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우수상)

장영식 에이산그룹 회장
무일푼 유학생 일본 유통업 진출 ‘재팬 드림’ 이뤄
전남 순천시에서 태어난 장영식 회장은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자취생활을 했으며 보이스카우트 활동 등으로 지리산 등반을 즐겼다.
1991년 순천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업의 어려움을 겪었다. 군대 제대 후 1993년 단돈 300만 원을 손에 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전에는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고기 집에서 불판을 닦으며 신문배달을 통해 돈을 모았다.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3백만 원 들고 도일… 하루 3시간 자며 악착같이 돈 벌어


그가 일본 유통업에 뛰어든 것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하루에 10시간씩 한 달에 두 번 쉬고 받은 임금은 15만엔이었다. 하루 일당이 5천 엔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히려 손수레를 끌면서 남대문 및 동대문시장에서 수입한 조용필 등 한국가요 테이프를 레코드 가게에 공급하는 게 훨씬 수입이 좋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 자연재해가 발생해 쌀값이 폭등하자, 재빠르게 한국의 경기미와 강화미를 수입, 판매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쌀과 테이프의 판매로 1년 만에 300만엔의 목돈을 손에 쥐었던 그는 기존 재일동포들이 종사하는 업종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 다녔다.
그 때 우연히 들렀던 일본의 최대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에서 가전제품의 유통업에 매력을 느꼈다. 처음에는 가전 도매상에서 TV 또는 냉장고를 1~2대를 구입, 소매점에 넘기는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냉장고 또는 TV 등을 1대 정도 팔았으나, 신뢰를 얻기 시작하면서 5대 또는 10대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를 눈여겨본 아키하바라의 대형점포에서 그를 영업부장으로 영입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팔았다.
1995년 6월에 일본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서 주식회사 영산기계교역 (자본금 1,000만엔)을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 내 호텔 또는 정부기관에 TV 등 전자제품을 납품했고 중국과 홍콩에도 제품을 수출했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업체 제품을 공급받기에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우선 일본 업체들은 제아무리 물건을 도매로 구입하겠다고 해도 신규업체와는 거래에 응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첫 거래는 반드시 현금지급이나 보증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자금조달에 애를 먹었다. 게다가 금융기관의 차입도 어려웠다. 그는 진입장벽이 높은 일본 유통망을 뚫기 위해 처음에는 대형할인점에서 공급을 받는 동시에 메이커 담당자와 접촉, 직접적 계약을 맺었다.
둘째, 제품을 구입할 때는 현금을 지불함으로써, 일본가전업체의 절대적 신뢰를 얻었다. 셋째, 신용장의 지불 기일을 엄격하게 지켰다. 자금의 여유가 생기면 업체에 예치보증금의 범위 내에서 구입하는 방법을 썼다. 이처럼 거래처와 신용을 제일 중요시했던 그가 일본의 은행으로부터 자금 대출을 받을 때에 거래처의 사장이 보증인으로 나설 정도로 신뢰를 얻었다.
그는 소니 및 시세이도 제품을 유통하기 위해 5년 동안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통해 수없이 접근했지만 무산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2002년 9월에 소니 제품을 취급하게 됐고 오랫동안 구축한 신용을 통해 시세이도와도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는 2003년 12월 12일 일본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아키하바라에 에이산 면세점 1호점을 개설했다. 면세점 본점이 오픈되면서 거래금액도 억 단위를 넘었을 때 비로소 유명가전업체로부터 고가의 매입금액이 낮춰졌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2006년 7월에 회사명을 에이산(永山)으로 변경했다.
까다로운 일본 유통시장 뚫어…자위대 한국산 세탁기 납품
2008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정부와 파트너십을 체결, 일본 전역에 가전제품 유통 사업에 진출을 허가하는 ‘조달면허’를 취득했다. 이에 따라 전 부처 일반입찰은 물론, 2009년 4월에 동경도 입찰자격을 따냈다. 이로써 그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대규모 한국산 제품을 납품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10년 3월에 자위대가 발주한 세탁기 입찰에서 대우전자의 제품 380대(금액 1,330만엔)를 납품했다. 이는 7년간의 노력 끝에 한국산 제품이 일본제품과 동등하다는 점이 인정을 받게 됐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이처럼 장 회장은 ‘고객과의 신뢰관계를 소중히 한다’는 기본이념으로 법인영업과 온라인 쇼핑몰, 국내 소매업, 자사상품개발 등의 영업망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필수 관광코스에 면세점 설치
그가 세운 면세점에서는 삼성과 엘지 등 한국 제품이 수입돼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에이산은 일본을 찾는 외국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아키하바라와 도톤보리, 삿포로 등 인기가 많은 관광지와 히로시마 및 사가, 요나코 공항 등에 면세점을 설치, 시계와 화장품, 패션, 잡화를 비롯하여 가전 및 건강식품, 의약품, 인테리어용품, 주류, 스포츠(골프) 용품 등을 팔고 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영어와 중국어를 중심으로 11개 언어로 제품 설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판매 품목만 2만여 종류에 달하며 일본 면세점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고 있다. 2018년 현재 이바라키 공항점 등 23개 매장을 개설했다.
최근에는 농산물 판매장인 예스마트 8개와 한국화장품 판매장 K-cos 7개 매장을 설치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 및 해외영업, 매장영업, 온라인 영업 등 4개의 업무를 통해 매출규모도 1998년 23억엔에서 2008년에 134억엔을 달성했다.
장 회장은 유통업만 고집하지 않고 고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제품을 직접 제조 판매하고 있다. 파나소닉, 야마하, 브릿지스톤 등 대기업이 장악한 전기자전거 시장에 대담하게 뛰어들었던 장 회장은 2013년 2월에 중국과 한국 순천에 전기자전거 공장을 세우고 꾸준히 일본 시장을 공략했다. 일각에서는 전기자전거를 제조, 판매하겠다고 하니까 대기업과 어떻게 경쟁하느냐며 모두 반대했지만, 그는 성장의 ‘기회’로 활용했다.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전기자전거 시장에서 5%만 차지할 경우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에이산이 제조, 판매하는 상품은 수소발생기와 온수변기, 드라이어, 게르마늄 목걸이 및 팔찌 등으로 다양하며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장 회장의 경영철학은 ‘비즈니스 본질이 사회공헌’이라고 믿고 있다. 이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고용창출을 통한 사회공헌’이다. 그는 국적 및 학력, 남녀, 연령 등 4가지를 따지지 않고 열정과 능력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직원으로 동참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스타일 때문에 에이산에는 10개국 출신들로 직원들이 구성됐다. 또한 22세 최연소 직원에서부터 74세 최고령 직원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정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열정과 능력 갖춘 구직자에게 회사 발전 동참 기회 줘
게다가 능력만 있으면 승진에도 제약이 없다. 대표적인 사례는 국내영업부 소속 특명부 모 부장이다. 그는 고졸출신이지만 입사 후 B2B 사업은 물론, 가전제품 도매에서도 판매처의 담당자들과 꾸준히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매출증대를 가져와서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처럼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배치하고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시스템 경영을 펼치고 있다.
둘째, 고객의 소비심리를 파악,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유통시장에 진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객의 소비심리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소비자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경기 및 가격동향, 언론보도, 점원의 태도와 입소문 등에 의존한다. 따라서 상품 주문과 신상품개발, 각 매장의 재고관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각 점포에서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상품의 판매 동향과 고객의 소비패턴을 분석하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략적 업무 시스템을 구축했다. 특히 매장의 직원과 개발자의 담당자들끼리 상호업무협력을 통해 소비자의 판매패턴을 공유, 2차 또는 3차의 고객구매력을 촉진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수송하기 위해 2015년 3월에 치바 현의 버스운송회사를 매입했다. 홋카이도 삿포로시와 후쿠오카 현에 이르는 구간에 관광버스를 투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 회장은 에이산을 한국 코스닥에 상장한 뒤 확보된 자금으로 호텔을 인수할 계획이다. 일본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숙박과 수송, 관광, 쇼핑 등을 원스톱으로 해결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한국 코스닥 상장…숙박 쇼핑 관광 원스톱 시스템 구축 계획
그는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는 내 판단만으로 회사를 꾸려왔지만 상장 기업이 되면 전문 경영인을 둘 수도 있고 기업 운영도 더 투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직원의 80%가 외국인인데 이들의 고용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개인적 관심은 일본 내 차세대의 교육이다. 그는 학부모로써 동경한국학교 이사와 동경한국학교 육성회(PTA), 재일본한국학교 육성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재외국민의 교육기회 확대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2억5,000만원을 조성해 초등부 교사 건축 및 교육환경 개선사업을 지원했다.
그가 교육후원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이유는 일본사회에서 재일동포의 청소년들이 현지의 차별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희망을 찾는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2년부터 청소년의 진로개발을 위해 지역사회의 멘토와 2014년부터 K-무브 멘토로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에 해방이전에 이주해온 재일교포(올드 커머)와 1980년대 이주한 뉴 커머들간의 소통을 위해 민단 도쿄 신주쿠 지부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본인이 뉴커머 출신임에도, 56년 만에 올드커머의 단체인 ‘동경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맡았다. 그가 회장을 맡게 된 이유는 올드커머와 뉴커머간의 관계를 개선 및 증진시키기 위해서였다. 회장을 맡은 뒤 한일축제한마당 개최를 통해 한·일간의 문화교류를 주도적으로 전개했으며 재일한국인귀금속협회와 도쿄재일한국인연합회 등 뉴커머 대표 단체들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했다.
NGO 세계재난구호재단 일본 지부장 맡아
이와 함께 NGO 세계재난구호회(WDRO)재단 일본지역 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가 이 단체의 지부 책임자가 되었던 배경에는 2011년 3월 11일 진도 7.0 강진으로 동북대지진이 발생,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후쿠시마현 이와키지역에 400만엔 규모의 구호물품을 직접 수송해줬던 인연 때문이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서로 돕고 도와주는 한민족의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일본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012년부터 월드옥타 도쿄 회장과 명예회장, 나아가 본부 수석부회장 등의 역할을 맡아서 일본사회에 재일한국인 기업가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지위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인생도 사업도 정도(正道)를 걷는다. 이를 위해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은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고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될 수 있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드림 커뮤니케이션(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대화)을 통해 머릿속에서 계획을 실행한 뒤 도전하는 젊은이가 되라. 열심히 한다고 하지 말고 이것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일하라”
이 조언이 그의 성공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해왔으며,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6수상자 – 해양수산부장관상(우수상)
장영식 에이산그룹 회장
무일푼 유학생 일본 유통업 진출 ‘재팬 드림’ 이뤄
전남 순천시에서 태어난 장영식 회장은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자취생활을 했으며 보이스카우트 활동 등으로 지리산 등반을 즐겼다.
1991년 순천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업의 어려움을 겪었다. 군대 제대 후 1993년 단돈 300만 원을 손에 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전에는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고기 집에서 불판을 닦으며 신문배달을 통해 돈을 모았다.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3백만 원 들고 도일… 하루 3시간 자며 악착같이 돈 벌어
그가 일본 유통업에 뛰어든 것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하루에 10시간씩 한 달에 두 번 쉬고 받은 임금은 15만엔이었다. 하루 일당이 5천 엔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히려 손수레를 끌면서 남대문 및 동대문시장에서 수입한 조용필 등 한국가요 테이프를 레코드 가게에 공급하는 게 훨씬 수입이 좋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 자연재해가 발생해 쌀값이 폭등하자, 재빠르게 한국의 경기미와 강화미를 수입, 판매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쌀과 테이프의 판매로 1년 만에 300만엔의 목돈을 손에 쥐었던 그는 기존 재일동포들이 종사하는 업종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 다녔다.
그 때 우연히 들렀던 일본의 최대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에서 가전제품의 유통업에 매력을 느꼈다. 처음에는 가전 도매상에서 TV 또는 냉장고를 1~2대를 구입, 소매점에 넘기는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냉장고 또는 TV 등을 1대 정도 팔았으나, 신뢰를 얻기 시작하면서 5대 또는 10대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를 눈여겨본 아키하바라의 대형점포에서 그를 영업부장으로 영입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팔았다.
1995년 6월에 일본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서 주식회사 영산기계교역 (자본금 1,000만엔)을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 내 호텔 또는 정부기관에 TV 등 전자제품을 납품했고 중국과 홍콩에도 제품을 수출했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업체 제품을 공급받기에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우선 일본 업체들은 제아무리 물건을 도매로 구입하겠다고 해도 신규업체와는 거래에 응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첫 거래는 반드시 현금지급이나 보증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자금조달에 애를 먹었다. 게다가 금융기관의 차입도 어려웠다. 그는 진입장벽이 높은 일본 유통망을 뚫기 위해 처음에는 대형할인점에서 공급을 받는 동시에 메이커 담당자와 접촉, 직접적 계약을 맺었다.
둘째, 제품을 구입할 때는 현금을 지불함으로써, 일본가전업체의 절대적 신뢰를 얻었다. 셋째, 신용장의 지불 기일을 엄격하게 지켰다. 자금의 여유가 생기면 업체에 예치보증금의 범위 내에서 구입하는 방법을 썼다. 이처럼 거래처와 신용을 제일 중요시했던 그가 일본의 은행으로부터 자금 대출을 받을 때에 거래처의 사장이 보증인으로 나설 정도로 신뢰를 얻었다.
그는 소니 및 시세이도 제품을 유통하기 위해 5년 동안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통해 수없이 접근했지만 무산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2002년 9월에 소니 제품을 취급하게 됐고 오랫동안 구축한 신용을 통해 시세이도와도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는 2003년 12월 12일 일본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아키하바라에 에이산 면세점 1호점을 개설했다. 면세점 본점이 오픈되면서 거래금액도 억 단위를 넘었을 때 비로소 유명가전업체로부터 고가의 매입금액이 낮춰졌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2006년 7월에 회사명을 에이산(永山)으로 변경했다.
까다로운 일본 유통시장 뚫어…자위대 한국산 세탁기 납품
2008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정부와 파트너십을 체결, 일본 전역에 가전제품 유통 사업에 진출을 허가하는 ‘조달면허’를 취득했다. 이에 따라 전 부처 일반입찰은 물론, 2009년 4월에 동경도 입찰자격을 따냈다. 이로써 그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대규모 한국산 제품을 납품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10년 3월에 자위대가 발주한 세탁기 입찰에서 대우전자의 제품 380대(금액 1,330만엔)를 납품했다. 이는 7년간의 노력 끝에 한국산 제품이 일본제품과 동등하다는 점이 인정을 받게 됐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이처럼 장 회장은 ‘고객과의 신뢰관계를 소중히 한다’는 기본이념으로 법인영업과 온라인 쇼핑몰, 국내 소매업, 자사상품개발 등의 영업망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필수 관광코스에 면세점 설치
그가 세운 면세점에서는 삼성과 엘지 등 한국 제품이 수입돼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에이산은 일본을 찾는 외국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아키하바라와 도톤보리, 삿포로 등 인기가 많은 관광지와 히로시마 및 사가, 요나코 공항 등에 면세점을 설치, 시계와 화장품, 패션, 잡화를 비롯하여 가전 및 건강식품, 의약품, 인테리어용품, 주류, 스포츠(골프) 용품 등을 팔고 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영어와 중국어를 중심으로 11개 언어로 제품 설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판매 품목만 2만여 종류에 달하며 일본 면세점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고 있다. 2018년 현재 이바라키 공항점 등 23개 매장을 개설했다.
최근에는 농산물 판매장인 예스마트 8개와 한국화장품 판매장 K-cos 7개 매장을 설치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 및 해외영업, 매장영업, 온라인 영업 등 4개의 업무를 통해 매출규모도 1998년 23억엔에서 2008년에 134억엔을 달성했다.
장 회장은 유통업만 고집하지 않고 고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제품을 직접 제조 판매하고 있다. 파나소닉, 야마하, 브릿지스톤 등 대기업이 장악한 전기자전거 시장에 대담하게 뛰어들었던 장 회장은 2013년 2월에 중국과 한국 순천에 전기자전거 공장을 세우고 꾸준히 일본 시장을 공략했다. 일각에서는 전기자전거를 제조, 판매하겠다고 하니까 대기업과 어떻게 경쟁하느냐며 모두 반대했지만, 그는 성장의 ‘기회’로 활용했다.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전기자전거 시장에서 5%만 차지할 경우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에이산이 제조, 판매하는 상품은 수소발생기와 온수변기, 드라이어, 게르마늄 목걸이 및 팔찌 등으로 다양하며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장 회장의 경영철학은 ‘비즈니스 본질이 사회공헌’이라고 믿고 있다. 이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고용창출을 통한 사회공헌’이다. 그는 국적 및 학력, 남녀, 연령 등 4가지를 따지지 않고 열정과 능력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직원으로 동참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스타일 때문에 에이산에는 10개국 출신들로 직원들이 구성됐다. 또한 22세 최연소 직원에서부터 74세 최고령 직원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정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열정과 능력 갖춘 구직자에게 회사 발전 동참 기회 줘
게다가 능력만 있으면 승진에도 제약이 없다. 대표적인 사례는 국내영업부 소속 특명부 모 부장이다. 그는 고졸출신이지만 입사 후 B2B 사업은 물론, 가전제품 도매에서도 판매처의 담당자들과 꾸준히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매출증대를 가져와서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처럼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배치하고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시스템 경영을 펼치고 있다.
둘째, 고객의 소비심리를 파악,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유통시장에 진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객의 소비심리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소비자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경기 및 가격동향, 언론보도, 점원의 태도와 입소문 등에 의존한다. 따라서 상품 주문과 신상품개발, 각 매장의 재고관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각 점포에서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상품의 판매 동향과 고객의 소비패턴을 분석하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략적 업무 시스템을 구축했다. 특히 매장의 직원과 개발자의 담당자들끼리 상호업무협력을 통해 소비자의 판매패턴을 공유, 2차 또는 3차의 고객구매력을 촉진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수송하기 위해 2015년 3월에 치바 현의 버스운송회사를 매입했다. 홋카이도 삿포로시와 후쿠오카 현에 이르는 구간에 관광버스를 투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 회장은 에이산을 한국 코스닥에 상장한 뒤 확보된 자금으로 호텔을 인수할 계획이다. 일본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숙박과 수송, 관광, 쇼핑 등을 원스톱으로 해결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한국 코스닥 상장…숙박 쇼핑 관광 원스톱 시스템 구축 계획
그는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는 내 판단만으로 회사를 꾸려왔지만 상장 기업이 되면 전문 경영인을 둘 수도 있고 기업 운영도 더 투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직원의 80%가 외국인인데 이들의 고용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개인적 관심은 일본 내 차세대의 교육이다. 그는 학부모로써 동경한국학교 이사와 동경한국학교 육성회(PTA), 재일본한국학교 육성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재외국민의 교육기회 확대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2억5,000만원을 조성해 초등부 교사 건축 및 교육환경 개선사업을 지원했다.
그가 교육후원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이유는 일본사회에서 재일동포의 청소년들이 현지의 차별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희망을 찾는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2년부터 청소년의 진로개발을 위해 지역사회의 멘토와 2014년부터 K-무브 멘토로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에 해방이전에 이주해온 재일교포(올드 커머)와 1980년대 이주한 뉴 커머들간의 소통을 위해 민단 도쿄 신주쿠 지부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본인이 뉴커머 출신임에도, 56년 만에 올드커머의 단체인 ‘동경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맡았다. 그가 회장을 맡게 된 이유는 올드커머와 뉴커머간의 관계를 개선 및 증진시키기 위해서였다. 회장을 맡은 뒤 한일축제한마당 개최를 통해 한·일간의 문화교류를 주도적으로 전개했으며 재일한국인귀금속협회와 도쿄재일한국인연합회 등 뉴커머 대표 단체들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했다.
NGO 세계재난구호재단 일본 지부장 맡아
이와 함께 NGO 세계재난구호회(WDRO)재단 일본지역 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가 이 단체의 지부 책임자가 되었던 배경에는 2011년 3월 11일 진도 7.0 강진으로 동북대지진이 발생,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후쿠시마현 이와키지역에 400만엔 규모의 구호물품을 직접 수송해줬던 인연 때문이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서로 돕고 도와주는 한민족의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일본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012년부터 월드옥타 도쿄 회장과 명예회장, 나아가 본부 수석부회장 등의 역할을 맡아서 일본사회에 재일한국인 기업가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지위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인생도 사업도 정도(正道)를 걷는다. 이를 위해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은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고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될 수 있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드림 커뮤니케이션(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대화)을 통해 머릿속에서 계획을 실행한 뒤 도전하는 젊은이가 되라. 열심히 한다고 하지 말고 이것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일하라”
이 조언이 그의 성공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갖고 일을 해왔으며,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