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수상자 –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전용희 브래든베이커리&커피 대표(중국)
12세때 부친 여읜 소년가장 5식구 부양
전용희 브랜드베이커리앤커피 대표는 6세때 부여를 떠나 서울 천호동으로 이사를 왔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쓰레기 하치장 근처에 벽돌과 나무 등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12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3형제를 부양하는 소년 가장이 됐다. 행상을 하던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마치고 동아일보 천호동 지국에서 120부의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 배달의 주 수입원은 광고지와 전단지였다. 그가 신문에 광고 전단지를 끼워 넣고 집집마다 배달하고 나면 대략 밤 10~11시에 끝났다. 주말에는 주변 극장 매점에서 오징어와 땅콩을 팔았다. 간혹 극장용 포스터도 부쳐주고 극장표를 받으면 싼값에 팔아서 살림에 보탰다.
<어머님과 찍은 추억의 사진>
중학교 2학년 때 부양 식구의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위해 중퇴했다. 그는 장안동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취업했다. 체구가 작았던 탓에 성인용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다가 넘어져서 자장면을 쏟아버린 일도 여러 번 발생해 주인에게 혼나기도 했다.
첫 월급으로 3만원을 받았던 그는 어머니 내복과 동생들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한사코 단팥빵을 거절하시던 어머니는 강제로 먹여주는 전용희를 향해 “어린 것을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울었고 단팥빵을 먹던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다. 눈물의 단팥빵 파티였다. 그는 커서 빵집 사장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다.
<中보따리무역으로 웨이하이 정착…중국인 아내와 결혼>
전 대표는 1997년 IMF때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인천 역곡에 사는 사촌 형님을 만나려고 1호선 지하철을 탔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예기치 않게 동인천역에서 내린 그는 중국에서 도착한 대형 카페리에서 하선하는 보따리 무역상들을 목격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참깨와 고추 등 농산물을 가지고 와서 한국에서 팔고 공산품을 구매해 중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내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는데, 보따리 무역상들이 현금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주위에 붙잡고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눈치껏 확인한 결과, 인천과 웨이하이를 격일간 운항하는 위동페리호를 이용, 보따리 무역을 하는 이른바 ‘따이공’들이었다. 그는 이틀 뒤 인천에 와서 시장 조사를 했다. 장사밑천으로 지인을 통해 100만원을 빌려 무작정 웨이하이 행 카훼리를 탔다. 그러나 웨이하이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국제 미아가 될 뻔한 상황에서 어떤 보따리 무역상을 뒤쫒아가서 농산물을 취급한 강남상회 사장을 만났다. 처음 두 번은 중국서 사가지고 온 농산물을 인천국제터미널에서 압수당했다.
6개월 정도 보따리 무역을 하면서 돈을 모은 전 대표는 웨이하이에 창고 2개를 얻어 ‘서울 상회’를 창업해 새로운 보따리 상인들을 대상으로 농산물 장사를 했다.
그는 단골이었던 인천 거주 부부가 배표를 구하지 못해 웨이하이에 1주일 넘게 기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동해운 본사를 찾아가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여직원에게 하루종일 매달려 표를 구해준 적이 있다. 전 대표는 표를 구해준 여직원 델리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만났던 것이 계기가 돼 사귀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회사는 델리신이 그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이 여기며 사표를 내든지, 전 대표와 헤어지든지 선택하라며 압박했다. 결국 델리신은 회사를 그만둔 뒤 전 대표를 도와서 사업을 시작했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전 대표는 가정이 안정돼 가던 때쯤, 대학 졸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합격했고 40세에 산동대학교 중국어중문학과를 다녀서 만학으로 졸업했다. 이후 그는 한식당과 양어장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평생 소원 빵집 개업 위기 직면…커피 연계 대박
전 대표는 웨이하이에서 24시간 영업하는 ‘만만디 레스토랑’을 개업했으나 주변에서 만만디를 모방한 레스토랑이 하나씩 생겨나면서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 결국 레스토랑을 접고 그 자리에 최초 한국식 빵집인 ‘벧엘 베이커리’를 2006년에 개업했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빵집을 개업했기 때문에 심혈을 쏟았다. 개업 초기에는 재중한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이 줄어들었고 들어놓은 빵들도 팔리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남는 빵들을 고아원에 기부했다. 몇 달째 고아원에 기부하면서 자금난에 직면했다. 살상가상으로 고아원 원아가 고아원측에 나눠 줬던 빵을 몰래 감추었다가 한창 시간이 지나서 먹는 바람에 배탈이 나면서 고아원측에서 상한 빵을 갖다 줬다고 항의했다. 그는 그 아이를 병원에서 치료해줬다.
그는 빵 사업을 접으려고 하던 순간 손혜원 국회의원(당시 크로스 포인트 대표)이 그의 빵집을 찾아왔다. 손 의원은 앞으로 중국에서도 커피사업이 유행할거고 가능성도 한국보다 훨씬 크다며 A4용지에 매장 실내 스케치를 해주었다. 전 대표는 빵과 커피를 함께 파는 베이커리형 카페를 만들기 위해 실내장식을 시작했고 빵맛도 중국인의 입맛에 맞췄다. 젊은 세대를 겨냥한 베이커리형 카페를 개업한 결과, 손님들로 가득찼다. 그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웨이하이에 ‘브래든(福來天)베이커리앤커피 전문점’ 11개 직영점과 칭따오 등 11개 도시에 38개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와함께 이태리 레스토랑과 복합메뉴를 선보이는 브래든푸드시티 ‘하오두어판(好多鈑) 5개점을 경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 중국만두 프랜차이즈 ‘복래(福來)’사업에도 투자하고 있다.
전 대표는 지역과 사회에 봉사하는 일에도 열성적이다. 중국에서 3번째로 재중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웨이하이 한인회장과 산동성 한인회 9개 지회를 묶는 총연합회 회장과 NGO단체인 더투게더(정애리 이사장)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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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수상자 –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전용희 브래든베이커리&커피 대표(중국)
12세때 부친 여읜 소년가장 5식구 부양
전용희 브랜드베이커리앤커피 대표는 6세때 부여를 떠나 서울 천호동으로 이사를 왔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쓰레기 하치장 근처에 벽돌과 나무 등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12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3형제를 부양하는 소년 가장이 됐다. 행상을 하던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마치고 동아일보 천호동 지국에서 120부의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 배달의 주 수입원은 광고지와 전단지였다. 그가 신문에 광고 전단지를 끼워 넣고 집집마다 배달하고 나면 대략 밤 10~11시에 끝났다. 주말에는 주변 극장 매점에서 오징어와 땅콩을 팔았다. 간혹 극장용 포스터도 부쳐주고 극장표를 받으면 싼값에 팔아서 살림에 보탰다.
<어머님과 찍은 추억의 사진>
중학교 2학년 때 부양 식구의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위해 중퇴했다. 그는 장안동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취업했다. 체구가 작았던 탓에 성인용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다가 넘어져서 자장면을 쏟아버린 일도 여러 번 발생해 주인에게 혼나기도 했다.
첫 월급으로 3만원을 받았던 그는 어머니 내복과 동생들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한사코 단팥빵을 거절하시던 어머니는 강제로 먹여주는 전용희를 향해 “어린 것을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울었고 단팥빵을 먹던 동생들도 덩달아 울었다. 눈물의 단팥빵 파티였다. 그는 커서 빵집 사장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다.
<中보따리무역으로 웨이하이 정착…중국인 아내와 결혼>
전 대표는 1997년 IMF때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인천 역곡에 사는 사촌 형님을 만나려고 1호선 지하철을 탔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예기치 않게 동인천역에서 내린 그는 중국에서 도착한 대형 카페리에서 하선하는 보따리 무역상들을 목격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참깨와 고추 등 농산물을 가지고 와서 한국에서 팔고 공산품을 구매해 중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내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는데, 보따리 무역상들이 현금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주위에 붙잡고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눈치껏 확인한 결과, 인천과 웨이하이를 격일간 운항하는 위동페리호를 이용, 보따리 무역을 하는 이른바 ‘따이공’들이었다. 그는 이틀 뒤 인천에 와서 시장 조사를 했다. 장사밑천으로 지인을 통해 100만원을 빌려 무작정 웨이하이 행 카훼리를 탔다. 그러나 웨이하이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국제 미아가 될 뻔한 상황에서 어떤 보따리 무역상을 뒤쫒아가서 농산물을 취급한 강남상회 사장을 만났다. 처음 두 번은 중국서 사가지고 온 농산물을 인천국제터미널에서 압수당했다.
6개월 정도 보따리 무역을 하면서 돈을 모은 전 대표는 웨이하이에 창고 2개를 얻어 ‘서울 상회’를 창업해 새로운 보따리 상인들을 대상으로 농산물 장사를 했다.
그는 단골이었던 인천 거주 부부가 배표를 구하지 못해 웨이하이에 1주일 넘게 기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동해운 본사를 찾아가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여직원에게 하루종일 매달려 표를 구해준 적이 있다. 전 대표는 표를 구해준 여직원 델리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만났던 것이 계기가 돼 사귀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회사는 델리신이 그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이 여기며 사표를 내든지, 전 대표와 헤어지든지 선택하라며 압박했다. 결국 델리신은 회사를 그만둔 뒤 전 대표를 도와서 사업을 시작했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전 대표는 가정이 안정돼 가던 때쯤, 대학 졸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합격했고 40세에 산동대학교 중국어중문학과를 다녀서 만학으로 졸업했다. 이후 그는 한식당과 양어장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평생 소원 빵집 개업 위기 직면…커피 연계 대박
전 대표는 웨이하이에서 24시간 영업하는 ‘만만디 레스토랑’을 개업했으나 주변에서 만만디를 모방한 레스토랑이 하나씩 생겨나면서 영업에 타격을 입었다. 결국 레스토랑을 접고 그 자리에 최초 한국식 빵집인 ‘벧엘 베이커리’를 2006년에 개업했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빵집을 개업했기 때문에 심혈을 쏟았다. 개업 초기에는 재중한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이 줄어들었고 들어놓은 빵들도 팔리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남는 빵들을 고아원에 기부했다. 몇 달째 고아원에 기부하면서 자금난에 직면했다. 살상가상으로 고아원 원아가 고아원측에 나눠 줬던 빵을 몰래 감추었다가 한창 시간이 지나서 먹는 바람에 배탈이 나면서 고아원측에서 상한 빵을 갖다 줬다고 항의했다. 그는 그 아이를 병원에서 치료해줬다.
그는 빵 사업을 접으려고 하던 순간 손혜원 국회의원(당시 크로스 포인트 대표)이 그의 빵집을 찾아왔다. 손 의원은 앞으로 중국에서도 커피사업이 유행할거고 가능성도 한국보다 훨씬 크다며 A4용지에 매장 실내 스케치를 해주었다. 전 대표는 빵과 커피를 함께 파는 베이커리형 카페를 만들기 위해 실내장식을 시작했고 빵맛도 중국인의 입맛에 맞췄다. 젊은 세대를 겨냥한 베이커리형 카페를 개업한 결과, 손님들로 가득찼다. 그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웨이하이에 ‘브래든(福來天)베이커리앤커피 전문점’ 11개 직영점과 칭따오 등 11개 도시에 38개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와함께 이태리 레스토랑과 복합메뉴를 선보이는 브래든푸드시티 ‘하오두어판(好多鈑) 5개점을 경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 중국만두 프랜차이즈 ‘복래(福來)’사업에도 투자하고 있다.
전 대표는 지역과 사회에 봉사하는 일에도 열성적이다. 중국에서 3번째로 재중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웨이하이 한인회장과 산동성 한인회 9개 지회를 묶는 총연합회 회장과 NGO단체인 더투게더(정애리 이사장)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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