리호 수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했다. 그는 이런 공로로 2012년에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수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