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문화체육부장관상-박상윤

2018년 수상자 – 문화체육부장관상

박상윤 상해상윤무역유한공사 대표(중국 상해)

 

미술공부와 더불어 예술가를 사귀는 기업인

 

박상윤 상해상윤무역유한공사 대표는 바이어들과 활발하게 무역 비즈니스를 하는 중에도 국내외 화가와 갤러리 관계자들을 만나서 교류하며 사귀는 것을 유난히 좋아 한다. 그는 틈만 나면 미술사, 미학, 미술 에세이 등에 관련된 책을 구해서 공부한다. 서양화는 물론, 한국화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작가 의 화풍 및 미술시장의 동향에 대한 정보도 수집한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최근 한국 화가의 작품을 중국의 컬렉터들에게 판매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는 2019년 3월에 ‘상해한국상회(한국인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임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상해한국상회사무국을 리노베이션한 후 교민 소통 의 공간으로 꾸미고 미술 전시, 음악 공연, 문학가 강연, 경제 강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펼쳤다. 그후 2020년 1월부터 코로나 펜더믹이 시작된 이후 그는 상해 교민들에게 마스크 및 소독제 무료 배포, 중국 사회에 소독제 기증, 한국 및 해외 교민들에게 마스크 기부 등의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코로나로 침체된 상해 한인타운의 한식당들의 경영을 돕기 위해서 1달 간의 일정으로 한류문화제를 한풍제라는 이름으로 개최해 매주 다양한 공연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비행기편이 두절돼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국에 있는 상해 교민들을 상해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인천-상해 포동 간의 전세기를 운영, 1,100명의 교민을 상해로 복귀시켰으며 격리 기간 중에 격리 생필품 지원 등의 봉사를 이끌었다.

그는 두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다. 창업 후 틈틈이 써온 경영 칼럼을 모아서 《선한 영향력》이라는 책과, 문학 에세이집인 《나는 한 살이다》를 출간했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거의 매일 글을 쓴다. 때로는 일 기 형식으로, 때로는 수필 형식으로 글을 쓴다. 언젠가는 미술 에세이를 출간할 생각이다.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아는 까닭에 그가 쓸 세 번째 책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박상윤 사장을 한마디로 소개한다면, 냉철한 두뇌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경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유는 비전과 나눔을 아는 창조적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일찍 출근한 직원되겠다’ 약속 지키며 자기계발

 

박 사장은 1988년에 전북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자마자 SK케미칼(주) (‘선경합섬’의 후신)에 입사했다. 어렸을 때 MBC 방송의 〈장학퀴즈〉를 즐겨 시청했는데 광고주였던 SK그룹의 공익 광고를 보면서 호감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 회사에 입사하게 되자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되 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던 5년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전 7시 30분에 출근했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였다. 일찍 출근해서 자기계발에 힘썼다. 매일 하루 1시간 30분 정도 외국어를 공부했다. 입사 첫해에는 영어 회화를 공부했다. 입사할 때 영어 성적이 우수해서 수출팀에 배속됐지만, 영어를 더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해서 실무 영어 회화의 공부에 매달렸다. 입사 2년째부터는 매일 아침 일본어 선생님을 회사로 모셔서 꼬박 3년 동안 일본어 회화 공부를 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91년부터는 일본 종합상사 바이어들과 일본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며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1992년부터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2년 반 정도 공부를 했다.

당시 그가 살던 집은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에 있었다. 회사에 7시 30 분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출근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집에서 나와 10분 정도 걸어서 버스 정 류장에 도착 ~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후 구파발역에 도착 ~ 그곳에서 다 시 충무로역까지 지하철을 갈아타기 과정을 거쳐야 했다. 회식 때문에 만취해서 새벽 2시에 귀가해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심지어 밤 12시 넘어서까지 야근하고 퇴근하던 날 폭설이 내려서 새벽 3시 넘어서 귀가했지만 어김없이 5시에 일어나 7시 30분까지 회사에 출근했다.

당시 회사 사무실은 규모가 꽤 크고 직원도 많았다. 직급이 높은 사 람일수록 출근도 일찍 했다. 회사 사장님도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층이 달라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지만 한 달에 2~3회씩 아침 일찍 전 부서를 둘러보곤 했다. 그럴 때면 가장 먼저 출근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그에게 와서 “뭘 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이 인연으로 1994년 여름에 회사에서 파견하는 중국어 연수생으로 선정됐다.

회사의 지원으로 1년 동안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어를 잘 했던 그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SK케미칼(주) 상해 주재원과 사무소 소장직을 수행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SK케미칼(주)과 삼양사(주)가 50:50 지분으로 합병한 휴비스(주) 상해지사장을 지냈다.

박 사장은 사천휴비스화섬유한공사의 총경리(2005~2007)로 일하기 도 했는데 이때 상해 복단대학교의 최고경영자 과정인 EMBA(2년)에 입 학했다. 학생(60명)의 대부분이 중국과 대만 출신이었다. 한국인은 그가 유일했다. 이때 경영 전반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다만 논문을 써야 하는 학기에 한국 본사로 인사 발령이 나는 바람에 석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수료만했다.

지방대 출신인 그가 1994년 9월부터 오늘날까지 중국통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계발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기 때문이고,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11년 6개월 동안의 주재원과 법인장 생활을 마친 뒤 본사 글로벌사 업본부장으로 부임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자녀 미국유학 계기 창업 결단 ‘사업가의 꿈’ 실현

 

2007년 여름, 회사 발령으로 한국으로 귀국했다. 가족들을 상해에 남기고 혼자 들어왔다. 오랜만의 본사 생활은 낯설고 외로웠다. 아들과 딸이 고등 학교 2학년과 중학교 2학년에서 각각 3학년이 되던 즈음이라 한국으로 전학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한국에서 근무 중이던 2007년 말에 아들이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뛸 듯이 기뻤으나 그것 도 잠시, 걱정이 앞섰다. 당시 그의 월급으로는 미국 명문 사립대학에 보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대학교의 1년 학비는 수업료, 기숙사비, 보험료를 포함하여 6만3,000달러를 넘었다. 당시 환율로 약 7,000만 원이었다. 게다가 뒤이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딸까지 생각하면 앞 이 캄캄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계속해서 샐러리맨으로 생활한다면 아이들 유학 경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터였다. 만약 경비를 부담한다고 해도 가정 경제는 거의 포기해야 했다. 결국 그는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품었던 사업가의 꿈을 펼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자녀들의 유학 경비를 벌기 위해서 창업을 한 셈이다.

2008년 상해에서 ‘상윤무역유한공사’를 설립했다. 회사 명칭에 자신 의 이름을 넣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6개 정도의 회사 명칭을 상해 공상국에 신청했는데 이미 등록된 이름이 있어서 안된다는 답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넣었더니 법인을 등록할 수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상윤(相潤)’이라는 자기 이름을 넣었다. 그의 한자 이름은 ‘함께 윤택 해지는 삶을 살아라’는 뜻의 서원(誓願)을 담고 있다.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이름처럼 ‘서로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시곤 했다. 어찌되었건 회사명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가게 되어서 기뻤다.

그는 창업할 때 ‘크게 생각을 하자’고 다짐했다. 자기 혼자 또는 자기 가족만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지 않고 창업을 한 탓에 초기에는 많이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 무역 아이템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는 미국 발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던 시기라 더더욱 힘들었다. 전 직장에서 오랫동안 맡아오던 화학섬유나 원사 쪽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대신 직원들과 진지하게 소통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진심이 통했던지 무역 아이템과 바이어를 물색할 수 있었고 거래량이 크게 늘어났다.

한편으로 그는 무역업 외에 제조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직접 물품을 만들어보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당시 중국산 장 갑용 원사를 한국의 장갑 생산 업체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한 고객사에서 합작으로 중국 현지에 장갑용 원사 공장을 세우자고 제안해왔다. 2013년에 50:50의 비율(현재 100%지분 확보)로 자본을 투자해 중국 강소성 상숙시에 섬유 가공 공장인 상숙상윤방직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산업안전용 특수장갑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소재사를 가공 생산하여 중국 장갑 편직공장들에 판매하고 있다.

 

자전적 에세이집 출간…예술인과 인연이 사업으로

 

박 사장이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실은 ‘남 을 도와주려고’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사 업 아이템이 됐다.

회사 설립 후 5년 반이 지났을 무렵, 연 매출액이 400억 원을 넘어섰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창업할 때부터 컴퓨터에 ‘위대한 CEO 일기’라는 폴더를 만들어서 그곳에 매일 쓴 글을 저장했다. 언젠가는 중국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책으로 출간하여 청년들에게 용기와 열정,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었다.

2013년 5월부터는 글쓰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상해에 사는 교민 10여 명이 만든 모임인데 처음부터 함께했다. 회원들은 열심히 글쓰기를 익혀서 연말에 각자 책 한 권씩 내자고 약속했다.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박 사장은 회원 중 유일하게 그해 11월에 기업 경영에 대한 생각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인 《선한 영향력》을 출간했다. 그때는 마침 조정래 선생의 소설 《정글만리》가 베스트셀러로 시중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박 사장은 마치 자신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소설은 주인공이 중국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창업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후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는 소설에서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박 사장은 주인공이 창업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며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책을 썼다.

이 책에는 그의 경영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점은 ‘선한 영향 력’과 ‘감사하는 마음’이다. 기업을 둘러싸고 이해관계자, 특히 직원이나 고객과 일을 하는 과정에서 착한 마음 또는 선함을 나누는 방식에 대해서 서술했다.

책을 출간한 후 출간 소식을 페이스북에 게재했더니 많은 페친이 관심을 보였다. 독후감을 써서 페이스북에 올리거나 책 사진을 들고 인증샷을 찍어 공유하는 페친이 상당히 많았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독자들 가운데 나전칠기 공예예술가 김영준 작가가 2014년 1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되는 ‘상하이 아트페어’전시에 참가하고 싶다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그는 선뜻 부스비용 1,000만 원을 들여서 김영준 작가와 또 다른 회화 작가 김소희의 작품을 전시해주었다. 이때 바 로 옆 부스에 있던 한국 평면 회화 작가인 김남호도 만나게 됐다. 김 작가 도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미술경영을 전담하는 직원과 함께 최선을 다해서 도와줬다. 이 인연으로 작가들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게 되었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젊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전성진 전주MBC 사장과의 만남은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 었다. 전 사장은 2014년 1월 초 상해에 와서 ‘전주MBC 창립 50주년 기념 한국 미술 작가 4인전’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고향에서 온 언론 사 사장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고, 이듬해 1월 상해 전시회는 성공리에 개최됐다. 두 번에 걸친 미술 전시에 참가했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박 사장은 한국의 예술가들 역시 중국 미술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한국의 미술 작품을 중국에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 같은 걸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 제품을 중국에 팔아온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한국 미술 작품도 중국 시장에 알리고 판매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2015년 초에 상해에 330㎡(110평) 규모의 갤러리 ‘윤아르 떼’를 오픈했다. 큐레이터 2명과 대학생 인턴 2명의 인력으로 운영을 시 작했다. 3년간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한국 작가 30명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윤상윤, 김영미, 강철기 등 다수의 중견작가의 개인전과 2인전 등을 진행했다. 또한 청년 작가전을 포함하여 다수의 단체전 전시를 진행했다. 이 기간에 판매된 그림은 100여 점이었다. 그는 미술 작품 전시 업무가 자신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성향이 예술적인 일에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미술 공부에 매진했다. 우연히 한 · 중 미술 교류의 꿈을 가진 유학생을 도와주기 위해서, 나아가 한국 미술 작가를 돕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본격적인 예술 사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박 사장이 상해에 갤러리를 오픈했다는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자 한국 내의 유명 갤러리들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한국의 미술작가와 도예가의 작품을 상해에서 전시할 수 있는지를 타진해왔다. 그는 조선일보 미술관과 협력하여 상해한국문화원에서 달항아리 도예가 신경균 개인전을 2018년 3월에 열 수 있도록 지원했다.

박 사장은 한국의 청년 화가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는 사실을 알고 외면할 수 없어서 자비를 지원했다. 청년 화가 13명이 상해에서 3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중국의 이색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의 숙식과 생활비를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주리, 서완호, 김지현, 양나희 작가 등이 이 혜택을 받았다. 특히 김지현 작가와 이태랑 작가에게는 작품을 구매해주거나 창작비용을 각각 지원하기도 했다. 또 뮤지컬 배우 최윤이 상해에서 한국 뮤지컬 공연 사업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상해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 소설가와 시인 등 작가들을 비롯한 유명 강사를 자비로 초청해 상 해에 거주하는 한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30여 회에 걸쳐 ‘인문학 강좌’를 실시했다. 소설가 정도상과 이광재,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그리고 시인 김용택, 안도현, 손세실리아, 이정록, 손택수 등이 상해로 와서 강의를 했다. 이들의 특강을 위해 왕복 비행기 요금과 숙박비를 포함하여 초청 비 전액을 부담했다. 이 밖에도 판소리 명창들이 중국 상해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 해서 판 소리 공연도 몇번 열었다. 갤러리 운영 경비의 대부분은 박 사장의 호주 머니에서 충당했다. 경제적으로는 적자를 봤지만, 한국의 작가와 예술 가들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주었다는 측면에서 박 사장 자신이 가장 큰 이익을 봤다고 생각하고 있다.

 

갤러리 전념 화근 기존사업 위기…원상회복 상승 반전

 

박 사장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질 경우 자신도 두려울 정도로 무섭게 빠져드는 성향을 보인다. 그만큼 집념이 강하다. 박 사장은 예전에 다녔던 회사의 후배를 스카우트해서 무역 회사의 경영 전권을 맡겼다. 억대 연봉을 줄 정도로 파격적으로 대우해줬다. 특수장갑용 원사 제조 공장은 현지인들 가운데 당찬 여성을 발탁하여 회사 경영을 맡겼다. 그는 대신 갤러리 운영에 뛰어들었다. 모든 것이 잘 굴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 같은 일이 그에게 발생했다. 무역 회사를 맡아서 경영하던 후배가 회사의 부하 직원과 공모하여 회사의 자금 수억 원을 자신의 별도 계좌로 이체해놓고 일부 직원들과 규합해 새로운 회사를 창업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당장 상황을 파악해보니 사실이었다.

이들이 이런 파렴치한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박 사장이 창업 때 부터 회계 업무를 맡겼던, 믿을 수 있는 여직원이 유방암에 걸려서 치료와 요양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직원 대신 출납 업무를 맡았던 직원을 매수하여 공모한 것이다. 그는 당장 그들을 해고 했고,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후배를 중국 사법 당국에 고소할 생각을 했지만 결국 깨끗이 잊기로 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회사 내부 문제로 중국 사법 당국에 고발한다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여겨졌다.

2017년 9월, 갤러리 ‘윤아르떼’를 정리하고 무역 회사의 경영에 다시 전념했다. 그를 따르던 직원들 가운데 일부는 퇴사했지만, 남아 있는 직 원들과 합심하여 회사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직원들도 그의 본심을 알고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다시 안정을 찾아서 성장세로 반전되어 현금흐름도 좋아지고 이익도 창출하기 시작했다.

상해상윤무역유한공사의 영업집조(한국의 사업자등록증에 해당됨) 발 행일은 2008년 3월 30일이다. 창업 4주년이 되던 2012년 3월 30일 전 직 원을 데리고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 후 매년 3월 말에는 전 직원 과 워크숍 겸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2013년에는 서울과 전주를, 2014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2015년에는 태국 푸껫을, 2016년에는 일본 오 키나와를, 2017년에는 홍콩과 마카오를, 2018년에는 인도네시아 발리를, 2019년에는 경주, 통영, 거제도, 부산을 다녀왔다. 2020년에는 코로나 펜더믹으로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해서 아수워하며 펜더믹이 끝나면 다시 직원들과 해외 여행을 하겠다고 한다. 창업 이후의 11년 간을 뒤돌아보면 첫 5년은 급성장세, 이은 5년은 정체 및 쇠퇴기, 10년을 넘기고 11년째를 넘기면서 회사는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조선족 대상 다양한 재능기부 등 봉사활동도

 

박 사장은 기업 활동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다양한 영역에서 재능 기부를 했다.

첫째, 중국에 유학 온 한국학생들을 대상으로 재능 기부로 멘토링 강의를 했다. 2012년 9월 상해한국문화원에서 개최된 ‘한국 대학생멘토 링 강의’에서 150명을 대상으로 창업을 주제로 강의했다. 2013년에도 세 차례(상해 교통대학, 동화대학, 상해대학)에서 특강을 했다. 그해 12월에는 북경 주중 한국문화원에서 200명의 청년을 대상으로 ‘청년 드림-중국 창업 세미나’에서 특강을 했다. 2013년부터 해마다 세계한인무역협회가 주 최하는 차세대 무역스쿨에서 청년과 한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이외에도 전북대 상과대학(2013)과 전북대 무역학과(2014), 한남대 (2017) 학생들을 대상으로 멘토링 강의를 무료로 실시했다.

둘째, 그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교민과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글 쓰기 동아리를 결성 · 운영했다. 우석대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 이 재규 교수가 2013년에 1년 동안 상해에 머물면서 ‘작가의 방’을 개설하여 글쓰기 모임을 지도해줬던 인연으로 독서동아리를 만들게 됐다. 그는 2014년부터 2017년 말까지 4년 동안 글쓰기 동아리를 주도적으로 운영 했다. 국적에 상관없이 글쓰기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매일 실천할 수 있 도록 도와줬다.

셋째, 상해에 있는 ‘두레마을 한국도서관’을 위해 1년 남짓 봉사 활동을 했다. 상해 한인촌에 있는 이 도서관에 신간 도서 100권과 그가 집필한 책 50권을 기증한 것이 인연이 되어 2013년 두레마을 도서관 송년회에 초대받았다. 이때 1년간 두레마을 도서관의 운영위원장으로 봉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흔쾌히 수락하고 도서관 봉사자로서 활동하다 보니 재정 이 어려운 점을 알게 되어 1년간 도서관의 임차료를 대신 내줬다.

넷째, 한인과 조선족 청년들에게 독서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리더스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그가 2014년 전주 ‘리더스 독서클럽’으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했는데, 이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상해에서 독서클럽을 개설했다. 그 해에 모두 118권의 책을 읽었다. 상해 리 더스 독서클럽은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에 모임을 하고 있는데, 재적 회원 100명 가운데 10여 명이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그는 서울과 전주, 인천 등지의 한국독서클럽에서 무료 멘토링 강의를 했다.

다섯째, 미술 전시회의 기획, 진행 등을 무료로 봉사했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김남호 미술 작가의 용암동굴 전시회를 2017년 4월 월드옥타 제주대회 기간에 맞추어 개최할 것을 제안하고 지원도 했다. 전시 기간에 팔린 작품의 대금을 자신에게는 단돈 1원도 남기지 않고 모두 김 작가에게 줬다. 이외에도 그는 2019년 6월 3일부터 상해 장안사에서 금사경 (金寫經: 아교풀에 갠 금가루로 베껴서 쓴 경전)의 외길을 걷고 있는 김경호 화백 의 작품 전시회도 개최했다.

 

대가족 생활 원만한 성격 ‧ 예의 바른 태도 형성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시절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전매청(현재 KT&G) 공무원이 된 아버지 박태출과 어머니 이삼순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익산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던 탓인지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장장 12개월 만에 태어났다. 이 때문에 또래 아이들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나갔다. 어렸을 때 그의 별명은 ‘보리 뚱뚱이’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면 항상 꼴등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많이 당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농구에 열중했다. 운동을 하니까 살도 빠지고 키도 훌쩍 자랐다.

어려서는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삼촌과 고모 등 대가 족이 함께 살았다. 그는 대가족과 함께 부대끼며 보냈던 덕분에 원만한 성격을 형성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의 바른 태도를 익힐 수 있었다.

아내 조정원(54)와 사이에 아들 박완진은 스탠포드대학교에서 대학원 석사까지 마치고 현재는 글로벌 투자 회사인 베인캐 피털 한국법인에서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딸 박연정은 미국의 유펜대학교 이과 계열로 진학하여 1학년을 마친 뒤 다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산부인과 레지던트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박 사장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늘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열정을 가지고 삶을 긍정적으로 사시는 모범을 자식들과 후세들에게 보여주셨 기 때문이다. 현재 80세가 넘으셨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노년을 즐기면서 공인중개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 사장이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유전자 덕분이라고 말한다. 부지런한 태도로 삶을 살아온 것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근면한 모습을 보고 익힌 덕분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