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수상자 -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강정민 타안 태즈메이니아 회장(호주)
대체산림자원 확보하기 위해 호주 이주 결정
강정민 타안 태즈메이니아 회장(76세)은 목재업을 경영하던 선친의 가업을 도와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에서 산림개발 및 수출입 업무를 봤으며 호주 태즈메이니아에서 3개의 목재 가공공장을 세워, 경영하고 있다. 목재업만 한 우물을 파서 50년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그의 선친은 1930년대 말에 동건무역을 설립한 강장렬(康長烈, 1919~2002)회장이다. 강장렬 회장은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마카오를 통한 무역 채널을 개척했으며 1946년 설립된 한국무역협회의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해운업에 뛰어든 강장렬 회장은 이승만 정부가 1956년 대일통상중단 결정으로 선박을 동남아로 투입했으나, 선박 대리점의 농간으로 말레이시아 페낭의 법원에 압류되면서 고비를 맞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56년에 생소했던 말레이시아로 가서 10년간 법정 투쟁한 결과, 승소했다.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부친은 현지인의 조력을 받아서 값진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후 강장렬 회장은 싱가포르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인도네시아 동부 칼리만탄주 사마린다시에 진출해 산림개발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기업 운영을 심혈을 쏟으면서도 빠지지 않고 지원했던 사회공헌사업은 작업장 근처인 피티 히마(P.T. Hima)에 현지인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웠다. 이는 낯선 말레이시아에서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줘서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나눔의 실천이었다. 강장렬 회장은 자카르타와 싱가포르에서 한인학교 이사장을 맡아서 교사 신축을 주도했던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1976)과 모란장(1993)을 각각 수훈했다.
강정민 회장은 선친의 권유로 원목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1971년부터 사마린다시에서 원목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나, 80년대 접어들면서 동남아 산림자원의 고갈이 현실화되면서 대체 자원 공급원 확보를 시급한 과제였다.
그는 원목자원 조사를 하던 중 산림자원이 풍부한 호주 태즈메이니아 주정부에서 산림개발의 제안을 받았다. 1984년 1월 태즈메이니아주로 이주해 유칼립투스 수종의 베니어 생산 사업 타당성 조사에 착수했다.
낮은 등급 원자재 활용 고급합판 생산기술개발 성공
강 회장은 고급 원목들이 현지 목재 회사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공업계에서 사용할 수 없는 낮은 등급의 원자재(유칼립투스 원목)를 활용하는 새로운 기술개발에 역점을 뒀다. 그는 태즈메이니아에서 오래된 큰 나무를 벌채 후 그곳에서 자라난 나무들이거나 또는 새로 삼림자원 확보를 위해 조림한 플랜테이션에서 나오는 나무들을 활용, 고부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태즈메이니아 산림청과 협력하여 1992년 9월 호주 연방정부로부터 최초로 기술실험을 위한 유칼립투스 원목 수출허가를 받았고, 이듬해 5월에 한국으로 수출했다. 그러나 제품에서 심각한 갈림이나 수축이 발생하면서 한국시장 개척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고 1997년부터 호주 연방정부와 태즈메이니아 주정부간의 지역산림협약을 체결, 지속적으로 원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IMF사태의 발생으로 5년간 프로젝트의 추진이 중단되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2002년부터 일본과 중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핀란드 등과 해당분야의 기술정보 협력을 통해 호주 국립연구기관(Common-wealth Scientific and Research Organization : CSIRO)에서 낮은 등급의 원자재를 고급화하는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제품의 갈라짐과 뒤틀림, 일정하지 않는 수축과 두께의 편차를 극복할 기술과 이에 적합한 기계를 개발했다. 숱한 실험 끝에 2~3m 길이의 목재를 로터리 절삭기술을 통해 얇은 두께의 베니어를 만들어 건조공정을 거친 뒤 가로와 세로로 여러 겹을 겹쳐 매우 단단한 고강도의 합판을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는 호주 회사들이 펄프제조용으로 사용하는 원목을 선별, 활용해 고강도 합판 생산에 착안, 태즈메이니아에서 목재생산 라이센스(자격증)를 확보했다.
환경보호주의자들 극렬한 반대 극복, 호주정부 인정받아
강 회장은 2005년 태즈메이니아 산림청과 20년에, 옵션 20년의 원목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기술과 원자재는 확보됐으나 투자금이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말레이시아 목재회사들과 거래했던 경험을 통해 2005년 5월 최종적으로 말레이시아 사라와크 소재 상장기업인 타안 홀딩스를 파트너로 찾았다. 이들 파트너사로부터 해외자본 1억 달러를 유치해 3개의 원목가공 공장을 건설했다.
2007년 호바트 근처에 4,000만 달러를 투자해 휴온 베니아 공장을 설립했다. 2008년에도 4,000만 달러를 투자해 스미스톤에 베니아 공장을 세웠다. 2015년에는 스미스톤에 1,700만 달러를 투자해 합판공장을 건설했다. 이처럼 기술개발과 해외자본을 유치해 공장을 건설하고 제품을 생산해 해외수출과 호주 국내 시장에 공급하는데 꼬박 30여 년이 걸렸다.
강 회장이 낯선 태즈메이니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끝임없이 ‘현지 사회와 함께 성과를 나누자’는 경영철학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매년 이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은 물론 스포츠팀 육성을 위한 기금과 유니폼 제공, 컴퓨터 기증했고 산림축제 등 지역사회 행사에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특히 주류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들 지도자들과 일단 약속이나 합의한 사항에 대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과 호주간의 경제 및 문화교류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그렇지만 목재산업이라면 산림파괴로 인식해 무조건 반대를 하던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과 환경보존단체의 격렬한 반대에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다. 환경단체들은 공장 또는 제품 선적하는 선박을 잇달아 불법 점거했다. 심지어 해외에서는 날조된 선전으로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 2차 제재)방법으로 시장을 교란시켜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2012년 1월에는 환경단체가 사무실과 공장을 무단 점거한 바람에 조업차질은 물론,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그는 이때마다 성심 성의껏 이들 환경단체의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그가 경영하는 회사는 펄프제조용이나 연료용으로 밖에 쓸 수 없는 나무를 사용해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폐기물을 감축시키고 자원을 재활용하고 있다는 장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지역사회의 고용인원이 500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도 내세웠다. 덧붙여 회사는 목재가공의 전 과정에서 환경친화적이며 사회적이고 도덕적 기준을 준수하며, 지속가능한 원목으로 가공한 제품임을 소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국제산림인증프로그램협회(PEFC)의 인증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타안 태즈메이니아는 사회적, 환경적으로 책임감이 강한 기업임을 환경단체 또는 녹색당까지도 잠정적으로 인정해줬다. 이런 결과, 강 회장은 2008년 태즈메이니아주 수출상과 호주 연방정부 수출상을 각각 수상했다.
2019수상자 -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강정민 타안 태즈메이니아 회장(호주)
대체산림자원 확보하기 위해 호주 이주 결정
강정민 타안 태즈메이니아 회장(76세)은 목재업을 경영하던 선친의 가업을 도와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에서 산림개발 및 수출입 업무를 봤으며 호주 태즈메이니아에서 3개의 목재 가공공장을 세워, 경영하고 있다. 목재업만 한 우물을 파서 50년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그의 선친은 1930년대 말에 동건무역을 설립한 강장렬(康長烈, 1919~2002)회장이다. 강장렬 회장은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마카오를 통한 무역 채널을 개척했으며 1946년 설립된 한국무역협회의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해운업에 뛰어든 강장렬 회장은 이승만 정부가 1956년 대일통상중단 결정으로 선박을 동남아로 투입했으나, 선박 대리점의 농간으로 말레이시아 페낭의 법원에 압류되면서 고비를 맞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56년에 생소했던 말레이시아로 가서 10년간 법정 투쟁한 결과, 승소했다.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부친은 현지인의 조력을 받아서 값진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후 강장렬 회장은 싱가포르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인도네시아 동부 칼리만탄주 사마린다시에 진출해 산림개발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기업 운영을 심혈을 쏟으면서도 빠지지 않고 지원했던 사회공헌사업은 작업장 근처인 피티 히마(P.T. Hima)에 현지인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웠다. 이는 낯선 말레이시아에서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줘서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나눔의 실천이었다. 강장렬 회장은 자카르타와 싱가포르에서 한인학교 이사장을 맡아서 교사 신축을 주도했던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1976)과 모란장(1993)을 각각 수훈했다.
강정민 회장은 선친의 권유로 원목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1971년부터 사마린다시에서 원목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나, 80년대 접어들면서 동남아 산림자원의 고갈이 현실화되면서 대체 자원 공급원 확보를 시급한 과제였다.
그는 원목자원 조사를 하던 중 산림자원이 풍부한 호주 태즈메이니아 주정부에서 산림개발의 제안을 받았다. 1984년 1월 태즈메이니아주로 이주해 유칼립투스 수종의 베니어 생산 사업 타당성 조사에 착수했다.
낮은 등급 원자재 활용 고급합판 생산기술개발 성공
강 회장은 고급 원목들이 현지 목재 회사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공업계에서 사용할 수 없는 낮은 등급의 원자재(유칼립투스 원목)를 활용하는 새로운 기술개발에 역점을 뒀다. 그는 태즈메이니아에서 오래된 큰 나무를 벌채 후 그곳에서 자라난 나무들이거나 또는 새로 삼림자원 확보를 위해 조림한 플랜테이션에서 나오는 나무들을 활용, 고부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태즈메이니아 산림청과 협력하여 1992년 9월 호주 연방정부로부터 최초로 기술실험을 위한 유칼립투스 원목 수출허가를 받았고, 이듬해 5월에 한국으로 수출했다. 그러나 제품에서 심각한 갈림이나 수축이 발생하면서 한국시장 개척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고 1997년부터 호주 연방정부와 태즈메이니아 주정부간의 지역산림협약을 체결, 지속적으로 원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IMF사태의 발생으로 5년간 프로젝트의 추진이 중단되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2002년부터 일본과 중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핀란드 등과 해당분야의 기술정보 협력을 통해 호주 국립연구기관(Common-wealth Scientific and Research Organization : CSIRO)에서 낮은 등급의 원자재를 고급화하는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제품의 갈라짐과 뒤틀림, 일정하지 않는 수축과 두께의 편차를 극복할 기술과 이에 적합한 기계를 개발했다. 숱한 실험 끝에 2~3m 길이의 목재를 로터리 절삭기술을 통해 얇은 두께의 베니어를 만들어 건조공정을 거친 뒤 가로와 세로로 여러 겹을 겹쳐 매우 단단한 고강도의 합판을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는 호주 회사들이 펄프제조용으로 사용하는 원목을 선별, 활용해 고강도 합판 생산에 착안, 태즈메이니아에서 목재생산 라이센스(자격증)를 확보했다.
환경보호주의자들 극렬한 반대 극복, 호주정부 인정받아
강 회장은 2005년 태즈메이니아 산림청과 20년에, 옵션 20년의 원목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기술과 원자재는 확보됐으나 투자금이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말레이시아 목재회사들과 거래했던 경험을 통해 2005년 5월 최종적으로 말레이시아 사라와크 소재 상장기업인 타안 홀딩스를 파트너로 찾았다. 이들 파트너사로부터 해외자본 1억 달러를 유치해 3개의 원목가공 공장을 건설했다.
2007년 호바트 근처에 4,000만 달러를 투자해 휴온 베니아 공장을 설립했다. 2008년에도 4,000만 달러를 투자해 스미스톤에 베니아 공장을 세웠다. 2015년에는 스미스톤에 1,700만 달러를 투자해 합판공장을 건설했다. 이처럼 기술개발과 해외자본을 유치해 공장을 건설하고 제품을 생산해 해외수출과 호주 국내 시장에 공급하는데 꼬박 30여 년이 걸렸다.
강 회장이 낯선 태즈메이니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끝임없이 ‘현지 사회와 함께 성과를 나누자’는 경영철학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매년 이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은 물론 스포츠팀 육성을 위한 기금과 유니폼 제공, 컴퓨터 기증했고 산림축제 등 지역사회 행사에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특히 주류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들 지도자들과 일단 약속이나 합의한 사항에 대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과 호주간의 경제 및 문화교류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그렇지만 목재산업이라면 산림파괴로 인식해 무조건 반대를 하던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과 환경보존단체의 격렬한 반대에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다. 환경단체들은 공장 또는 제품 선적하는 선박을 잇달아 불법 점거했다. 심지어 해외에서는 날조된 선전으로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 2차 제재)방법으로 시장을 교란시켜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2012년 1월에는 환경단체가 사무실과 공장을 무단 점거한 바람에 조업차질은 물론,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그는 이때마다 성심 성의껏 이들 환경단체의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그가 경영하는 회사는 펄프제조용이나 연료용으로 밖에 쓸 수 없는 나무를 사용해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폐기물을 감축시키고 자원을 재활용하고 있다는 장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지역사회의 고용인원이 500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도 내세웠다. 덧붙여 회사는 목재가공의 전 과정에서 환경친화적이며 사회적이고 도덕적 기준을 준수하며, 지속가능한 원목으로 가공한 제품임을 소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국제산림인증프로그램협회(PEFC)의 인증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타안 태즈메이니아는 사회적, 환경적으로 책임감이 강한 기업임을 환경단체 또는 녹색당까지도 잠정적으로 인정해줬다. 이런 결과, 강 회장은 2008년 태즈메이니아주 수출상과 호주 연방정부 수출상을 각각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