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2019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신경호


1.신경호 이사장과 김희수 선생

신경호 이사장이 고등학교 시절에 꿨던 꿈은 저널리스트였다. 탁월한 언변과 의협심, 뛰어난 지도력으로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던 신 이사장은, 불의와 부조리 등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자의 모습이 그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방황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큰 형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84년 니혼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정치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학문과 지식에 대한 갈망과 욕구로 니혼대학 대학원을 거쳐 ‘근대한국의 개화운동과 국제인식의 연구’라는 주제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2004년)를 취득하게 된다.

<일본대햑 한국유학생회 회장>

<1989년 재일한국유학생 산우회 후지산 정상 광복절 기념행사>

신 이사장은 고단했던 유학 생활 속에서도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사무국장직을 맡으며 재일동포 사회 관계자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도쿄의 유학생은 130여 명 정도로, 재일동포 재력가들의 후원을 받곤 하였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전 중앙대 이사장 故 김희수 선생이다. 신 이사장은 1983년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선배들과 찾아간 김희수 선생의 사무실에서 “여러분은 한국 미래의 기둥이다. 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 는 선생의 말에 감명을 받고 인간적인 매력에 끌리게 된다. 신 이사장과 김희수 선생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희수 선생은 유독 신 이사장을 믿고 아꼈으며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기도 하였다. 신경호 이사장은 도쿄 료고쿠에 자리한 수림일본어학교 교정에 김희수 선생의 얼굴이 새겨진 현창비를 세우고, 선생이 잠들어 있는 도쿄 하치오지 묘지를 자주 찾으며, 그 인연과 믿음을 지켜 가고 있다.

<수림외어전문학교 학생들과 김희수 전 이사장 묘지 참배>

<2009년 주일한국문화원 개관식 중앙대 김희수 이상장님과 유인촌 문체관부 장관과 함께>


2. 신경호 이사장과 금정학원

 재일동포 1세대인 김희수 선생은 금정기업을 세워 부동산 임대업 등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다. 이후, 인재 육성의 필요성과 ‘배워야 산다’는 교육 이념 실현을 위해 1986년 학교법인 금정학원의 설립 준비를 하여, 1988년 한국어학과, 일본어학과, 영어학과, 중국어학과, 일본연구과 5개 학과를 개설, 수림외어전문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때 신 이사장은 설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학교 설립을 위한 크고 작은 일에 기여하였고, 1993년부터 한국어학과 전임강사로서 활약하였다.


<1992년 런던 LSE 재학시절 동료들과 운동회(고 박원순 시장과 함께)>


1987년, 김희수 선생은 조국의 교육 사업에 헌신하고자 부도 위기에 빠진 중앙대학교를 인수하기로 결심한다.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중앙대학교가 안고 있던 부채를 모두 해결하고 기숙사와 도서관을 새로 만들었으며 학생회관 등 여러 건물을 증축하는 등 중앙대학교의 재건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한국의 IMF외환위기와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의 영향으로 김희수 선생의 사업체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중앙대학교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동시에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도 재정이 악화되면서 폐교 위기를 맞게된다. 신 이사장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 통역 한 명만을 대동한 체 중국과 베트남을 돌아다니며 학생 유치에 힘썼고, 이 과정에서 세 번이나 대상포진에 걸리기도 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경영능력으로 학교가 위기를 극복하고 정상궤도에 올라가자 김희수 선생은 수림외어전문학교와 2001년 도쿄 료고쿠에 개교한 수림일본어학교를 신 이사장에게 맡기기로 한다. 이로써 신 이사장은 2005년, 학교법인 금정학원을 총괄하는 이사장과 학교장으로 취임하기에 이른다. 

<2005년도 학교법인 가나이학원 입학식 >

신 이사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요구에 걸맞는 고도의 언어교육을 실시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수림외어전문학교의 기존학과를 일한통번역학과, 일중통번역학과, 일본어학과로 개편한 후, 2013년 4월에는 정보비즈니스커뮤니케이션학과를 신설하여 국제사회에서 활약할 뛰어난 전문가를 육성, 배출하고 있다. 또한 2001년에 개교한 수림일본어학교는 국제인 교육이라는 이념으로, 학생들의 종합적인 일본어 실력 배양은 물론, 개개인의 진로에 맞춘 지원과 지도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 중국, 베트남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학생들이 수림일본어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2018 수림외어전문학교 30주년기념 심포지엄>


한편, 신 이사장은 1998년부터 중국 길림성 조선족 학생들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조선족 학생들의 일본 유학의 길을 열었다. 1999년, 도쿄에서 유학하는 조선족 청년들과 뜻을 함께하여 ‘백두산천지’ 축구팀을 결성한 이래 지금까지도 팀을 꾸려오고 있으며 2002년에는, 중국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연길에서 치뤄진 해외동포팀과의 교류 시합에 백두산천지 축구팀 단장으로 참가, ‘동북축구연의회’와 ‘연변대학교’ 축구팀에 지원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2002년 일본유학 중국조선족 백두산천지 축구팀 용정비암산 방문>

<2008년 중국대련 수림외국어학원 개교식 >


또한 2008년 4월, 중국 동북부의 중심 도시인 대련에 한국어, 일본어 교육 인가를 받은 수림중국대련교를 개교하고 7년 간 경영하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에 걸친 교육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2012년에는 중국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사업으로, 연변작가협회, 연변대학교와 함께 ‘가야하인터넷문학상’을 설립, ‘수림문학상’을 제정하여 중국 동북3성의 청년들에게 민족의 정통성과 미래의 꿈을 심어주고 있으며, 연변 현지의 조선족 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신 이사장은 지금도, 다가오는 2022년 중국 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을 기념하는 새로운 지원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를 넘어, 한,중,일을 잇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인재육성을 통해, 보다 많은 젊은이가 국제사회에 공헌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5년 네팔대지진 모금활동 >



3. 신경호 이사장과 수림문화재단

2008년, 김희수 선생은 중앙대학교 경영권을 한국의 유수 기업인 두산그룹에 양도하고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때 조성된 기금 1200억 원으로 주류회사를 인수하려고 하자, 신 이사장은 김희수 선생을 적극 말리며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들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희수 선생의 문화입국의 이념에 따라 2009년 수림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혈육이 아닌 그가 김희수 선생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과정에서 방해 세력에 의한 갖가지 음해와 소송에 휘말리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의 철저한 메모습관이 모든 오해와 누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신 이사장은 김희수 선생을 30년 가까이 곁에서 보필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하였고, 그의 정신을 이어 받아 수림문화재단 설립 시부터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소외계층에 대한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김희수 정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 재단의 사명” 이라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설립자 김희수 선생의 인생철학인 ‘문화입국’을 바탕으로 문화예술 분야의 인재양성, 한일문화교류에 역점을 둘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수림문화재단은 설립 이래로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여 왔다. 대표적인 목적사업으로는 ‘수림미술상’, ‘수림뉴웨이브상’, ‘수림문학상’, ‘수림뉴웨이브 아트랩’, ‘홍릉페스티벌 수림뉴웨이브’, ‘수림문화예술서포터즈’ 등이 있으며, 다양한 문화예술 인재 발굴과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한일 문화교류 지원사업으로는 ‘한일 중고생 교류 프로그램 댄스댄스댄스’, ‘한국일본근대학회’, ‘대학생 일본어 연극제’, ‘한일언론인심포지엄’ 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민간 문화예술 및 학술 교류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신경호 이사장은 2016년 서울 동대문구 소재 홍릉 일원에 김희수 기념 수림아트센터의 개관사업을 주도하여 전시와 공연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을 완성하였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4.교육자 신경호

-글로벌 인재 양성 및 민간교류를 통한 한일관계 신뢰 구축

신경호 이사장의 교육철학은 정의와 성실, 인내와 노력이다. 4가지 덕목 중 어느 하나도 흔들림 없이 최선을 다해서 지켜왔다.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의 이사장과 학교장에 취임하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단행한 것은 학교 운영과 관련된 모든 예산을 공개한 일이다. 투명한 경영을 위한 첫 시작이었다. 지금도 그의 집무실에는 30년 전 김희수 선생이 사용하던 낡은 집기가 그대로 있다. 

신 이사장의 교육철학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장남과 일본에서 태어난 아들 둘 모두가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했고, 장남은 해병대를 전역한 후 한국에서 취직했으며, 차남도 해병대에서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 했다. 셋째 아들 또한 형들을 따라 해병대에 지원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일상에서 보고 배우는 ‘밥상머리 교육’ 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장남 신태수 해병대 복무 중 휴가>


이처럼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 신 이사장은 2002년 고쿠시칸대학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학교 당국에 한국어 및 한국문화 강좌를 개설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 고쿠시간대학에는 한국 관련 강좌 30여 개가 개설되어 1천여 명의 일본인 학생이 수강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2만여 명의 지한파(知韓派)학생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표현한글어’ 의 명칭으로 개설된 학과를 ‘한국어학과’로 변경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였고 결국 그 제안도 받아들여지면서, 일본에 ‘한국어학과’라는 명칭이 자리잡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고쿠시칸대학 21세기 아시아학과 종신교수로 임명되었고 한국의 정치와 경제, 역사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은 지한파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진력하고 있다.

신 이사장은 한일 양국 젊은이들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2003년에 고쿠시칸대학과 학술교류협정을 맺은 고려대를 시작으로, 한양대, 전남대, 안동대, 동의대학교에 연 2회에 걸쳐 1개월간 일본인 학생을 파견하는 ‘해외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으며, 그 수는 50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또한 1년 과정의 ‘교환유학생프로그램을 도입, 20년간 200여 명의 학생들을 교류하게 했다. 이들이 미래의 한일 관계를 이끌어갈 주역이라 믿는 신 이사장의 신념이 이같은 교류활동을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한국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학생인솔은 물론, 사후평가 등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것은 사명감 때문이다. 그는 고쿠시칸 대학 강의 외에 학교법인 금정학원 소속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 등 학교 경영은 물론, 수림문화재단 이사 업무 외 각종 학회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밥 먹듯이 왕래하면서 하루 4시간 정도 밖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어학연수 학생들을 직접 안내하는 것은 한ㆍ일 간의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국사관 대학교 한국어 연수>


신 이사장은 일본의 학생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어 연수와 문화체험은 물론, 독립기념관과 판문점, 5.18 민주묘지 등을 꼭 찾아가도록 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양국 간 암울한 과거사를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판문점은 한반도의 분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출발했음을 이해시키려는 의도에서 각각 반영했다. 이러한 현장 견학을 통해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저질렀던 만행과 3.8선을 긋는 분단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다. 일본인 학생들에게는 다소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어두운 과거를 뛰어 넘어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 믿고 있다


신 이사장은 한국어학연수 프로그램을 통하여 한국어 습득은 물론, 한국 정치 및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면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오전에 한국어를 배우면 오후에는 한지 만들기, 김치 담그기 등 한국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최근에는 일본 젊은이들이 한류 속 아이돌그룹의 공연 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한국을 쉽게 접할 수 있다며 이러한 민간 차원에서의 직간접적인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현상이 21세기에 맞는 한 일 교류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학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한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레포트로 제출하도록 하고있다. 평가 또한 까다롭기로 정평이 날정도로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다. 또한 어학연수 프로그램이 단순히 ‘여행’정도로 여기지 않도록 사전에 연수 관련, 필수강의를 수강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밖에 출석 점검은 물론, 연수가 끝나면 시험을 치루고 60점 이하를 받은 학생은 재수강을 이수하도록 했다.


 그는 “한일 관계사를 되짚어보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나라로, 그 자양분을 통해 성장해 왔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갈등과 대립으로 깊어진 양국 간의 골을 메우고,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교류를 통한 ‘신뢰 쌓기’를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연구실에 안주하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다.

신 이사장의 한국어와 한국문화 전파는 2009년부터 주일한국문화원 세종학당 초대 및 2대 학장・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로 확대되었다. 일본 내의 한국어 교육 환경의 개선과 교재연구 및 개발 등에 대한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한국전통악기 교육과정과, 말하기 대회 등을 도입하고 저명한 한국어 교수진을 초빙하여 한국어 교수 연수 및 도쿄 한국어 교사 주말 연수 등을 실시함으로써 질적, 양적으로 일본인들의 한국어 학습력을 높이는데 앞장을 섰다.

타민족에게 배타적인 일본 땅에서 백년대계라는 교육사업을 펼치면서 국제 교류에도 앞장 서고 있는 신 이사장은 이같은 한국어 교육과 보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한글발전 유공자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569돌 한글날 기념 한글발전 유공자 국무총리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