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부장관상 : 박현순

산자부장관상 : 박현순 인터바스상해유한공사 대표(중국)


 39년 양변기 제조 유통에 전력투구 ... 



세계 최초 BATH 테마파크 조성


 박현순 인터바스(상해) 도자기 유한공사 회장(63)은 1980년대에 아파트 문화가 시작되면서 바깥에 있던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냄새나는 화장실이 쾌적하고  건강한 공간이 되어야함은 물론 디자인까지 접목을 시켜 감성의 공간이 되면 사업성이 있겠다고 판단하고 비행기표를 살돈만 있으면 유럽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선진국 화장실을 연구하고, 디자인은 이태리, 품질은 독일, 가격은 인건비와 손재주가 있는 태국에서 KS를 획득하고 한국형 욕실시스템을 만들어 200만호 주택 건설현장에 수급안정을 가져오는데 일조하게 된다.


 특히 당시 1회 물사용량이 13리터(콜라캔으로 36개분량)인 양변기를 보고 국내최초로 6리터 양변기를 개발하여 특허청으로부터 특허인정을 받고 국내 타 위생도기 생산업체들과 특허기술을 공유하여 국내 수자원 절약에 기여한 공로로 환경부장관 및 대통령표창까지 수많은 표창과 더불어 언론에 대거 소개되면서 동원 인터바스의 이름으로 수출 및 내수의 힘을 얻어 건강한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86년 7월 1일 동원무역을 창업하여 자회사인 동원세라믹㈜와 인터바스㈜ 에서 타일, 위생도기, 수전, 욕실가구 및 액세서리, 소품 등을 개발 및 생산 수출입 하며 욕실이라는 공간을 종합적으로 연출하고 시스템화하는 욕실 디자인 전문그룹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화장실이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스마트하고 즐거운 공간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욕실공간에 뛰어든지 올해로 39년째를 맞는 박 회장은 아직도 친환경 욕실을 넘어, 아름다운 디자인과 스마트한 욕실 혁명을 꿈꾸고 끊임없이 변신중에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용기와 배짱, 정의감, 모험심 길러 

 1960년에 서울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박종열)는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큰 규모의 제재소 공장을 경영했고 어머니(이기임)는 조치원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렸을 때 유복한 생활을 향유했지만, 공부를 싫어하고 운동과 친구들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약한 애들을 대상으로 돈을 뺏는 양아치들과 한판 붙기를 좋아하는 의리파 깡패(?)였다. 무예를 수련한 탓에 합기도와 태권도 등의 단수를 합치면 7단에 이른다.



 박 회장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만사를 젖혀놓고 몰입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중학교 때는 전자제품 조립에 푹 빠졌던 적도 있고 탁구에 재미를 느껴서 밤새 운동을 했다. 어릴 때 꿈은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 개그맨과 악기연주를 무척 좋아해서 영화배우학원과 드럼학원도 각각 다녔다. 그의 좌우명은 “죽어도 폼생폼사” 가라는 학교는 안가고 가출하여 농촌에서 어르신 농부를 모시고 3개월 정도 생활했던 적도 있다.

 인천 재물포에 있는 선인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는 학교에 다니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 때 퇴학통지서를 세통이나 받았다. 






 부모님의 속을 많이 썩여드렸다. 천안에 있는 천원공업전문대(호서대학교 전신) 디자인학과를 입학, 졸업했다. 대학생 때 리더가 되고 싶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이 때문에 대학시절 160명의 회원이 가입한 ‘건전가요 동호회’의 회장을 맡았다. 


 그는 친구 포함, 사람들을 조화롭게 이끄는 경험을 많이 하면서 사장에 대한 꿈을 꿨다. 지도자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만 골라서 처리하고 솔선수범하며 인기 있는 사람이 됐다. 유머감각도 중요하다. 웃기는 이야기와 액션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는 자신 때문에 상대방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기뻤다고 했다. 습관처럼 남 웃기는 것을 좋아해서 유머 소재를 늘 준비하며 살았다. 직장 생활하는 과정에서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서대학교 영문학과로 편입, 졸업했다. 북경대 e-MBA, 상해교통대, 한양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하는 등 CEO의 역량개발에 심혈을 쏟았다. 

 


 8개월 월급 받지 않고 첫 직장 생활...의리로 무역 실무 터득

 박 회장은 전문대학교를 졸업한 22세 때 W인터내셔널이라는 작은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경제 호황기를 맞이하여 무역 붐이 일었던 탓에 무역상사에서 꼭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지원서를 제출했다.


 면접 보는 날 그는 면접관에게 “지금 당장 도움이 될 수 없겠지만, 입사 기회를 주신다면 월급을 받지 않고 새벽부터 나와서 창문과 책상을 닦는 일부터 시작해서 꼭 없으면 안 되는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월급을 받지 않겠다는 박 회장의 다짐을 확인하고 그를 채용했다. 


 박 회장은 첫 출근부터 사무실 청소를 하면서 온갖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도맡았다.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하면서 인기있는 막내 직원이 됐다. 일요일에도 자발적으로 출근했다. 그동안 친구를 좋아했던 박 회장은 비즈니스를 최우선으로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특히 회사의 카탈로그와 문서들을 정리하면서 업무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박 회장은 입사한 지 한 달이 넘을 무렵, 이태리 타일 카탈로그를 들고 을지로 타일가게를 상대로 영업하는 일이 주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무역상사에서 샘플 또는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구매자와의 계약이 성사되면 해외에 주문을 넣어 납기일에 맞춰 제품을 수입하는 신용거래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다. 타일 가게 사장들이 그의 마케팅을 외면했다.


 박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와이셔츠에 빨강 넥타이, 파랑 바지, 은색구두, 노랑 재킷을 입는, 소위 ‘태진아식’패션에 007검정색 가방을 들고 을지로 타일  가게를 누볐다. 오퍼상 사기꾼으로 오해를 받았지만, 매일 을지로와 강남, 여의도 등 타일가게 및 공사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눈 또는 비가 오는 날은 물론,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회사 사장에게 ‘충성’을, 고객에게 ‘의리’를 내세우면서 온갖 수모와 냉대를 이겨내고 정말 끈덕지게 돌아다녔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두 컨테이너 계약을 수주했으며 입사 8개월 만에 급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급여의 5배가 넘는 상여금을 매달 받았다.

  


아파트 안에 화장실이 설치된 것을 보고 평생 한 우물을 파

 1986년 500만원의 자본으로 3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하고 ‘동원무역’을 창업했다. 무역회사에 5년 근무하면서 끈기와 성실은 물론,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수적인 능력인 대인관계 기술을 터득하는 등 치열하게 자신을 담금질 했기 때문에 1인 기업의 사장은 자신이 있었다. 사무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신정동 부모님 집 옆의 신문보급소 골방에 전화기 1대와 책상 1개, 할부로 뽑은 차 한 대로 시작했던 1인 기업이 7년 만에 7층짜리 단독사옥을 매입했고, 2015년에 경기 김포와 음성에 20,000평 규모의 공장과 물류센터를 보유할 정도로 회사를 키웠다. 



 첫째, 그의 지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둘째, 끈끈한 유대로 직원들을 성심껏 대하고 협력체와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도덕을 잘 준수했다. 셋째,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소수 정예군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을 확보해야 한다. 이때에 직원들의 능력을 존중하고 최대한 그들의 능력에 따른 의견을 종합하여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심사숙고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속전속결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넷째, 회사를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협력과 상생의 미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88서울올림픽 후 2백만 호의 건설특수를 예측하고 막대한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반드시 우수한 품질의 양변기를 확보하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였다. 그는 시장조사를 한 결과, 태국의 5대 그룹 중 하나인 K양변기 제조업체와의 OEM 방식으로 협력방안을 모색했다. 태국의 양변기 회사는 박 회장의 협상단을 4번이나 거절했다. 게다가 한국의 대기업들도 양변기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끈기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설득해 K공장의 한국 총판을 따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OEM을 했던 태국 K공장에서 생산된 양변기를 1년 동안 서류심사를 준비하고 1주일간의 강도 높은 태국 현지 공장 실사까지 받은 뒤 KS마크를 획득했다. 박 회장의 전략은 태국에서 양변기를 만들되, ‘주문자상표 부착’방식으로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혔다. 이처럼 박 회장은 미묘한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공격적으로 나아가기’와‘멈추고 과감히 물러서기’의 때를 잘 파악했다. 특히‘돈을 추구하되, 돈을 쫓지는 않아야 한다’는 뚝심으로 매진한 결과, 일을 통해서 정신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기술 투자를 통해 선금을 요구하는 마케팅 펼쳐

 박 회장은 기술우위를 지향하는 기업을 일궈서 선금을 받은 뒤 물건을 파는 전략을 폈다. 경쟁이 심하고 기술적 우위가 없는 작은 회사를 경영하면 갑의 횡포 때문에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깨달았다. 이 때문에 그는 자체 경쟁력을 갖춰서 갑에게 선금을 요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강소기업으로 키웠다. 장인정신을 발휘해서 기술우위의 확보방안은 물을 절약하면서 소음을 줄이는 2가지의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역점을 뒀다. 


 1980년대부터 국내 양변기 제조업체들은 13리터의 양변기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박 회장은 1994년에 수세능력도 갖추면서 소음까지 최소화하는 국내 최초 6리터 초절수형 양변기를 개발, KS인증과 환경마크를 획득했다. 게다가 물 절약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을 받아 환경부장관 및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의 노력은 2014년에야 비로소 6리터 양변기 사용을 법적으로 의무화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2010년부터 3.5리터 극초절수형 양변기와 항균기능이 첨가된 다양한 제품을 개발, 2017년 5월에 발명특허를 출원했으며 ISO9001인증을 받았다. 이 제품은 ‘AVING VIP ASIA 2010’의 100대 제품에 선정되면서 효자상품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투자로 양변기 등으로 소비되는 물을 획기적으로 절약했고 환경오염방지와 국내 종말처리시설 추가 건립에 따른 예산 낭비를 대폭 절감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기술 개발 외에도 양변기에 다양한 컬러를 반영하는 디자인 혁신을 주도했다. 그는 일반 양변기 등 욕실 제품은 ‘동원interbath!’ 브랜드로 출시하고 벽지 및 커튼, 넥타이, 커피 잔, 스카프 등에 쓰이는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 등을 세면대와 욕조 등에 적용, 고급스런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의 3배나 높은 가격으로 국내의 상류층은 물론,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 동남아 등지에 수출 판매하면서 고급 화장실 시장을 휩쓸었다. 특히 중국 상하이에서 2010년에 개최된 ‘욕실 주방 국제박람회’에서 기존 전통의 백색제품과는 전혀 다른 커피 잔처럼 예쁜 무늬를 디자인한 타일과 세면대, 양변기 제품을 내놓아, 중국 소비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두바이, 대만, 중동, 이태리, 미국, 일본 등에서 대리점 187개를 계약, 14개국에 수출했다. 이 덕분에 2010년 중국 주택산업협회와 중국인테리어협회 등이 공동주관하는 중국주거문화발전에 기여한 100대 기업상을 받았고 중국 유명 브랜드상과 중국녹색친환경제품상도 각각 받았다. 이러한 기술 투자와 디자인 혁신을 통하여 IMF은 물론 2008년 금융위기에도 주문이 밀려들어 매출을 상향조정했다. 이처럼 그 누구도 쉽게 흉내를 낼 수 없는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터바스의 핵심은‘기존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화장실의 개념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실’ 또는 ‘머물고 싶은 욕실’을 만들어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03년 상해 진출, 청소년 선도 봉사 활동에 앞장서다


 2003년 중국 상해에 인터바스 법인 설립과 동시에 공장을 건설하는 등 본격적인 글로벌 경영을 추진했다. 2005년 교민신문을 통해 상해한국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한다는 기사를 접한 뒤 신축중인 상해한인학교에 위생설비물품을 기증했다. 이를 계기로 상해 한국상회(한인회) 자문위원으로 위촉을 받아 봉사활동에 나섰다. 


 그는 어렸을 때의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청소년 선도활동에 앞장섰다. 2006년에 상해 한국청소년사랑선도위원회를 발족,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바른 가치관 정립 및 생활태도를 위해 거리캠페인과 직통상담전화를 개설하고 경시대회 및 체육활동과 문화행사를 잇달아 개최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상해지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차세대무역스쿨과 장학금 수혜자 발굴, 사생대회, 중국어 말하기대회, 영어경시대회, 국제교류 청소년 인턴십 및 학술대회도 개최했다. 특히 한중 청소년 공동체인 ‘하오펑요’를 창단, 한국과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역사를 함께 공부하는 동아리를 운영했다. 


 그는 상해한국사회(한인회) 19대와 20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상해인민병원과 서울 백병원의 협약식을 체결하고 상해교민들이 응급 시 대체서비스인 외래진료 및   의료자문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보험혜택, 입원 치료 수술 등에서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의료서비스를 구축했다. 상해한인어머니회를 발족하여 교민사회의 청소년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주부 리포터를 채용, 교민동정과 생활, 교육, 시장정보를 제공하면서 아름다운 가게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행복한 교민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총력을 경주했다. 두 번에 걸쳐 상해 한국상회 (한인회) 회장을 맡으면서 교민자녀 교육지원과 상공인기업지원을 위한 활동, 교민 주부들의 사회진출 지원활동, 재중동포의 교류증진 및 협력증대, 교민회관 건립 등의 사업을 주도했다. 


 2006년부터 상해한국학교 인사위원회 위원장과 재단부이사장, 재단이사장 등을 맡는 등 7년간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세계한국학교 중 최대 규모로 발전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그는 한인회 봉사활동을 하면서 상해한국학교 신축공사와 상해 엑스포 한국관에 20만불의 위생설비를, 중국 북경 한국학교 증축과 신축하는 대만 한국학교, 중국 소주 한국학교와 증축하는 호서대학에 17만 불의 위생설비자재를 각각 기증했다. 2010~2011년에 상해 교민사회발전기금으로 10만불을 기부했으며 유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성금을 지속적으로 냈다. 이와 함께 해외에 진출한 재외동포경제인들이 경쟁이 아닌 서로 돕는 상생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시장 할인마트업체와 온라인 쇼핑몰을 공동 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상해 코리안 타운에 현지인과 외국인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명소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모든 상점들과 함께 한국문화를 홍보하며 실질적인 비즈니스에 실익이 될수 있는 한인타운이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 BATH엑스포 및 욕실산업단지를 조성하다

 40년 화장실 사업에 외길을 걸어온 박 회장은 2016년부터 충북 음성군에서 양변기를 생산하던 공장의 주변 5만㎡부지를 매입, 400억 원을 투입, 10개 동의 대형 건축물을 건립했다. 세계 최초 화장실 테마파크를 조성 중인 이곳에는 전세계 욕실 관련 유명 브랜드가 대거 참여하는 아울렛 몰과 수출입을 상담하는 엑스포몰, 기술연구소와 도서관, 문화연구소, 박물관, 갤러리 등의 시설을 꾸몄다. 이 테마파크는 전국에 끼가 있는 예술인들의 커뮤니티 공간을 무상제공하며 그들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전세계 욕실 제품 및 작품을 전시하며 창의적인 제품을 체험하면서 교육과 문화를 전담하는 다양한 아카데미 등을 개설했다. 욕실업계 종사자는 물론, 양변기 등 욕실 관련 제품을 유통하는 업체 관계자는 물론, 아파트 시공 및 인테리어 업체의 건축업자, 수출입을 상담하는 바이어, 청소년과 일반인들이 견학하는 등 특히, 주말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박회장의 경영철학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였다. 작업복 차림으로 현장 노동자가 하는 막일을 스스럼없이 해낸다. 힘든 일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처리하는 박 회장은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는다.


 가치있는 일들은 직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차세대 리더들을 육성하고 싶어 한다. 방송사 및 다양한 매체 등에서 바스 테마파크를 취재하러 오면 직원들이 인터뷰를 대신할 수 있는 기회를 민들어 가고 있다. 박 회장을 아는 지인들은 ‘밥을 평생 사주는 CEO’로 알고 있다. 그는 평소 꼼꼼하게 기록한 메모를 토대로 두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자서전 ‘양변기와 함께 춤추는 CEO’와 사장학 입문서로 인기를 끈‘이왕 사는 거 신나게 사장 한번 해보자’ 등에는 그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소유해본 사람은 공유하고 싶어한다” 면서 자신이 경험으로 산 모든것을 “사람”, “세상”과 나누고자 했던 박현순 회장은 화장실을 화장시킨 남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은 일이 아니고 일은 생활이다 (work is not work. WORK IS LIFE) 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는 박 회장은 대만 국적의 황 페이팅을 만나 2남 1녀의 자녀를 낳았다.