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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스토리

2019대상-한창우

2019수상자 - 대상

한창우 마루한 그룹 회장(일본)

 

< 청년 실업가 한창우 회장>


‘삶에 즐거움’을 주는 세계적인 엔터데인먼트 회사 키워

 

영어사전 한 권과 쌀 두되를 가지고 1947년 일본에 건너간 한창우 회장은 1948년 호세이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재일 동포단체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마르크스와 패션,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으며 어려운 형편에도 밥값을 아껴가며 예술영화관을 찾는 청년이었다. 그런 취미의 영향으로 1957년 교토 미네야마에 클래식 음악카페 루체(Luce)를 창업했다. 1958년 4월에 자형이 운영하던 파친코 홀을 인수, 미네야마 카지노점을 오픈하여 파친코사업을 시작한다. 일본 최대의 파친코 홀 사업과 동남아시아 4개국에 200여 지점의 금융업(은행), 일본 내 18코스의 명문 골프장, 600여 점의 외식업, 볼링장, 영화관, 국내외 부동산 및 빌딩관리 등 사업을 다각화하며 지금의 마루한 그룹을 일구었다. 2019년 마루한그룹 종업원은 2만3,144명, 총매출은 1조7,177억엔에 달한다. 마루한그룹은 창의와 연구, 성의와 노력, 신용과 봉사의 정신과,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는 창업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토요오카 볼링장 1967년12월>


전후 일본 상류사회 꿰뚫어 보는 눈으로 맞춤 경영에 성공

 

한 회장은 대학시절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공산주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마오쩌둥의 사상에도 깊이 빠졌다. 1950년 대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좌익과 우익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자본론을 보면서 마르크시즘이 대단히 과학적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바뀌고 마르크시즘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마르크시즘은 통제적 경제체제를 전제로 한 이론인데 현실에는 잘 맞지 않았다. 마르크시즘은 소유욕 등 인간의 욕망을 간과했다고 보았다. 욕망이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에너지원인데 이를 감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시즘에 빠진 젊은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상으로 가치가 있는 사회이론으로 평가하고 있다.

<클래식 명곡 커피숍 루체 1957년5월>


마르크스주의를 선호했던 한 회장은 패션디자인, 클래식 음악에도 심취했다. 공존하기 어려운 모순되는 점이 있지만 지금도 일본 재계에서 손꼽히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다. 일본 최고 귄위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사를 맡고 있다. 재력과 사회적 명예, 상당한 수준의 음악적 식견이 요구되는 자리다.

그가 클래식에 심취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상류층은 3가지 조건이 있었다.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여유롭지만, 자신의 미래와 진로에 관련해서는 전략적이고 철저했다. 그가 대학시절부터 클래식 음악 감상을 취미로 삼은 것은 그의 취향도 잘 맞았던 측면도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은 완벽한 성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서구문화 숭배에 젖어 있던 일본 전후 사회에서 유럽 상류층 문화인 클래식 음악에 대한 식견은 최고의 교양으로 통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마니아적 심취는 1950년대 일본 중상류층들이 서구 상류사회의 로맨틱함과 고급스러움이 어떤 물질적 소품들과 어떤 뉘앙스 어떤 문맥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꿰뚫어보게 됐다.

그는 고객의 숨겨진 욕망을 읽어내는 능력과 그 욕망을 상품이나 서비스로 세련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음악을 통해 길러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파친코를 운영하면서도 고객의 마음을 읽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곧 그의 성공의 비결 중의 하나였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장사도 잘한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장사도 잘한다.’는 말은 한 회장에는 맞는 말이었다.

한 회장이 초기에 정착한 일본 미네야마는 동해의 절경을 가까이에 둔 풍류의 고장이었다. 옛날부터 단고치리멘(견직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그가 미네야마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이곳에는 20여 개의 파친코 점포가 있었는데 치열한 경쟁 끝에 4~5개만 살아남았다. 매형 점포를 이어받은 그는 처음부터 사업이 잘된 것은 아니었지만 고객들 앞에서는 항상 밝은 표정이었다.

파친코 운영이 순조로워지자 그는 1957년 요정거리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클래식 음악다방 루체(Luce : 이탈리어로 ‘등불’)를 개업했다. 다방 뒤편 창고를 개조해 그곳에 기거하다가 음악다방이 잘 되자 이 창고도 다방으로 확장했다. 다시 다방을 헐고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새 건물을 세웠다. 레스토랑 루체는 미네야마 일대에서 파격 자체였다. 오사카 최고 건축사무소에 의뢰해 설계했다.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건물입구의 자동문은 보기 드문 시설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네야마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고급스런 실내 인테리어, 클래식 음악, 종업원의 수준 높은 서비스 등을 제공했다. 1950년대 점심으로 먹는 우동 한그룻 가격이 20엔인데 루체 커피 한잔은 세배인 60엔이었다. 밥보다 훨씬 비싼 커피가 과연 팔리겠느냐는 회의론이 많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맞선을 보는 젊은 남녀는 반드시 루체를 찾았고 인기 있는 데이트 코스였다. 고객들이 일본 노래도 좀 틀어달라고 요구해 특정 시간를 정해놓고 틀어줄 정도였다.

일본 경제성장의 과실이 일반 대중까지 파급되던 시절에 양보다는 질을 우선시하는 소비패턴을 선도한 것이다. 루체는 소비의 고급화 경향에 맞아 떨어졌다. 고객과 점포간에 정서적 일체를 만든 것이다. 루체의 성공은 음악의 힘에서 왔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취미가 클래식 음악 전문 레스토랑 설립으로 이어져 우연히 재미를 봤다는 단순논리가 아니다. 그는 음악을 자주 들으면 소비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사람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소비자에 대한 이해로 이어져 비즈니스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50~60년대 일본에서 클래식 음악 레스토랑이 많이 생겼지만 성공을 거둔 점포는 소수였다. 클래식이든 전통 일본풍이든 어떤 이미지를 채택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루는 감각’에 따라 성공의 성패가 좌우됐다.

한 회장의 루체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다. 1957년부터 1979년까지 루체가 있었던 곳에는 표식을 세우고 동네 주민들에게 바비큐 파티장으로 개방했다. 마루한의 사보명도 루체다.

 

43세 때 빚진 60억엔 10년만 상환

 

파친코 홀과 레스토랑, 골프연습장 등을 경영하던 39세 때 거액을 빌려 1967년에 효고현 도요오카에 볼링장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1972년에는 시즈오카에 120레인의 거대 볼링장을 개장했다. 그러나 석유파동 등 세계 경제공황으로 레저산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1973년 부채가 60억 엔으로 늘어났다. 한때 자살도 생각했다. 그러나 믿고 도와준 분들에게 책임을 넘길 수 없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볼링장을 쇼핑센터로 재개장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주변 친구는 부도를 내라고 권했지만, 금융기관을 찾아가 자신의 통장과 인감, 등기부 등 전 재산을 내놓으면서 어떻게든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0년 만에 전액 상환했다.

거액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은 1975년부터 고도 경제성장으로 자가용 붐이 일 때 교외에 대규모 주차장을 갖춘 파친코 홀을 개설한 것이 대성공을 거둔 요인이었다. 자신의 홀 경영 노하우를 매뉴얼화하여 직원들에게 철저히 교육했다. 이를 위해 ‘마루한이즘’이라는 경영이념과 사훈을 만들었다. 사훈은 미네야마에서 사업을 시작할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생각했던 노력과 신용, 봉사 등으로 정했다. 오늘날 마루한의 사훈은 창의와 연구, 성의와 노력, 신용과 봉사 등이다. 재일 교포 출신들은 일본사람이 하루 여덟 시간 일을 할 때 두 배는 일을 해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노력’을 사훈의 으뜸으로 정했다. 신용 면에서도 일본인의 두 배 이상이 되어야 대등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여겨서 ‘신용’을 정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뜻에서 ‘봉사’를 선택했다. 이러한 사훈과 마루한이즘을 토대로 사원교육에 집중했다. 점포를 확대할수록 좋은 인재를 파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즉, 사원의 질적 우수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점포를 확장하는 것이 마루한 그룹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인재육성에 매달렸다. 한창우를 무한 복제하는 방식으로 파친코 홀을 확대했다.

그는 양적으로 확장하지 않고 업계의 개혁을 위한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파친코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깨뜨리는 대전환을 모색했다. 기존의 파친코 이미지는 탈세, 어두움과 누추함, 시끄러움, 꽉 찬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그는 투명한 경영체계 확립과 TV, CD플레이어 등 멀티미디어가 부착된 기계 등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파친코 이미지를 건전한 분위기로 전면 바꿨다.

둘째, 파친코에 근무하는 종업원들의 용모와 옷차림에 대해 단정하고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사내규정을 마련했다. 예를 들면 사원 중에 파마머리에 하얀 에나멜 구두를 신고 금 목걸이를 걸친 종업원과 점장은 해고했다. 이러한 용모와 옷차림은 서비스업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마루한에 근무하는 사원은 비즈니스맨은 물론, 은행원보다도 단정하고 청결한 이미지를 갖출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일신했다. 이를 위해 일류대학을 졸업한 사람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직원을 선발하고 우대했다.

셋째, 탈세와 싹쓸이, 야쿠자 스타일의 이미지 등 파친코업의 부정적 평판을 단절하지 않고는 마루한 그룹이 일류기업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연유는 부모와 친척들이 대기업에 취업한 자식에 대해서 자랑하지만 마루한에 취업하면 창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파친코업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점을 해소해야만 마루한 사원들이 당당하게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늘 사원들의 행복한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회사의 발전은 사원들의 근무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원들이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열정과 의욕을 자극시켜서 회사 발전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앞장을 섰다. 후생복지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사원들이 결혼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주택 구입비용과 교육비를 지원하고 급여체계도 불공평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했다.

그는 회사의 매출을 늘려야만 사원들에게 더 좋은 근무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주식상장을 추진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사원들도 당당하게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원들도 당당히 일을 하고 때로는 회장한테 혼나더라도 참으면서 마루한에서 일하길 정말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한창우 회장은 자신의 신조로 삼는 문구를 사원들에게 보여줬다.

일소일약 일노일노(一笑一若 一怒一老)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신조는 당초 ‘일일부작 일일부식’이라는 속담에서 가져왔다. 그날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면 먹지 말라는 뜻이다. 한 회장은 이 속담의 앞에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웃을 수 있다면 그 자리를 밝게 하고 사람의 정신을 젊게 유지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짜증을 내면서 화를 내면 그만큼 사람의 정신 또한 나이를 들게 된다는 뜻으로 재해석해서 써먹었다.

그의 지론은 사원들이 스스로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에 앞장을 섰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일하면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지시를 받지 않더라도 솔선하여 일을 만들어야가야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2005년에 매출액 1조 엔을 달성했다.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매출 1조 달성 초대형 파티 개최

 

그는 2005년 6월 22일 도쿄 인근 지바시 마쿠하리에 있는 마쿠하리 메세(컨벤션센터)에서 9,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초대형 저녁 파티를 열어, 마루한 매출 1조엔(당시 환율로 약 10조)돌파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개최했다.

한창우 회장은 10조원 달성 기념행사를 약 1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그동안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그리고 전국의 마루한 그룹 사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행사를 열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매출 10조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음 목표인 매출 50조원을 달성하기 위한 출발식이라는 대내외 선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 직원 7천명과 모리 요시로 전 총리 등 국내외 VIP를 비롯한 한일 양국 손님, 재외동포 2,000명을 한자리에 모이는 초대형 매머드 행사를 준비해야 했다. 이를 위해 대연회장 3개를 터 650개의 식사 테이블을 마련했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만 1,500명이 동원해야 했다.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장소는 지바에 있는 마쿠하리메세 국제전시장 밖에 없었다.

그는 최대형 디너파티를 개최하는 날짜는 한일수교 40주년을 기념하는 날로 잡았다. 그의 의도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도움을 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 회장이 가장 꼼꼼하게 신경을 썼던 부분은 음악을 선곡하는 문제였다. 1부 행사는 도쿄필하모니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시작해서 2부에는 한일 3대 테너의 꿈의 경연,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노래>로 마무리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16살 때 현해탄을 건너와서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일본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기업가로 성공했음을 과시하고 싶었다. 10조원 달성을 축하하는



<2008년 5월 캄보디왕국 제1등 대십자훈장 수훈>


괌에도 주식회사 마루한 괌을 설립했으며 싱가포르에도 아시아 투자회사를 세웠다. 한국에서도 인천광역시 영종도 복합레저개발사업인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에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기업 경영으로 한창우 회장은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7년 ‘일본 50대 부호 명단’에서 36억 달러의 재산으로 11위를 차지했다.


행사 경비로 330억 원을 썼다. 그가 가장 많이 투자했던 부분은 사원 모두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줬다. 60억원을 들여서 취업 연수를 고려하여 교대로 한국과 대만, 중국, 싱가포르, 라스베이거스, 하와이, 괌으로 해외여행을 보냈다. 또한 전 직원들에게 60억원의 보너스를 줬다. 게다가 축하행사를 6월 22일과 23일 양일에 걸쳐 진행됐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점포는 이 기간 동안 문을 닫았다. 휴업 손실액은 대략 60억원. 이밖에 7천인 분의 프랑스 코스요리와 초청인사 호텔 숙박 제공 등 축하행사비로 150억원이 소요됐다.

한 회장은 마루한 역사 속에서 사원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경비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비용이 들더라도 7천명의 가족(그는 사원을 이렇게 표현했다)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매머드 디너파티를 개최했던 것이다.

그는 매출액 10조원 목표 달성을 기념하는 파티를 통해 지나온 추억을 떠올렸다. 1950~60년대 유행했던 음악을 들으면서 16세에 현해탄을 건너오면서 봤던 시모노세키의 불빛과 결핵으로 입원했던, 병실, 반대에 부딪히면서 강행했던 축하객 없는 결혼식,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시작한 볼링 사업, 그로 인해 거액의 빚을 떠안은 힘들었던 시절과 큰 아들 철의 갑작스러운 죽음, 피땀을 흘리면서 실패와 성공을 반복했던 인생을 관조하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일본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사업가로

 

한창우 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실력과 교양, 신용 등을 갖췄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몇 배나 많은 노력을 하였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마루한은 일본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 진출하였다. 그리고 해외 금융업 및 개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미래의 경제발전이 기대되는 캄보디아에 마루한재팬뱅크를 2007년에 설립했다. 캄보디아의 유럽 사업가 포토 밴탄 씨가 운영하는 투자은행을 상업은행으로 전환해서 2008년 5월에 개업했다. 캄보디아에서 열 여덟 번째로 개업한 상업은행의 자본금은 2천5백만달러였다. 마루한의 출자율은 85%이고 나머지 15%는 현지 실업가 밴탄씨가 출자했다.

이 사업은행은 2016년에 사파타니은행의 합병을 통해 캄보디아 2위인 사타파나뱅크를 설립했다. 그는 또 2013년 2월 라오스에 마루한재팬뱅크를, 2015년 8월에 미얀마에도 은행을 세웠다. 마루한 그룹은 프놈팬 노로돔 대로에 지항 4층, 지상 19층 연면적 3만3,135㎡ 규모의 사타파나은행 본점 공사를 착공, 2020년 9월 준공했다. 이들 은행은 이들 지역의 빈곤층을 대상으로 소액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는 오랫동안 마루한의 고객서비스를 은행업에 접목하여 서비스 혁명을 일으켜 동남아에 지점을 설치함과 동시에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프로그램을 개발, 후원하고 있다. 그는 이 공로로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외국인에게 수여되는 국가 최고훈장인 ‘캄보디아 왕국훈장 대십자상’을 2008년 수훈했다.


 


조국 한국에서 시작, 세계 각국에 사회공헌 활동 전개

 

한창우 회장의 지론은 경쟁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사업가인 이상 지독하게 벌지만, 깨끗하게 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돈의 노예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경쟁에서 얻은 이익은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공헌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그는 동포사회와 고국의 경제발전은 물론, 한일 우호증진을 위한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고 있다.

그는 1993년 김덕룡이사장과 함께 (사)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창설했다. 이와 더불어 2005년 11월에 해외교포 상공인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재일세계한인상공인연합회를 발족했다. 이 조직은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일본지부의 역할를 맡기로 했다. 그는 ‘눈은 세계로, 마음은 조국에’ 둔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재일한국상공인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재외동포재단 주최 2004년 세계한상대회 대회장을 했다. 이와 함께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90년에 사재를 털어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현 공익재단법인 한창우‧철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학술, 문화, 국제교류 등 다양한 분야의 개인과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경남 사천시에 재단법인 한창우‧나가코 교육문화재단을 설립,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밖에 강원도가 주도하는 광역두만강 개발계획(GTI) 국제무역 투자박람회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88서울올림픽 성공에 기여한 공적으로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1987)과 한국의 사회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무궁화장(1995)을 각각 수훈했다. 2011년 동일본 지진 복구기금으로 85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로부터는 한일 양국 우호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훈 3급 서보장(1999)을,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마셜제도공화국에서 최고 공로훈장(2004)을 받기도 했다.




`태평양크럽 고텐바코스


Sathapana Tower- Far View 1



마루한 창업지에서 열린 창업 60주년 기념비 제막식 (교토후 교단고시)



J리그 오오이타 트리니타    메인 스폰서    일본 제일이 될때까지 지원을 약속한 팀이 2008야마자키 나비스코 ~


공익재단법인 한창우・철 문화재단 조성금증서 수여식 사진 2016년도公益財団法人 韓昌祐・哲文化財団 2016年度助成証書授与式


공익재단법인 한창우・철 문화재단 조성금증서 수여식 사진哲文化財団 2017年度助成証書授与式





마샬공화국 최고공로훈장 수훈


문화예술진흥을 위해 지원하고 있는 일본최고의 역사의 동경필하모니교향악단 오피셜 스폰서 (현재 교향악단의 이사재직)


베트남 하노이 총리관저에서 응우옌 쑤언 푹 총리와 2019年3月


영국 찰스 황태자와 버킹검궁전 만찬에서(2005년6월)


캄보디아 사타파나은행 본점 타워빌딩 2021년 준공



한국어로 출판된 자서전을 들고 부인 나가코 여사와  자서전 출판


한창우 나가코 교육문화재단 발족식2010年5月 


한창우 나가코 교육문화재단 장학금 수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